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순 ‘자유시장’이나
    ‘형식적 민주주의’ 넘어서려면
    [책소개] 『세계화 시대의 역행? 자유주의에서 사회협약의 정치로』(권형기/ 후마니타스)
        2014년 10월 11일 02:2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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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면서 동시에 심화된 민주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문제는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외환위기 등을 경험하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한국인들이 풀고 싶어 하는 중요한 화두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은 오래 전부터 서유럽 선진 국가들이 가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다양한 결합 방식들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고 그것으로부터 우리나라는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의 준거점과 전망을 찾고 싶어 했다.

    스웨덴 모델, 핀란드 모델, 네덜란드 모델 등을 비롯해, 소위 사민주의적 전통에 속한 국가들, 강소국 등의 사회 모델에 대한 다양한 관심이 등장했던 것도 바로 이런 관심과 전망 속에서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새로운 모델에 대한 검토 및 전망과 관련해, 수없이 부딪혔던 문제는 바로, 우리가 모방하고 싶어 같은 외국의 사례들과 한국의 경험, 제도적 배경과 역사 등이 다르다는 회의론이었다. 한편으로는 타당한 지적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친 회의론은 아닐까?

    물론 아무리 좋은 모델이라도 그대로 모방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유효한 여러 유형들을 참고하는 것은 우리에게 판단의 기준과 창조적 조합을 위한 레퍼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사실 이 책에서 검토하고 있는 아일랜드 발전 모델 역시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완벽한 모델이 결코 아니다.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모델이 우리에게 훌륭한 시사점을 주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회의론들 속에서 아일랜드 모델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아일랜드 모델을 통해 이끌어 낼 수 있는 시사점은 과연 무엇일까?

    아일랜드

    세계화 시대에는 자유시장 논리에 기초한 신자유주의만이 유효한가?

    아일랜드가 세계의 많은 정책 입안자들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소위 말하는 ‘켈틱 타이거’라는 별칭이 보여 주듯이 아일랜드가 1990년대에 세계화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최빈국에서 최부국으로 가장 성공적인 경제 도약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일랜드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더욱 중요한 이유는 아일랜드의 성공이 ‘코포라티즘적 사회협약’에 기초해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는 코포라티즘과 발전주의 국가 등 조정 자본주의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자본 일방적 혹은 노동 배제적 앵글로색슨 자유시장 모델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는 대별되는 코포라티즘적 사회협약을 통해 엄청난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아일랜드는 1987년에 처음으로 사회협약을 체결한 이래 20여 년간 정부, 자본, 그리고 노동을 비롯한 시민사회 내 여러 사회 세력들이 거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함께 협의하고 조정하는 ‘사회 파트너십’ 혹은 코포라티즘적 ‘사회 협치 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그뿐만 아니라 2008년 위기 이후에도 아일랜드는 기존의 정부·자본·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협약은 해체했지만 1987년 이전의 단순 ‘자유시장’ 모델로 복귀한 것이 아니었다. 2010년 아일랜드는 ‘크로크파크 합의’Croke Park Agreement와 같은 새로운 조정 메커니즘을 통해서 같은 시기, 국가 채무 위기에 직면했던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에 비해 빠르고 성공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같은 아일랜드 모델의 성공은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발전 전략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 통념을 깨트렸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제도적 배경이 코포라티즘적 사회 협약 모델과는 전혀 달랐던 국가에서 코포라티즘적 사회 협약 모델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사회적 협치 혹은 코포라티즘적 사회협약의 정치가 가능한 조건은?

    아일랜드 사회협약 모델이 주목을 끈 또 다른 이유는 아일랜드가 북유럽의 코포라티즘적 국가들과 달리 ‘자유시장 모델’인 영국과 유사하게 코포라티즘적 사회 조정을 위한 제도적 조건들이 거의 부재한 상태였으며, 그래서 사회협약이 “거의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곳”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의 지배적 담론인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유효한 대안 이론으로 제시된 신제도주의의 담론에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다. 신제도주의는, 세계화 시대에도 각국의 발전 방식은 신자유주의적으로 수렴하기보다는 각국의 제도적 조건으로 인해 상이한 발전 모델을 지속할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일랜드 사회협약은 코포라티즘적 제도가 미비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신제도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경험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는 전통적으로 영국과 미국 같이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분류되던 국가였다. 아일랜드는 노동과 자본의 포괄적·독점적 이익대표 체계, 강력한 사회민주당의 존재 등 코포라티즘 조정에 유리한 것으로 알려진 제도적 조건들을 전혀 갖추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도적 조건이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는 어떻게 코포라티즘적 사회 조정 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는가?

