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케티, 슈퍼스타 된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21세기 자본] 자본주의의 논리로 자본주의 근본적 비판
        2014년 10월 24일 02:4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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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 피케티와  그의 저작 <21세기 자본>의 열풍이 식지 않는다. 피케티와 그의 저작에 대한 남종석씨의 서평 겸 독서노트를 게재한다. 2회에 나누어 싣는다. 이 글은 <사회운동>에도 실릴 예정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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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슈퍼스타 경제학자?

    800여 쪽에 달하는 경제학 서적이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을 폭발적으로 유발하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지난 3월 미국에서 [21세기 자본]이 발간되었을 때, 그 나라의 거의 모든 주요 언론들은 피케티의 책에 대해 서평을 쏟아내었다.

    이 책은 아마존에서 몇 주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전문 경제서적이 그와 같은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다. 실제 그 책을 읽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상관없이 많은 학자들이 피케티의 주장에 대한 저마다의 논평을 내 놓았다. [21세기 자본]은 누구나 한마디씩 해야만 하는 그런 책이 된 것이다.

    미국의 어떤 신문은, 이 프랑스 경제학자의 저작이 팔려나간 숫자보다 서평이 더 많이 올라온다는 것으로 이 현상을 묘사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반드시 기억해야할 사실은 피케티와 관련된 논란에 참여한 90%의 사람들은 피케티의 저작을 실제로 읽지 않았다”고 쓰기조차 했다. 텍스트는 꼼꼼하게 읽지 않고 서평들을 읽고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게 피케티 현상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의 끝에 위치한 반도의 남쪽에서도 상황은 유사하다. [21세기 자본]의 번역 과정은 그야말로 출판 기획의 놀라운 성과다. 출판사의 번역 계획부터 기획사의 초벌 번역, 책임 번역자의 재번역, 여러 학자들의 대조와 교열, 프랑스 원문과 대조, 다시 출판사의 직원들이 동원된 매끄러운 문장 교열 등 일체의 번역과정은 그야말로 물량 공세 그 자체였다. 그 결과 한국은 3번째로 프랑스 경제학자의 책을 접할 수 있게 된 나라가 되었다. 출판기획의 놀라운 기동력이다.

    피케티의 한국 방문도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언론들은 앞 다투어 슈퍼스타가 된 경제학자의 인터뷰를 기획했고, 보수와 진보, 모두 이 학자의 작업에 대한 논평을 내 놓았다. 심지어 규제 완화와 노동소득 저하, 공기업 민영화를 주도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여권의 대선주자조차 ‘피케티의 주장이 옳다’고 발언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케티 자신은 새누리당이 추구하는 어떤 민영화도 지지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은 피케티의 주장을 마르크스주의나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폄하했고, 진보주의 경제학자들은 ‘새로운 복음’을 접한 듯 피케티의 작업에 찬사를 보냈다.

    피케티에 대한 진보주의의 열광은 당연해 보인다. 피케티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불평등은 필연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으며 보이는 손에 의해 불평등이 조정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형태로 진화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평등을 중요한 해결과제로 삼고 있는 진보주의, 복지주의에게는 [21세기 자본]은 엄청난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좌파를 대변하는 학술잡지인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피케티의 저작에 대한 서평을 게재했으며, 진보적인 학자를 포괄하고 있는 사회경제학회의 여름 학술대회는 피케티를 주제로 치러지기도 했다. 일부의 좌파들은 ‘피케티를 어떻게 급진화시킬 것인가’를 주제로 단행본을 내었다.

    한국의 진보적 정치담론 역시 양극화 해소, 불평등 해결을 주요한 과제로 삼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장 규제, 세금 인상, 보편 복지, 노동의 실질임금 향상을 통한 경제 성장이라는 일련의 과제들을 중요한 의제로 삼고 있던 진보진영에서는 자신들의 주장과 거의 동일한 주장을 하면서도 매우 폭넓은 자료를 제시하는 피케티가 반갑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적 토론을 통해 불평등의 해소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믿는 점에서도 피케티와 한국의 진보주의는 친화성을 있다. 한국의 보편적 복지세력들 역시 사회운동이나 노동자들의 힘이 아니라 정치적 담론공동체에서의 합의를 통해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사회운동, 진보정당 운동이 피케티의 논의를 어떻게 생산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에서 쓴 것이다. 필자에게는 솔직히 이미 너무 많은 서평이 나온 마당에 다시 이 저작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의가 필요한 이유는 [21세기 자본]은 ‘아직은’ 지식인 내부의 논쟁의 대상되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진보좌파가 피케티의 논의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아직 혼란이 있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그를 무시하고 어떤 이들은 그의 작업이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후자의 입장에 서 있다.

