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평 '초록길 도서관'의 재미난 얘기
        2012년 07월 04일 06:31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은평구 역촌동 주민센터 옆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150 여 미터 정도 걸어 들어오면 큰 단풍나무가 있습니다. 오래된 단독주택에 심어져 있는 나무인데 어찌나 가지가 무성한지 담장 밖으로도 뻗어 넓은 그늘을 만들어줍니다.

    이 나무 그늘 아래엔 작은 평상이 있고 아침부터 밤늦도록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맞은편 햇볕 잘 드는 자투리 땅엔 손바닥만한 텃밭도 가꾸어놓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훈훈해지는 골목길 풍경입니다.

    이 골목길엔 이 곳 말고도 훈훈한 풍경이 또 있습니다. 바로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 ‘초록길도서관’입니다.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동네 주부들이 한 명, 두 명 도서관으로 모입니다. ‘왕초보 주부 영어교실’ 엄마들입니다. 애들한테는 영어공부 하라고 하면서도 정작 아이가 엄마한테 물어볼까 조마조마 했던 엄마들, 막상 공부를 시작하려니 엄두가 안 나고 학원이나 문화센터 가는 것도 두려웠던 엄마들이 모였습니다.

    영어교실은 우연히 도서관에 들린 미국 교포 선생님과의 인연으로 시작되어 두 달 째 접어들었는데 주부들의 열기가 대단합니다.

    ‘영어가 이렇게 재밌는 걸 왜 학교 다닐 때는 몰랐을까?’ 계돈을 모아 내년엔 미국의 선생님 집으로 놀러갈 계획도 세웁니다. 누가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사람도 없고 시험 봐서 취직할 것도 아니고 좀 잘한다고 잘난 척 하는 사람도 없고 좀 못한다고 무시하는 사람도 없고….. 스트레스가 없으니 재미있기까지 합니다.

    강요받지 않고 자발적이어야만 즐길 수 있는 것은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영어교실 주부들이 수업 후 한 참 수다를 떨다 싸온 도시락 나눠먹고 돌아가고 나면 수업 일찍 마친 1학년 아이들 여러 명이 우르르 도서관으로 몰려들어 옵니다. 뒤따라 들어오는 엄마들, 역촌초 품앗이 교육모임 ’초록반 친구들‘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엄마들이 돌아가면서 책을 읽어주고 독후활동을 합니다. 막상 교사가 되어 애들을 지도하니 힘들다며 ’동화 읽는 어른모임‘에 가입해 열심히 공부하는 엄마들도 있습니다.

    ‘초록반 아이들’이 가고나니 ‘바둑교실’ 친구들이 들어옵니다. 강사는 은평두레생협 이사장님, 올해 일흔이신데도 열성적으로 지역 활동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상하신 이 할아버지 선생님은 바둑수업 후 ‘천자문’까지 가르쳐주시는 서비스 정신을 발휘하시기도 합니다.

    매 주 화요일엔 ‘사군자’와 ‘민화’를 배우는 모임이 있고 수요일엔 ‘학부모 특강’ ‘건강강좌’ ‘DIY 교실’ 등의 공개 강좌 수업을 합니다.

    처음 도서관을 열고 ‘첫 아이 학교 보내기’강좌를 열었는데 강좌를 들으러 온 사람이 한 명 밖에 없어 강의가 아니라 일 대 일 상담을 했던 적도 있습니다. 구연동화 봉사를 해주시겠다고 멀리 강남에서 오셨는데 아이들은 다섯 명 밖에 모이지 않아 송구스러웠던 적도 있구요. 지금은 어떠냐구요? 왜 여름 프로그램 공지가 아직 없냐고 날마다 성화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학부모 특강으로는 ‘마음을 여는 아트테라피’ ‘자기주도 학습’ ‘엄마 아빠와 함께 하는 독서, 글쓰기 지도’ 등의 강좌를 열었고 의료생협 주치의들과 ‘주의력결핍과 과잉행동 증후군’ ‘바른 잇솔질’에 대한 강좌를 진행했습니다. DIY특강에서는 퀼트, 천연화장품, 생선초밥 만들기 등을 배웠습니다.

    이 중에 가장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은 ‘생선 초밥 만들기’입니다. 오래 전 이 동네에서 작은 횟집을 운영했었던 분인데 다른 동네에서 크게 성공을 해서 지금은 먹고 살 만하다고 합니다. 여기 저기 봉사도 많이 다니는데 초록길 도서관과의 인연으로 책도 기부하고 후원도 합니다.

    그래도 뭔가 더 도울 것이 없냐고 하시길래 ‘초밥 만들기’를 제안했는데 대박입니다. 재료비에도 못미치는 참가비를 내고 광어,연어,새우 초밥 만드는 법도 배우고 배불리 시식도 했습니다. 이 행사 후 초록길 도서관에 실속 있는 프로그램이 많다는 소문이 동네 엄마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시 인기를 끌려면 먹는 게 최고입니다.

    초록길 도서관에서 가장 자랑할 만한 프로그램은 토요일 도서관학교 ‘도토리학교’입니다. 초등학생 20여명을 모아 15주 동안 프로그램을 진행했지요. 독서토론수업, 미술활동, 요리실습, 텃밭농사, 놀이체험 등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여러 사람의 품이 필요하고 힘은 들었지만 가장 보람 있었지요. 인근 서오릉근처의 주말농장을 분양받아 텃밭을 가꾸었는데 아이들과 밭을 일구고 거름주고 씨뿌리고 잡초도 뽑고 수확하기까지 농사짓기의 전과정을 함께 했답니다. 처음 밭 갈 때 거름 냄새가 싫다 벌레가 있다 도망가던 아이들도 감자 캐고 방울토마토 따서 먹을 때는 충만함이 넘칩니다. 봄에 함께 산에 올라 진달래꽃을 따다 화전을 해먹었던 추억은 아이들만이 아니라 함께 한 어른들에게도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이렇게 도서관 자랑을 하면 거기가 도서관이냐 문화센터냐 뭐 이런 질문을 받게 됩니다. 비록 작은 도서관이긴 하지만 양서 8000여권을 보유한 실속 있는 ‘도서관’입니다. 이 모든 책은 주민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 그리고 여러 곳에서 소문을 듣고 보내온 소중한 책들이며 도서등록 작업 후 3월부터 대출도 하고 있습니다.

    마을도서관으로서의 기능도 충실해야겠지만 그러한 기능만을 위해 이러한 공간을 만든 것은 아닙니다. 단순히 책을 읽고 빌리는 공간이나 시설에 머물지 않고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공부방이고 어른들의 내적성장을 돕는 공간이 되며 생활 나눔 공간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목표와 방향성은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며 마을의 유용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도서관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만들었을까요?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필자소개
    '초록길 도서관' 관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