    아일랜드가 전통적인 코포라티즘을 위한 제도적 조건이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코포라티즘적 사회협약 모델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 이유는 무엇보다 주요 행위자들 간에 사회적 합의 혹은 문제 진단과 바람직한 해결책에 대한 ‘공유된 인식’을 가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상 조직의 위계적 권위를 대신할 수 있는 ‘민주적 권위’를 강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합의와 민주적 권위는 포괄적 위계적 이익대표 체계와 같은 공식적 제도들을 대신해 수직적·수평적 조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적 대체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적 조건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도들은 행위자들 간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치는 게임의 규칙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행위자들 자체의 형성과 조직적 능력에 영향을 미치고 전략적 행위자들에게 레퍼토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제도는, 신제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행위자들의 선택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삶 속에서 행위자들의 경험의 대상이자 지속적으로 재해석되고 이용되는 재료들이다. 아일랜드 사회협약은 제도적 조건에 의해 선험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주요 행위자들의 정치적 담론과 정치적 교환들에 의해 수립되고 지속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었다.

    제도의 성공적인 안정화 혹은 제도화 과정은 어떻게?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제도의 수립과 안정화에 기여하는 요소들은 동시에 해체의 측면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이 강조하는 제도의 ‘내생적 진화’를 분석하는 이론의 핵심이다.

    제도가 안정화된 시기는 결코 동일한 의미의 제도가 지속·반복되는 시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도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성공적인 경우라고 하더라도 실천적 과정에서 파생된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합리화와 정당화를 필요로 한다.

    아일랜드에서는 사회협약을 통한 위기 극복과 경제적 성공이 사회협약을 강화한 측면도 있었지만 긴장감을 낮추고 안이함을 유발함으로써 사회협약의 새로운 합리화와 존재 의미를 필요로 했다.

    1990년대에 아일랜드는 사회협약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해 시민단체들의 참여 확대와 부의 공정한 배분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비용의 증대를 가져와서 오히려 사회협약의 해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회협약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새로운 정당화와 제도 강화의 조치들이 요구되었는데 이 과정은 동시에 사회협약의 실질적인 의미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안정적인 제도화의 과정 혹은 ‘정상 시기’ 동안 사회협약의 의미가 거쳐 온 이러한 동태적인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심각한 실업과 국가 부도라는 유사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2000년대 후반 아일랜드는 왜 1980년대 후반과는 전혀 다른 정치적 선택 ─ 1987년 사회협약의 수립과 2009년 사회협약의 해체 ─ 을 하게 되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책이 기존 제도주의자들의 정태적 설명과 크게 구별되는 점은 바로 이처럼 제도의 내생적 진화 과정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전쟁·공황·세계화 같은 외생적 충격만으로는 제도 변화의 방향을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의 신제도주의나 합리적 선택 제도주의에서 설명하는 ‘단절적 균형이론’에서는 ‘중대 국면’에서 일단 발전 경로와 패턴이 정해지면 이후 정상 시기에는 그저 동일한 제도와 선호, 그리고 행위의 패턴이 반복되고 지속되는 것으로 가정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직 외적 충격 요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충격 요인만으로는 위기 시기에 제도가 변화하는 방향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은 아일랜드의 사회협약 체제가 수립되고 진화해 온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행위자들이 제도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제도의 의미와 자신들의 선호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는 이론적 관점을 통해 제도의 내생적·점진적 변화를 설명하고자 했다.

    아일랜드 사례가 던지는 실천적 함의

    아일랜드 사례가 한국을 비롯한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 던지는 실천적 함의는 무엇인가? 한국의 경우 합의제적 의회제, 사회민주당의 부재, 산별노조와 같은 포괄적 조직 구조와 조직적·위계적 권위를 가진 정상 조직의 결여라는 제도적 조건의 미비는 실제로 사회 협치 체제의 수립에 엄청난 실천적 어려움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제도주의와 제도의 중요성이 같은 것은 아니다. 제도주의의 주장과 달리 행위자들은 제도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실천적 과정에서 새로운 변화를 바라는 담론과 새로운 해석들이 제기된다면 그래서 구체적인 방법으로 과거와 다른 새로운 기능적 대체물들이 수립된다면 사회 통합적·협력적 사회 조정의 실현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는 문제다.

    다만 주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갈수록 갈등적이고 양극화하는 해석들이 축적되어 가면서 주요 행위자들 간 감정과 인식의 골이 더욱 깊어 가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는 사회 통합 혹은 사회 파트너십의 가능성이 크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가 사회 통합 혹은 사회 파트너십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무엇보다 상대를 먼저 협력의 상대로 인정한 다음 ‘공유된 이해와 가치’의 폭을 넓혀 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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