    피케티

    토마 피케티(유투브 화면 캡처)

    2. 왜 피케티인가?

    피케티에 대한 미국사회의 열광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미국은 현재 가장 심각한 불평등을 겪고 있는 사회이다. 미국은 CEO들은 노동자들의 평균임금보다 200배는 넘는 보수를 받고 있으며, 소득 상위 10%가 전체 미국 부의 70%를 차지하고, 하위 50%의 인구는 고작 전체 부의 3%만을 보유하는 극단적인 불평등 사회이다.

    미국은 지난 30년간 인구의 50%의 실질소득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으며 경제성장의 모든 성과는 상위 계층들이 독점한 사회이다. 정상적인 문제의식을 지닌 미국인들이 어떻게 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국 노동자계급 가구는 저임금 체제에 허덕이며 가계를 꾸려가다 보니 부채를 통하지 않고서는 소비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경제는 이들 저소득층의 가계 적자 없이는 버틸 수 있는 여력조차 없는 것이다. 미국은 저소득층에게 약탈적 대출을 하고 이 대출을 토대로 소비가 유지되는 그런 사회이다.

    반면 부르주아들은 엄청나게 늘어난 소득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들의 부는 부를 만들고 이는 다시 자산 투자로 옮겨간다. 경제학자들은 이들의 부를 축복하고, 정치는 돈에 의해 매수되었다. 불평등은 경제성장을 갉아먹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조차 파괴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2008년 금융 붕괴 이후 미국 저소득층은 실업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중산층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소비를 증가시키지 못하고 있다. 반면 구제금융으로 뿌려진 천문학적인 화폐는 거의 대부분 상위 1%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중간계급들조차 불평등한 현실과 불안정한 미래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다.

    이런 위기의식과 사회에서 ‘무엇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판단이야말로 이들 계층이 여름휴가 바캉스 가방에 [21세기 자본]을 넣고 간 이유이다. 노동자계급 가구만이 아니라 중간계급조차 미국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시점에 [21세기 자본]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피케티의 열풍은 단지 현실의 불평등만으로 환원될 수 없다. [21세기 자본]은 통계자료를 통해 멀게는 지난 300년간 부가 어떻게 계층적으로 배분되어 왔는가를 보여준다.

    정확히 말해 프랑스의 경우 300년간의 자료를, 영국의 경우 200년, 여타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우 100년 간의 자료를 통해 부의 계층적 분포, 부의 형태 변화, 국부통계의 역사, 조세의 변천과정 등 불평등과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20여개 국의 자료에 토대를 두고 말이다. 시간적 범위와 공간적 범위에서 피케티의 자료보다 더 포괄적인 것은 당분간은 없을 것이 확실하다. 이것이 그의 작업을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 장기 데이터는 자본주의란 필연적으로 불평등이 강화될 수밖에 없는 체제임을 선언한다. 피케티는 자본주의적 성장의 실패에서 불평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는 필연적으로 자본-소득 비율이 성장하기 때문에 불평등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피케티는 인구 성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부의 편중은 점차 자본주의를 세습사회로 변화시키며 지대추구는 이 체제의 본질인 특징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대추구란 부의 증가에 대한 기여 없이 대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피케티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원래 ‘낡고 부패한 체제’이다.

    그는 이런 논의를 신고전파 경제학의 이론적 도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주류경제학은 자본주의의 안정적 성장을 정당화하고 계급 간 조화를 주장한다. 주류경제학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불평등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경제적 기여에 대한 정당한 몫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더불어 비록 불평등이 있을지라도 자본주의는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노동자계급의 삶도 개조된다고 주장한다.

    피케티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도구를 그대로 가져와 반대의 결론을 도출한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정체 상태로 수렴할 것이며, 불평등의 증가는 필연적이다. 그의 책이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정책 대안도 제시한다. 그는 노동소득의 격차를 줄이고 자본세의 도입을 통해 불평등을 조정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인해 사회적 혼란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자본주의적 불평등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피케티는 단지 불평등이 어떤 예외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필연적 경향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개입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상속세에 대한 강한 누진세를 적용할 것을 요구하며, 세계 전역에 산개해 있는 개인들의 모든 금융 자산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이를 바탕으로 상위 1%에게 자본세를 부과할 것을 요청한다. 이를 통해 그는 사회국가 즉 복지국가의 강화를 주장하다. 이것이 불평등에 대한 그의 해법이다. 부르주아와 그 하수들인 경제학자들 말고 이런 급진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못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피케티의 논의가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그가 제시하는 온건한 해법에 부분적으로 기인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는 지속적으로 민주적 토론공동체의 합의를 강조한다. 그는 자본주의의 체제의 작동원리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인 관점을 갖고 있지만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치공동체의 힘에 대해서는 매우 큰 신뢰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고유한 모순을 자각하고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바람을 숨기지 않는다. 피케티는 어떤 의미의 사회운동적 대안이나 급진적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적인 담론공동체를 통해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점들에서 피케티는 일종의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비록 한국에서 피케티가 사회주의자, 마르크스주의의 동조자라고 비판받는 경우도 있지만, 다수의 자유주의자들이 피케티의 논의에 동조하는 이유는 그들도 현재의 불평등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수용하고 있으며, 어떻게든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다. 이는 물론 우리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대안이다.

