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미 그랄튼,
    사랑이 넘치는 아일랜드 빨갱이
    <지미스 홀> 레이트림의 민중들과 켄 로치의 역사투쟁
        2014년 10월 16일 10:4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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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Ken Loach)의 새 영화 <지미스 홀 Jimmy’s Hall>이 개봉했다. 항간에는 이 영화가 그의 오랜 영화감독 인생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말도 있었고, 실제로 그 스스로 “아침 일찍 일어나 촬영장에 가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해 그가 은퇴를 가늠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켄 로치의 든든한 조력자인 제작자 레베카 오브라이언은 “<지미스 홀>은 로치의 마지막 영화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5월 켄 로치는 자신의 열두번 째 칸영화제 경쟁부문 나들이에서 “어떻게 될지는 또 모른다”며 또 다른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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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됐든 일흔여덞 켄 로치의 여정이 그리 오래 남진 않았을 게다. 그의 영화를 사랑하고 지지해온 많은 이들에게 이는 무척이나 아쉽고 슬픈 일이다. 그처럼 끈질기게, 그리고 ‘사랑 넘치게’ 노동자계급의 삶, 역사적 계급투쟁의 아이러니에 대해 다룬 작가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의 영화 세계를 알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존경할 만한 스승을 만났다는 감동의 기억’과 무언가 빠진 듯하거나 평평하다는 인상이 주는 아쉬움, 그리고 그의 시선에 대한 ‘절대적인 옹호’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인 심상을 갖고 있었다.

    TV에서 필름으로 완전히 영역을 옮긴 이후 그의 노정은 철저하게 ‘사회적 리얼리즘’이었고 무척이나 진지하고 정직한 멜로드라마였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뭇 평론가들은 그의 영화가 내용적으로는 급진적일지언정 형식적으로는 무언가 뒤처져 있거나 혹은 밋밋하다는 식의 비판적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켄 로치 영화의 내용과 형식의 위상은 언제나 논쟁거리였다. 언젠가 그는 “내용이 형식에 우선한다”는 말로 자신의 영화 미학에 대한 강고한 입장을 드러낸 바 있는데, 이는 내용이 스타일에 대한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고 믿는 그의 미학적 신념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디자인이나 건축 등 다른 예술의 영역에서도 항상 맞닿아 있던 문제다. 아무리 화려한 기교를 부린 포스터를 만든다고 한들 실제 그 행사의 내용과 무관하거나 컨텐츠 자체가 빈약하다면 여러모로 무용한, 요란한 빈 수레로 남게 될 게다.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의 유일무이한 거장

    켄 로치는 70년대 이후 꾸준히 이루어진 그의 극영화 작업 속에서 (그는 종종 다큐멘터리도 만든다) 사회적 리얼리즘에 기반한 멜로드라마의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점은 켄 로치 영화를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영화 미학에 대해 일정한 오해를 만들기도 한다. 실제로 그에 대한 비판의 대다수는 그의 영화가 고정적이고 고루하며, 형식의 문제에 대해 별 고민이 없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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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사회적 리얼리즘 영화의 목록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켄 로치의 미학적 관점은 생각처럼 간단하게 정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대학시절 연극동아리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베르톨트 브레히트(1)의 서사극 이론을 접하고, 63년 BBC 텔레비전 감독교육생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거친 ‘영상으로 이야기하기’의 무수한 실험과 도전의 과정의 결과다.

    이것은 영국의 영화사가 존 힐은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저작 <켄 로치 – 영화와 텔레비전의 정치학>(2)(이후경 옮김)을 통해 초기 TV드라마부터 최근작에 이르기 까지 영국의 정세와 당대의 논쟁들을 끌어와 오늘날 켄 로치의 사회적 리얼리즘이 정치적 급진주의와 미학적 여정의 면밀하고 복합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드러낸다.

    한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켄 로치는 BBC에서 TV드라마라고 말하기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다양하고 급진적인 형식 미학적 실험을 거듭했다. 고정적이며 초역사적인 외골수적인 고집의 산물이 아닌, 항상 정세 혹은 대중이데올로기와 충돌하며 변모해온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노년의 켄 로치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하 ‘<보리밭>’) 이후 8년 만에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칸느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히든 아젠다>(1990)부터 시작된다면 아일랜드 역사 3부작이다.

