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은 변했고
    ‘자장면'은 ‘짜장면’이 됐다
    한글날에 한글 표기법을 생각하다
        2014년 10월 09일 12: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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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9일은 세종대왕이 백성을 위해 만든 ‘한글’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루에도 몇 만 자씩 타자를 속기 수준으로 써야 하는 기자 입장에서 한글은 정말 쉬운 문자임이 틀림없다.

    올해 2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가 방한했을 때, 한국 기자들이 노트북으로 손쉽게 타자를 칠 때, 일본인 기자들은 노트북 대신 수첩에 적고 있던 모습을 보고 한글이 편리한 문자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닫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한글 표기법이나 발음, 외래어 표기법은 너무 어렵다. 그런데 이제 우리말 ‘순화어’라는 것까지 등장해 어느 날부터 ‘네티즌’은 ‘누리꾼’으로 적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짜장면을 짜장면으로 부를 수 없었던 시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발음하고 표기해왔다. 그러나 TV 화면에 말끔한 정장을 입은 아나운서들은 언제나 ‘자장면’이 올바른 표기이자 발음이라며 왠지 짜장면스럽지 않은 발음을 하고는 했다.

    짜장면은 현대에 이르러 생긴 말이고, 다수의 사람들은 ‘짜장면’이라 불러왔지만 국립국어원은 ‘자장면’을 고집해왔다.

    이는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말과 어문정책상의 괴리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그래서 방송에서 ‘자장면’이 올바른 표기라고 할 때마다 ‘왜?’라는 의문이 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결국 국립국어원은 2011년 8월 31일, ‘짜장면’도 표준어로 ‘인정’했다. 더이상 ‘짜장면’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틀렸다’고 혼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함께 인정된 것은 ‘택견’과 ‘품새’도 있었는데, 국립국어원은 그동안 ‘태껸’과 ‘품세’만을 표준어로 인정해왔다.

    이외에도 ‘간지럽히다’, ‘복숭아뼈’와 같은 말도 복수 표준어로 인정됐다. 불과 3년 전에 말이다.

    한글날

    ‘네티즌’은 ‘누리꾼’, ‘텀블러’는 ‘통컵’, ‘팔로잉’은 ‘따름벗’?

    외래어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국립국어원은 ‘우리말 다듬기’를 통해 외래어를 ‘순화’해서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네티즌’은 ‘누리꾼’이라는 말로 대체해 사용하고 있다.

    국립국어원은 지금도 ‘누리꾼’들의 참여로 외래어를 한글로 순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원래 한국에는 없던 표현들이기 때문에 그대로 영어나 다른 외래어에서 따온 말을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선정된 순화어는 우리말과 외래어가 혼합된 형태의 말도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텀블러(tumbler)를 ‘통컵’으로 선정한 것이다. 순화어가 없는 컵(cup)을 우리말 ‘통’과 결합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초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대중적으로 사용하는 컵, 아파트, 헬리콥터, 에어컨과 같은 외래어는 그대로 두면서도, 최근에 널리 사용하고는 있는 외래어는 순화 대상인 것이다. ‘로드매니저’를 ‘수행매니저’로 선정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외에도 여러 뜻이 함께 있는 단어를 무리하게 하나의 뜻인 단어로 순화한 경우도 있다. ‘매니페스토(manifesto)’를 ‘참공약’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러나 매니페스토는 단순히 선거 공약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언’ 형태로 발표하는 연설이나 문서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외에도 ‘트위터’에서 사용하는 팔로잉(following)과 팔로워(follower)를 각각 ‘따름벗’과 ‘딸림벗’으로 선정했다. 관련 어휘로 ‘팔로잉하다’는 ‘따르다’로 확정했다. 그러니깐 앞으로 ‘박근혜 대통령 트위터를 따랐다’고 써야 옳고, ‘대통령님 저와 맞따름 좀 해주세요’라고 해야 정확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더 큰 문제는 사전적 해석의 이견이다. 지난 2012년 12월 국립국어원은 앰네스티 한국지부 대학생네트워크가 요구한 ‘사랑’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바꿨다.

    기존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애인’은 ‘이성 간의 사랑하는 사람’’, ‘연인’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남녀’, ‘연애’는 ‘남녀가 서로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이라고 정의해왔다.

    이는 이성 간의 사랑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은 ‘애인’은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 ‘연인’은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관계에 있는 두 사람’, ‘연애’는 ‘연인 관계인 두 사람이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2014년에 이르러 국립국어원은 문제 제기가 들어와 공식 심의절차를 거쳤다며 다시 위 단어들의 정의를 기존의 해석으로 바꾸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관련 기사 링크)

    이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4월 30일, 노동절을 하루 앞둔 날, 국립국어원은 공식 트위터를 통해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라고 표현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한 트위터 사용자는 ‘노동자의 날’이라고 바꿔달라고 요구하자, 국립국어원 측은 “노동절은 1963년에 ‘근로자의 날’로 이름이 바뀌었다”며 특히 “노동자는 근로자로 다듬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답변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링크)

    그러나 이는 ‘짜장면’ 사건과 ‘사랑이 변한 사건’이 혼재되어 있는 국립국어원 측 일방의 ‘계몽’ 운동일 뿐이었다.

    ‘근로자’라는 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독재 시절 노동자들의 권리를 억압하고 순치시키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노동’보다 ‘근로’라는 말을 쓰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에서조차 ‘노동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행정기관인 관련부처도 고용’노동’부라고 사용하며, 노동계 스스로 역시 ‘노동자’라는 말을 선호하고 있다. 논란 당시에도 이미 ‘근로자의 날’을 ‘노동절’로 바꾸는 내용의 관련 법안이 발의된 상태였다.

    세종대왕은 백성 곁에 있었는데, 국립국어원은 저 위에 있다

    국립국어원의 뒤늦은 복수 표준어 지정, 혼란스러운 우리말 순화어, 톨스토이라고 쓰고 똘스또이라고 읽어야 원음에 가까운 외래어 표기법, 사전적 정의의 자의적 해석까지, 국립국어원은 우리에게 더 많은 걸 공부하게 만들었다.

    처음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는 백성들도 쉽게 읽고 쓸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지금은 빈번하게 바뀌는 표기법을 외우는 데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판이다.

    이는 국립국어원의 “어문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한 번 정해진 원칙을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입장 때문이었다. (관련 기사 링크)

    물론 전통과 원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널리 쓰는 ‘말’을 구태여 어문정책의 원칙을 근거로 실제 사용하는 말과 다르게 표기하거나 어떤 단어의 사용을 ‘순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과 ‘인식’을 억지로 계몽하려는 태도일 뿐이다.

    말은 사람과 사람 간의 소통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져왔고, 지방마다 각기 특유의 아름다운 사투리가 있다. 외국어가 익숙지 않았던 시대에는 들리는 대로 발음하고 표기해왔고, 외국어가 익숙한 현대에 이르러서도 대체 단어가 없는 표현은 그대로 사용하면서 외래어로 굳어졌다.

    옛날에는 ‘사랑’은 남녀 간만이 하는 것으로 알았지만 실제로 동성 간의 사랑이 있음이 대중적으로 알려졌고, 동성애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떠나 ‘존재’하는 것을 사전에서 지울 수는 없다.

    한글날을 맞이해 단순히 ‘한글을 사랑하자’는 밑도 끝도 없는 애국심 말고, 산적한 한글 표기법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허심탄회한 토론의 장이 열리길 기대한다.

    덧. 이 기사의 오타와 틀린 맞춤법 지적은 환영한다. 그러나 띄어쓰기는 한계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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