    피케티는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고장 난 체제임을 주장하면서도 이것은 잘 고쳐 쓰면 모든 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체제임을 공공연히 주장한다.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나 복지주의자들이 피케티에 열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대안의 온건함에 있다.

    3. 자본주의의 일반법칙?

    앞에서도 간략이 언급했듯이 피케티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경제학적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 경제학의 일반적인 논의를 그대로 끌어들이고 있다. 피케티가 자본주의의 제1법칙이라고 명한 것 즉 자본소득배분율(α)=자본수익률(r)×자본생산성역수(K/Y)는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콥더글러스 생산함수와 국민소득의 항등식에서 도출되는 것이다.

    원래 이 항등식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소득배분은 자본과 노동이 각각 생산에 기여한 만큼 이루어진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러나 피케티는 이를 이용하여 자본주의는 왜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강화시키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더불어 그가 자본주의 경제의 동학이라고 한 제2법칙(β=s/g. s=저축률, g=성장률)은 케인즈 경제학의 경제성장론에서 도출된 것이다. 신고전파 경제성장론에서 지속상태(steady state)라고 하는 것은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의미한다. 경제가 비록 단기적인 경기변동을 격을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는 안정적으로 지속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케인즈주의의 경제성장론을 그대로 가져와서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저성장 체제일 뿐이며 전후의 고성장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케티는 자본주의는 발전할수록 성장이 정체하는 상태 즉 정상상태(stationary state)에 수렴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 법칙으로부터 피케티는 경제성장률(g)은 언제나 자본수익률(r)보다 낮음으로 자본소득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피케티는 자본-노동 소득배분율도 지속적으로 악화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본가는 노동자들이 임금 상승을 요구하면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노동을 자본으로 대체해버리기 때문에 노동의 실질임금이 비록 상승하더라도 자본은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노동절약적인 투자를 촉진함으로써 임금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 통해 국민소득에서 노동이 가져갈 수 있는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피케티는 이를 역사적으로 대체탄력성(σ)이 1보다 크다는 것으로 정당화 한다(σ>1). 대체탄력성은 자본, 노동 비중(K/L)과 이 두 생산요소의 한계생산성의 비로 표현된다. 그는 물론 왜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크게 되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답변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피케티의 자본주의의 제1법칙, 제2법칙은 모두 신고전파경제학자들이 정립한 경제성장론에서 도출된 것이고, 자본주의 전 역사에 걸쳐 보았을 때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크다는 주장 역시 피케티의 스승격인 소로우, 힉스 등이 일반화한 CES 생산함수에서 가져온 것이다. 신고전파의 생산함수는 생산과정에서 자본가가 기여한 것은 이윤이 되고 노동이 기여한 몫은 임금이 되어 계급간 조화로운 소득배분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또한 신고전파의 경제성장론은 인구성장률과 자본스톡성장률이 같은 비율로 증가함으로써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반면 피케티는 자신이 제시한 자본주의적 법칙에서 신고전파의 경제성장론과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베타 값(β : 이것은 자본생산성의 역수 K/Y 이다)이 상승함으로써 자본이 가져가는 몫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윤, 이자, 배당 등 다양한 형태의 지대소득의 증가는 부의 불평등을 강화하고 계급간 조화로운 소득 배분은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보이는 손’인 정부의 개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계급간 갈등을 심화시키거나 다른 형태의 파국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케티는 자신의 선배 세대인 신고전파 이론가들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없는 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는 300년간의 역사적인 데이터를 보았을 때 자본주의는 1% 성장률에 수렴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저성장이 일반화된 체제인 것이다.

    그는 전후 자본주의의 역동적 성장은 따라잡기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예외적인 현상이며 이를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빠른 성장을 경험한 이후 일정한 시점에 이르면 선진국처럼 1% 성장률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런 저성장은 필연적으로 부의 집중과 불평등을 낳는다는 것이다.