    <보리밭>이 1920년대 초 아일랜드 독립전쟁과 그를 둘러싼 IRA(Irish Republican Army; 아일랜드공화국군) 내의 논쟁을 형제간 갈등과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다루고 있다면, <지미스 홀>은 배반당한 혁명, 절반의 승리로 끝난 전쟁 이후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계급투쟁의 한 일화를 배경으로 한다.

    이를 우리 역사에 비추면 일제시대 독립운동에 나선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갈등과 비극(cf. <보리밭>), 해방정국 시기 극우파들의 민중운동에 대한 폭력과 테러(<지미스 홀>), 그리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시기 대대적인 사회운동 탄압(<히든 아젠다>)으로 비유할 수 있다. 켄 로치의 아일랜드 역사 영화들이 동시대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다.

    다시 아일랜드 민중의 역사로 돌아오다

    지난 9일 국내 25개관에서 소규모 개봉한 <지미스 홀> 역시 섬뜩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실존인물인 지미 그랄튼은 아일랜드의 작은 농촌 마을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일랜드 ‘혁명적 노동자 그룹’(3)의 리더였다.

    어린 시절 그는 미국에 이민 가 노동자로 살았고, 당대 미국 노동자운동의 물결을 만나 노동자들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독립전쟁 시기 고향에 돌아오지만,(4) 1921년 체결한 앵글로-아이리쉬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미를 비롯한 반대파는 이 조약으로 탄생될 자유아일랜드가 결코 노동자와 소작농을 위한 나라가 될 수 없기에 ‘배반당한 혁명’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보리밭>에서 확인했듯 11개월간 이어진 시민전쟁에서 좌파는 패배하고 아일랜드의 비극적 역사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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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이로부터 10년 후인 1932년 지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시골의 언덕길로부터 시작된다. 댄스홀은 무너져버렸고 오래 전 함께 했던 동지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의 소작농과 노동자들의 삶은 패배적인 기운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암묵적인 폐허의 자리 위에서 지미의 ‘댄스홀’ 운동은 시작된다.

    당시 지미 그랄튼이 주도했던 레이트림 카운티의 ‘회관’은 소작농 계급의 모든 세대가 어우러져 함께 춤추는 파티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민족어를 배우고, 이 운동을 주도하는 마을 활동가들의 사상과 정세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들을 교류하는 거대한 교육의 장이었다.(5)(6) 게다가 당시 젊은 세대에게 팽배했던 보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카톨릭 문화에 대한 반감도 그들이 재즈댄스를 추게 하는데 한몫했다.

    영화 안에서 이런 갈등은 코믹하게 그려진다. 당시 지미의 투쟁에 가장 크게 반발했던 교구의 신부들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 파시스트들은 이 댄스홀이 매우 위험한 것이며 신성모독에 해당된다고 비난하고 점점 폭력적인 양상을 띤다.

    당시 아일랜드는 바티칸으로부터 교황의 사절단이 방문하는 과정 속에서 종교적인 열정까지 더해져 반공이데올로기가 극심했다. 이는 당시 아일랜드의 정세가 급속도로 우경화되고 북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서 활발했던 실업자 운동에 대한 격렬한 탄압이 있었던 것과도 맞닿아 있다.

    켄 로치 ‘게스투스’란

    당시 ‘지미스 홀’은 이 지역에서 일종의 민중법정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부당하게 빼앗긴 소작농의 토지와 거주지를 민중들이 주도하는 ‘재판’을 통해 다시 돌려주는 운동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주들과 파시스트들의 극렬한 공격 속에서 수세적으로 밀리기 시작한다. 이 첨예한 대립의 과정 속에서 ‘연대’ 행동이 이루어지는데, 이 시퀀스는 켄 로치의 다른 영화들과 조우하면서 일종의 형식화된 집단화된 행동을 보여준다.

    첫 장면에서 멤버들은 ①회관에서 이후의 전술 방향에 대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에서 논쟁하고, ②다음날 지주 저택으로 향해 행진하며, ③지주 저택 지나서 소작농 집으로 이동한다. ④그리고 지주에게 빼앗겼던 소작농 집을 다시 쟁취하고, ⑤몰려온 지주의 부하들을 몰아내고, ⑥짧은 집회를 열어 지미의 감동적인 연설을 듣고, ⑦회관에 모여 아이들이 부르는 아일랜드 민요를 듣고 춤을 춘다. ⑧그리고 이내 파시스트 그룹의 테러를 당한다.

