• "살아줘서,
    이야기해줘서 참 고맙다"
    [책소개]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이매진)
        2014년 10월 25일 02: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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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한테 강간 당했는데 기억할 수 있어요?” 친아버지에게 3년 동안 성폭력 피해를 입은 스무살 소라는 피해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모는 변호사에게 이렇게 묻는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체 성폭력 중 ‘아는 사람이 저지르는 성폭력’이 70퍼센트가 넘지만, 가족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친족 성폭력은 특히 피해자가 저항하기 힘들기 때문에 이웃과 사회의 도움이 절실하다. 성폭력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 문제기 때문이다.

    1994년 9월 한국 최초의 성폭력 피해자 쉼터인 열림터가 문을 열었다. 올해가 20주년이다. 지난 스무 해 동안 ‘모든 여성을 위해 언제나 열려 있으며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게 하는 터’ 열림터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일상을 회복하고 상처를 치유할 뿐 아니라 자립해 살아가기 위한 삶의 터전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360명(2014년 7월 1일 기준)이 이곳을 다녀갔으며, 72퍼센트가 친족 성폭력 피해자다. 피해자 10명이 모여 사는 작은 집이지만, 헌신적인 활동가들과 함께 피해자가 고소 등을 거쳐 자기가 입은 피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돕고, 사회에 나가 기본 생활을 할 수 있는 훈련을 하며, 성폭력 피해를 치유해 ‘생존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돕는 여러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한 지난 20년을 정리하기로 한 열림터 활동가들은 쉼터에 살다간 피해자들 중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16명을 만났다. 2년 남짓 피해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씨줄로 하고 열림터에 남은 기록과 활동가들의 기억을 날줄로 삼아 열림터 생활, 수사와 재판 과정, 자립, 후유증, 어머니, 가해자 등 6개 쟁점으로 뼈대를 만든 뒤,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덧붙여 《우리들의 삶은 동사다 친족 성폭력 생존자와 열림터, 함께 말하다》를 썼다.

    우리들의 삶

    말하기와 기록하기를 거쳐 피해자를 넘어 생존자로

    1장 ‘열림터 ― 새로운 삶을 열어가는 곳’에서는 쉼터의 일상을 배경으로 집이면서도 집이 아닌 쉼터에서 치유와 자립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와 자립을 위한 공간이지만, 새로운 사람과 낯선 생각이 만나 이런저런 갈등을 겪는다.

    열림터가 “익숙하고 편안한 집” 같다는 19살 정윤이, 열림터를 다니며 자기를 돌보는 법을 알고 내면의 힘을 깨달은 원미,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거듭나는 열림터의 일상이 “새 신을 갈아 신은 시간”이었다는 여운이 이야기가 성폭력 피해자와 이웃이 함께 사는 사회를 고민하게 한다.

    2장 ‘아버지를 고소하는 딸 ― 법에도 마음의 자리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피해자가 가족인 가해자를 고소하기 전까지 겪는 갈등과, 고소 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살펴본다.

    14년 동안 이어진 아버지의 성폭력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가 고소였다는 유림이, 의붓아버지의 성폭력에 맞서 당당히 법정에 선 진아, 친아버지의 성폭력을 벗어나려는 몸부림 끝에 고소를 택한 소라는 진술 과정에서 흐릿한 어린 시절의 기억에 맞서 싸우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법정에서 서서 갈등하며, 2차 가해에 시달리면서도 꿋꿋하게 치유의 여정을 걸어간다.

    3장 ‘내비 없어도 내비두기 열림터 ― 가족 없이 나홀로 흔들리는 자립’에서는 열림터를 퇴소한 피해자들이 자립이라는 과제 앞에서 좌충우돌하며 자신만의 삶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엿본다. 생존자들은 사회가 주던 도움이 끊긴 상황에서 홀로 애쓰면서 고단하고 외롭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에 뿌리내리려 노력한다.

    가족이라는 환상을 붙잡으려 애쓰는 민아, 명절에 갈 친정이 없어 속상한 승자, 조금 다른 삶의 리듬 때문에 힘들어하는 옥지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자립에 필요한 시간은 모두 다르다. 삶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정상 가족’을 꿈꾸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꿈과 현실의 간극을 메워줄 ‘비정상 가족’들이 필요하다.

    4장 ‘후유증 ― 피해 ‘이후’를 살아내기’는 아직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 피해자를 바라본다. 피해를 겪은 시절에 가족 안에서 몸에 밴 삶의 방식은 피해를 벗어난 뒤 낯선 환경 속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유림이, 수희, 현주는 피해 자체도 힘들었지만 피해자를 바라보는 편견에 가득 찬 시선이 견디기 어려웠다고 말한다. ‘씻을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어 영원히 훼손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면 자기가 입은 피해를 솔직히 드러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괴롭히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라는 주홍 글자가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려는 생존자의 노력에 눈을 돌리면, 매일매일 이어지는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힘과 다양성을 볼 수 있다.

    5장 ‘그때……엄마 어디 있었어? ―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는 피해자의 어머니를 둘러싼 환경과 어머니가 하는 여러 행동의 맥락을 살펴본다. 피해자들은 어머니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며, 피해 이후 모녀 관계는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알아본다.

    다혜, 민아, 향기의 어머니들은 자기를 둘러싼 폭력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어머니로서 해야 할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인 딸의 잘못을 먼저 탓하고, 당장의 생계만을 걱정하며, 한부모 가정이 받아야 하는 편견과 차별에 주눅 들고,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흔들리는 친족 성폭력 피해자의 ‘엄마’들. 그 어머니들에게 ‘어머니다움’이라는 가혹한 기준을 내세워 단죄하고 낙인을 찍기보다는 어머니들이 놓인 처지를 먼저 돌아보고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6장 ‘체념과 화해 사이 ― ‘괴물’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선택’은 생존자들이 가해자-피해자 구도를 넘어서는 다양한 선택을 하는 이유를 알아보고, 가해자를 향한 감정이 변해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성폭력 피해 자체보다 돈과 권위를 지닌 ‘삶의 멘토’를 가장한 의붓아버지의 부정적 공격을 더 힘들어한 영애, 가해자를 다시 한집에 살게 하고 결혼식에 불러 아버지 노릇까지 하게 하면서 ‘가해자’보다 ‘양육자 아버지’를 더 크게 여기는 수아, 가해자하고 한집에 살면서 평범한 아버지라는 가면에 기대는 지민이의 또 다른 선택은 회피나 굴복이 아니다. 치유와 회복의 과정을 거치고 많은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라는 정체성에서 한발 비켜서 자기 인생을 살아가려는 노력이다.

    우리 곁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치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 모범 답안은 없다. 모두 각자의 속도가 있고, 피해자는 단 한 명도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드러나지 않는 사회는 불행하다. ‘짐승’과 ‘괴물’이라는 ‘가해자’와 상처 입은 ‘피해자’라는 통념은 친족 성폭력을 둘러싼 복잡한 현실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창립 20주년을 맞은 열림터와 활동가들은 존재 자체가 치유의 증거가 되는 ‘생존자’들을 만나 함께 말하고 마음을 담아 기록했다. 가족. 관계, 사랑, 아픔, 공동체, 폭력, 성, 책임 등 익숙한 개념들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는 이런 진실한 울림이 친족 성폭력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통념에 작은 틈이라도 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제, 피해자들, 아니 생존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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