    피케티가 부르주아 경제학의 도구를 활용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한 것은 장점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주류경제학을 신봉하는 학자들이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들의 거부감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소로우, 스티글리츠, 크루그만 등이 피케티를 지지하고 나선 이유는 분명 이런 입장과 연결되어 있다. 피케티는 자신의 선배들의 이론을 가져와서 자본주의란 원래 고장난 체제이며, 정치공동체가 적절하게 이를 조정하지 않으면 고장 상태는 더 심각해져 간다고 주장한다.

    계급 간 조화와 안정적인 성장을 주장했던 학자들 가운데에서도 피케티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들이 매우 많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고장났다는 것에 대한 경제학자들 내부에서 광범위한 합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신고전파 교과서에 익숙한 이들을 ‘이론적으로’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 불평등의 증대를 염려하는 세력들에게 다가갔던 것이다. 어쩌면 피케티 자신에게는 이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일 아닐 수도 있다. ‘법칙’이라고 그가 공언한 것은 그저 자신이 제시한 데이터를 정당화하기 위해 동원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르겠다.

    21세기 자본

    4. 피케티의 모순들

    피케티가 역사적인 데이터를 다양한 차원에서 제시한 것은 매우 탁월한 업적이다. 이런 장기 데이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여타 좌파들이 그렇게 큰 공을 들이지 않은 것은 악명 높은 사실이다. 20세기의 이윤율의 흐름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크게 주목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스톡의 장기 데이터에 대해서나 여타 소득 배분에 대해서 꼼꼼한 데이터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피케티가 이런 공백을 메운 것은 중요한 기여임에 틀림없다. 불평등 해결이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하면서도 그와 같은 작업을 지금까지 제대로 하지 못한 복지주의자들도 이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케티가 주류경제학의 방법을 수용했다고 우리가 그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것이 현실을 제대로 설명한다면 말이다. 문제는 피케티 자신이 자본주의의 법칙이라고 한 것들이 정치화하지 못하다는 데 있다.

    그는 자본주의가 1%대의 성장에 수렴한다고 주장하지만 왜 저성장으로 수렴되는가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큰 이유에 대해서도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장기적인 역사적인 데이터를 고찰해보니 그렇다고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렇다’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이 책이 지닌 매력을 떨어뜨린다. 경제학은 주어진 데이터의 의미를 해석하는 학문이지 데이터 그 자체가 경제학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피케티는 자본수익률, 경제성장률, 대체탄력성 모두 역사적으로 관측되는 것이라고 말할 뿐 왜 그런가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논리와 체계가 없으며 경기변화와 구조변동이 없다.

    더군다나 18세기, 19세기의 데이터에 기초하여 21세기의 자본주의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더 설득력이 떨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조건의 변화는 과거의 장기 데이터에서 비롯되는 추론이 갖는 의미를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피케티의 자본주의 법칙은 법칙이라기보다 일종의 선언이다. 역사적 데이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경향에 대한 선언.

    내적 정합성의 측면에서도 그의 논의는 여러 한계를 노출한다. 피케티는 노동소득배분율이 낮아지는 이유를 대체탄력성이 1보다 크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의 상대적인 한계생산성보다 자본-노동의 비가 더 급속하게 올라가기 때문에 노동의 실질임금이 저하한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노동절약적 기술진보로 인해 노동의 소득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자본] 3 즉 노동소득이 정체되는 이유를 논하는 장에서는 대체탄력성에 대한 분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피케티는 레이건/대처 시절 세제 개혁이 자본가들에게 새로운 인센티브로 작용하면서 CEO의 임금이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는 대체탄력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일종의 계급투쟁에서 노동자운동이 패배한 결과이다.

    [21세기 자본]에 따르면 80년대 이전 미국 최고소득 구간의 세율은 80%를 넘었다. 이 시기 미국 CEO들은 높은 임금을 받아도 그 소득이 대부분 세금으로 정부에 귀속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임금을 높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레이건의 보수혁명으로 인해 상위 1%의 세금이 대폭 낮아지자 CEO들은 자신들의 임금을 높이는 대신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계속하여 정체시켰다. 더불어 레이건 부시 행정부 시절 최저임금을 동결한 것도 노동소득 불평등을 극적으로 강화시킨다. 피케티는 노동소득의 정체에 대한 논의에서 자신이 제기했던 대체탄력성을 일체 논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점에서 [21세기 자본]은 경제학 이론서이기보다 장기적인 역사적 기록물에 가깝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이러하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예측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역사적 기록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큰 장점이자 정책적 함의를 지닌 야심찬 도전이다.

    피케티가 특별히 새로운 것은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대략 그럴 것이라는 짐작을 그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통해 정당화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그가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가와 상관없이 이 부분은 주목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이 그의 단점까지 감쌀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계속>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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