    이것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클라이맥스에서도 밟아나가는 시퀀스다. 이를 통해 우리는 켄 로치에겐 인물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시퀀스의 이음새조차 ‘게스투스’(7)적으로 작동된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TV드라마 시절 철저하게 실험적으로 이루어진 브레히트에 대한 영향이 내용에 적합한 스타일을 갖추어 드러나는 것이다.

    희망의 원리

    근래 켄 로치는 점점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굳이 그가 최근 <엔젤스 셰어>나 <티켓>, <루킹포에릭> 같은 유쾌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는 사실을 빼더라도 켄 로치는 끊임없이 ‘역사적 비극’ 속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아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파해왔다.

    지미에게 아무런 증거나 공정한 재판의 과정 없이 아일랜드 역사상 유일무이한 ‘강제출국’ 조치가 이루어지고, 그가 자신의 연로한 친모와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떠나게 된다는 슬픈 결말에도 불구하고, 다소 허구가 섞인 마지막 장면은 켄 로치가 왜 다시 79년 전의 작은 이야기를 끄집어냈는지 알게 된다.

    맨 처음 그에게 댄스홀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던 10대 후반의 청년들이 “영원히 당신을 잊지 않을께요!”, “우린 계속 할 거예요”라며 인사를 건넬 때 지미 그랄튼의 잊혀진 투쟁과 영화를 통해 거듭되는 켄 로치의 역사투쟁의 조우를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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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켄 로치는 과연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물론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덜 나쁜 곳이 되지 않도록 개입할 수는 있을 것”이라며 자신이 꿈꾸는 끈질긴 소망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실로 그는 언제나 동시대 노동자계급에게 던지는 상세하고 정세적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때로는 “우리가 무엇에 반대하는지는 알기 쉽지만,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어렵다.”(<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2007)며 진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느냐고 되물었고, “나는 빵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해요.”(<빵과 장미>)라며 노동자들의 노동과 인권의 불가분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작농 연대투쟁 직후 우익의 테러를 당한 지미. 다음날 성당의 셰리던 신부가 있는 고해성사 상자에 들어가 언제나 그의 ‘댄스홀’을 헐뜯고 방해해왔던 신부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진짜 신성모독이 뭔지 아시오? 마음 속에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당신처럼 적에 대한 증오를 더 크게 갖고 있는 거요!”

    영화 속 지미 그랄튼은 예수처럼 사랑이 넘치는 ‘급진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지미의 이런 태도는 1930년대 아일랜드처럼 대한민국의 오늘이 ‘증오’가 사회 자체를 휩쓸고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

    대중운동의 패배 이후 희망이 사라진 사회에서 사람들을 규합하고 춤과 ‘교육’이라는 실천 속에서 대안을 만들어가는 그의 ‘운동’ 역시 귀감이 된다. 선험적으로 판단한 ‘옳은 것’을 들이대기보다 도덕으로부터 금지 당했지만 대중이 욕망하는 것으로서의 ‘재즈댄스’를 대안적인 저항의 양식으로 끌어안았다는 점에서도 예술과 정치의 조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지미와 그의 동지들에게 재즈댄스는 ‘희망의 원리’였던 셈이다.

