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대 폭력 : 괴물의 이해③
        2014년 09월 17일 03: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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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 회 ‘군대의 폭력: 괴물의 이해-2’ 링크

    제가 선배, 친척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대체로 알고 있는 1991년 망국 이전 쏘련 군대의 가혹행위의 상당 부분은 기수 사이의 의례화돼 있는 폭력에 해당됐습니다.

    폭력이라는 행위로 주로 소도시/농촌의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이 그들의 심화되는 좌절감 등을 표시했지만, 그 폭력은 어디까지나 유사 전통사회인 쏘련 사회답게 “의례”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컨대 1년을 이미 복무하여 1년의 복무기간만 남은 후임병에게 선임병들이 흔히 쇠덩어리가 달린 군복 혁대로 12대를 때리곤 했습니다. 복무기간 1개월에 한 대씩 때린다는 이야기인데, 일종의 폭력적 통과의례/”신고식”이었습니다.

    쏘련 사회의 공식적인 사회주의적 이상들과 아주 무관한, 원시적이라 할 수 있는 의례지만, 꼭 뿌리 없는 행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 시골이나 소도시의 기층 민중 생활 속에서는 이런 류의 세대간 폭력이 흔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이 이런 폐습을 근절시키고 “사회주의적 문명”을 정착시키는 데 실패한 것은 별도의 문제인데, 좌우간 나름의 “문화적 뿌리”가 있는 폭력인 만큼 상당수가 거기에 대한 소극적 동의를 보인 듯하기도 했습니다.

    해군 같으면 1년 복무 이후에는 후임병은 대개 선임병들로부터 “기습 물 세례”를 받곤 했습니다. 가끔 가다가 돌연히 배 밖으로 던져져 아닌 밤 홍두깨 맞은 듯 살아남으려고 물 속에서 헤엄쳐야 하기도 했습니다. 불법 가혹 행위에 틀림없지만 역시 시골에서는 그런 류의 “유사 세례”들이 흔하고, 또 러시아 종래의 남성 문화와 유관합니다. 강변에서 술 먹은 뒤에 장난으로 서로를 물 속으로 밀어버리는 것은 기층사회 “주도”의 한 지류이기도 하니까요.

    쏘련 군의 폭력은 의례화돼 있기도 했지만, 주로 “노동 분담”과 관련이 강했습니다. 후임병들은 예컨대 내무반 청소 부담은 훨씬 더 컸습니다. 역시 사회주의의 평등주의적 이상과 정반대지만 … 웬만한 집단농장에서도 대체로 젊은이들이 어려운 일 도맡고 나이 든 행님들을 배려(?)하는 것은 보통이기도 했습니다. 군대는, 공산당이 전통성을 다 이기지 못한 한 사회의 거울이었죠.

    러시아군

    쏘련이 망하고 사회가 일변되자마자 군대도 똑같이 바뀌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 군대의 폭력에는 시골생활의 통과의례 등과의 유관성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대개는 폭력의 중심에는 “돈”이 있어, 선임병이라는 특권적 입장은 후임병으로부터의 돈갈취에 이용될 뿐입니다. 자본화를 압축적으로 당한 나라다운(?) 꼴이죠? 일단 군에 끌려온 사람이라면 자본화의 패배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졸부는 물론 대졸로서 신흥 민영기업체에서 괜찮은 관리, 간부직에 오른 사람이라 해도 보통 병무청과 “인간적인 합의”(?)를 이루어 군에 현역으로 가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대학에서 군사교육 받아 졸업과 동시에 임관해 단기간 장교복무만 한다든가 아니면 없는 “병”을 만들어 상납 등으로 병무청에서 “신검에서 떨어지는” 방식으로 처리합니다.

    군에 끌려온 사람이라면 약 25~30%에 이르는 “신흥 중산층”과 무관한 광의의 빈민층 성원이란 뜻입니다. 이런 사회의 잔혹성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병사들은, 선임병 입장이 되기만 하면 바로 후임병들을 상대로 “원풀이”를 합니다.

    이 “원풀이”의 방식은, 러시아 전통적인 남성문화나 농촌문화와도 무관해 차라리 데사드 후작의 “고문을 통한 향락”, 즉 성도착증에 가까운 “잔혹성 즐기기”를 방불케 합니다.

    2006년에 러시아의 첼랴빈스크시에서 안드레이 스쵸브 일병이 그 부대 병장으로부터 극도로 잔혹한 고문을 당해 결국 성기 염증으로 성기 제거 수술을 받아야 했다는 뉴스가 세계를 경악케 하지 않았습니까?

    같은 “잔혹행위”라 해도 이런 도착증적 이라 할 수 있는 행위는 구쏘련 시절에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원자화되고, 증오와 불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러시아”는 완전히 다른, 훨씬 더 개인 병리적이라 할 수 있는 잔혹성의 풍경을 만든 것입니다.

    러시아 같으면 1991년의 망국은 확실한 “경계선”이 되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군 잔혹 문화는 1997~8년 외환위기 이후로는 점차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사회화‧내면화에 따라 바뀌어갔습니다.

    본래 한국 군대의 폭력이란 일본 “황군”이라는 극단적으로 집합주의적 사회의 유습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발국가 시절의 집합주의의 반영이기도 했습니다. 폭력의 기저에는 “연대책임”의 개념이 깔려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관심 병사”/”고문관”으로 분대 전체가 원산폭격 당하고 얼차려 당하고 기합 당하는 식이었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그런 집단 위주의 폭력은 “전통”보다는 차라리 (“전통”을 잔유하고 가장하기도 한) 개발국가의 통치방식과 더 연관이 강했습니다.

    노동집약적 경‧중공업이 산업화의 견인차이다 보니, 자본이나 그 관리자가 다수의 노동자들을 한 집단으로서 거느리고, 그 집단 전체에 연대책임을 덮어씌우는 대가로, 또 그 집단에 대해 묵시적으로나마 일종의 “고용보장”을 해주는 것은 개발주의 시절의 일반 직장의 분위기이기도 했습니다.

    십장, 관리자, 과장, 부장, 사장 등등은 다 부하직원들에게 집단적 책임을 요구하고 “기합”을 주는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그 묵시적 반대급부 역시 “회사 가족”의 지위 부여이었습니다.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건 “표준”으로 통했습니다.

    군대는 일반 직장보다 속된 말로 “쎘지만”, 원칙은 다 비슷비슷했습니다. 대학 체대나 성악과 등 일부 연예계는 어쩌면 군대 이상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집합주의 개발 사회는 이제 호랑이 담배를 물던 시절입니다.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노동불안화가 심한 사회가 됐습니다. 집단은 깨지고, 개인은 생존과 성공의 유일무이한 핵심적 단위가 됐습니다. 그 만큼 군 잔혹성의 풍경도 바뀐 것입니다 (다음 주는 계속).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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