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할 다르지만 우리는 평등해야
    [그림책 이야기]『나비부인』(벤자민 라콩브 / 보림)
        2014년 10월 10일 09: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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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 『나비부인』이 그림책 『나비부인』으로 완성되다

    그림책 『나비부인』을 처음 보았을 때 제겐 ‘정말 제대로 만들었을까?’하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우선 대부분의 고전 작품이 어린이나 청소년이 보고 이해하기 어려운데다 더구나 고전의 감동을 그림책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 완성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비부인』을 천천히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열 때마다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우선 김영미 씨의 우리말 번역이 참 곱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벤자민 라콩브의 그림은 환상적입니다. 푸치니의 오페라만큼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다만 그림책 『나비부인』의 가치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는 독자는 어른들일 것입니다.

    더불어 그림책 『나비부인』은 아코디언 형식의 그림책입니다. 모든 페이지가 붙어 있어서 펼치면 병풍처럼 이어집니다. 책의 가격도 오만원입니다. 그림책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결코 살 수 없는 가격입니다. 하지만 출판업자인 제가 볼 때는 정말 헐값입니다. ‘보림’이라는 메이저 출판사가 아니면 결코 만들 수 없는 저렴한 가격입니다.

    『나비부인』의 원작은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의 『국화부인』입니다. 그런데 『국화부인』에 감명을 받은 미국 작가 존 루터 룽은 『국화부인』을 『나비부인』으로 번안합니다.

    이제 소설 『나비부인』을 감명 깊게 본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는 소설 『나비부인』을 희곡 『나비부인』으로 각색하여 연극으로 올립니다.

    이탈리아의 푸치니는 런던에서 연극 『나비부인』을 보고 흠뻑 빠집니다. 푸치니는 연극 『나비부인』을 오페라 『나비부인』으로 새롭게 완성하여 큰 성공을 이룹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세월이 지나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감동적으로 본 일러스트레이터 벤자민 라콩브에 의해 숨 막히게 아름다운 그림책 『나비부인』으로 완성됩니다.

    나비부인

    어쩌다 치졸하고 비정한 비극이 고전이 되었을까?

    사실 『나비부인』의 이야기를 제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치졸하고 비정한 비극입니다. 때는 일본의 메이지 시대, 미군 중위 핑커튼은 공무를 이유로 잠시 일본에 머무는 동안 아름다운 게이샤 나비를 부인으로 삼습니다. 나비부인은 핑커튼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공무를 마친 핑커튼은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미국에서 핑커튼은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던 여인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합니다. 그 사이 나비부인은 핑커튼의 아이를 낳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이가 없는 핑커톤 부부는 일본으로 찾아와 나비부인에게서 아이까지 뺐으려고 합니다. 결국 배신감과 상실감을 견디지 못한 나비부인은 자결합니다. 도대체 이토록 치졸하고도 비정한 비극의 어떤 점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을까요?

    그림책 『나비부인』을 보는 내내 제 마음 속엔 비열한 미군 중위 핑커튼에 대한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또한 핑커튼의 비열한 계획을 조금도 모른 채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그를 섬기고 기다리는 나비부인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더구나 나비부인을 죽음까지 몰고 가는 핑커튼 부부의 저열함과 욕심에는 저 역시 인간성에 대한 절망을 느꼈습니다.

    나비부인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순수함과 핑커튼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저열함은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극명한 대비는 선악의 대립구도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추악함의 대립구도입니다.

    나비부인과 핑커튼의 관계는 시작부터 약자와 강자의 관계이기 때문에 선과 악의 대립구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둘의 관계는 극도로 추악한 인간과 극도로 아름다운 인간의 대비입니다. 그리고 벼랑 끝에 내몰린 나비부인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죽음뿐입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하며 비인간적인 만행을 일삼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푸치니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나비부인의 순수함과 핑커튼의 저열함을 대비시킨 비극적인 예술 작품을 통해 이른바 제국주의 열강의 시민들에게 각성을 촉구한 것입니다.

    『나비부인』과 『사과나무』

    예술작품은 재미와 아름다움을 통해 독자 또는 관객과 소통합니다. 그림책 『나비부인』을 본 사람이면 누구나 그림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슬픈 이야기에 가슴앓이를 겪게 됩니다. 푸치니의 오페라가 준 감흥 이상을 벤자민 라콩브의 환상적인 그림이 전해 줍니다.

    저는 그림책 『나비부인』의 아름다움이 영원히 독자들의 가슴에 남아 비겁함과 저열함으로부터 독자들의 영혼을 지켜주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강자가 되면, 또는 아주 작은 권력이라도 쥐게 되면 욕망의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존 골즈워디의 단편 소설 『사과나무』 역시 비슷한 주제와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만 미군 장교와 일본인 나비부인 대신 도시 청년과 시골 처녀가 나옵니다.

    도시 청년은 자전거 여행 중 시골에 가서 시골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누지만 결국 시골 처녀를 배신하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사과나무 아래서 청년을 기다리던 시골 처녀는 결국 아이를 낳다가 죽습니다. 노년이 되어 부인과 함께 다시 시골을 찾은 ‘도시 청년’은 뒤늦게 자기 아들의 존재를 알고 경악합니다.

    이렇게 비겁한 남자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당대 작가들이 작품 속에 시대적 양심과 반성을 투영시켰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금까지도 그 작품들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욕망과 권력’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화두입니다.

     ‘욕망과 권력’의 반대편에 ‘평등’이 있다

    ‘욕망과 권력’의 반대편에 ‘평등’이 있습니다. ‘평등’은 이상이자 진리입니다. 그리고 ‘평등’의 이상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너무 쉽게 편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지위와 권력을 남용합니다. 또한 사회적 역할과 권력을 혼동합니다.

    예컨대 자식과 부모는 역할이 다를 뿐 평등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부모와 자식과 평등하다고 생각합니까? 교사와 학생이 평등하다고 생각합니까?

    장애인과 비장애인, 대통령과 청소부, 외국인과 내국인, 노동자와 자본가, 여성과 남성이 모두 평등합니다. 혹시 누군가 동의하지 않더라도 진리는 변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합니다. 더 이상 폭력적인 권력은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폭력은 범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 『나비부인』이 ‘평등’의 화두를 우리 가슴에 영원히 새겨주기를 바랍니다.

    필자소개
    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 동화작가. 도서출판 북극곰 편집장. 이루리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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