    관객으로서 켄 로치의 역사투쟁을 잇기 위하여

    <보리밭> 당시에도 켄 로치는 아일랜드 내에 활발한 논쟁들 속에서 많은 지지를 받았고, 10여 차례의 깐 영화제 나들이 끝에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반대로 조국인 영국에서는, 영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극악무도하게 다루었다는 사실만으로 주류질서로부터 철저한 외면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그로 하여금 일말의 사기저하도 가져올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동시대 노동자계급과 침체된 사회운동에 자극을 던지고 개입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평생에 걸친 그의 이런 몸부림이 동시대의 자국의 지원보다는 유럽의 다른 지원과 후원자들 덕분에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보내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영화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들은 멸종위기 동물처럼 남아있는 좌파 지식인들과 끈질기게 자신의 길을 지키며 사회파 영화를 만들어온 노장을 지지하는 소수의 영화애호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국내에 와서도 그리 다르지 않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과 미국 서부 도시들에서 활발했던 청소노동자 조직화 과정을 다룬 <빵과 장미>, 그리고 <지미스 홀>을 비롯한 최근의 아일랜드 연작들이 지속적으로 국내에 소개되고, 소규모 개봉이라도 이어져오고 있지만, 그의 영화를 알고 접할 수 있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대도시에 얼마 안되는 아트하우스 극장들과 소규모 독립영화관들 등 전국 25개관에서 한정된 시간대에서만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적어도 한 달에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서 영화관에 갈 수 있는 대도시 시민이면서 아트하우스 영화관이 어느 곳에 위치했는가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정도로 문화적 자본을 갖고 있는 ‘교양 있는 시민’만이 그의 영화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진정으로 그의 영화를 보면서, 그 안의 논쟁과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이들의 고뇌와 갈등을 응시해야할 노동자-대중에게 켄 로치는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이런 사실은 켄 로치 자신에게도 뼈아픈 진실로 다가올 것이다.

    동시대의 현실과 조우하면서 치열하게 내용과 형식의 문제에 대해 사유해온 이 계급전사 영화감독이 맞닥뜨린 ‘시장주의’ 질서의 한계가 바로 우리가 서 있는 위치다. 이는 켄 로치라는 거장 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도,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심취한 대중들의 대오 각성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이런 영화를 알고 있으면서 더 많은, ‘몫 없는 자들’, 요컨대 이런 영화의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기꺼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각각의 위치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을 모든 섬세한 이들의 몫인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데미언’과 ‘댄’의 독립투쟁으로부터 시작해(<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지미에게로 이어졌으며 지난 10월 11일에도 아일랜드 물 사유화에 반대하며 도심으로 뛰어나온 10만여명의 후예들로 이어진 우리와 닮은 작은 나라 민중들의 고고한 역사투쟁의 정신이 먼 나라 남한의 노동자계급에게도 깊은 울림이 되지 않을까? 영화는 그것의 진정한 주인이어야 할 관객에게 보여지는 순간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 돌아가서 우리동네 켄 로치 영화제를 열자.

    <참고>

    1 독일 극작가·연출가로서, 독일의 극작가로서 서사극의 창시자. 감정이입과 카타르시스(정화)로 대변되는 서구의 전통적 연극관을 해체하면서 20세기 연극 운동에 서사극의 체계를 도입하고, 실험했다. 오늘날까지 많은 연극 연출가들이 주목하고 배우는 스승.

    2 존 힐, <켄 로치 – 영화와 텔레비전의 정치학>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185521046)

    3 the Revolutionary Workers’ Groups. 이후 1933년 아일랜드공산당(Communist Party of Ireland)을 창립하며 1944년에 가서는 아일랜드사회주의자공화당(Irish Socialist Republican Party) 창당.

    4 위키피디아, James Gralton

    (http://en.wikipedia.org/wiki/James_Gralton)

    5 Ronan McGreevy, 아이리쉬타임즈, Jimmy Gralton: a deported Irishman’s return (http://www.irishtimes.com/culture/film/jimmy-gralton-a-deported-irishman-s-return-1.1806775)

    6 Ronan McGreevy, 아이리쉬타임즈, Jimmy Gralton: a deported Irishman’s return (http://www.irishtimes.com/culture/film/jimmy-gralton-a-deported-irishman-s-return-1.1806775)

    7 쉽지 않은 개념이다. 개인의 행동을 결정짓는 사회적 관계, 계급적 조건까지 포괄하는 상호주관적이고 사회적인 개념. 서사극 이론의 주요한 개념이자 브레히트적 연극 연출론의 중요한 토픽. 서사극에서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고 인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이며, 그래서 계급적일 수밖에 없는 제반관계를 보여주도록 요구받는다. 즉 배우에 의해 사회적 게스투스가 매개되어 관객들로하여금 사회의 현실을 응시할수 있도록 돕는다. 오늘날 현대연극의 많은 연출가와 배우들이 이를 적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성공적인 예는 그리 많지 않다.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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