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우선'이 아니다 ②
전두환 김대중 노무현으로 이어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2012년 07월 03일 05: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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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가 우선’이 아니다 1부 글을 보시려면

김대중·노무현은 전두환의 계승자일 뿐이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은 대부분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등장을 한국 정치사의 진정한 이정표라고 생각한다. 최장집 선생의 말대로 권력이 투표를 통해 교체됨으로써 정치와 시민사회가 실질적인 상호작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새누리당이 복지를 내걸고, 남경필/정두언 국회의원이 쌍용차문제 해결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 정권의 교체 가능성이 낳은 커다란 성과임에는 두말할 것 없다. 복지가 여론의 중심 의제가 되면 새누리당이라고 해서 여론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경제 정책 차원에서 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정책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한국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이미 전두환 정권 때 기획되었고, 이를 완성한 정권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노무현은 전두환 정권의 충실한 계승자라고 해야 마땅하다. 클린턴 행정부가 아빠 부시 행정부의 충실한 계승자이고, 오바마가 아들 부시의 계승자이며, 카메론이 블레어/브라운의 계승자인 것처럼 말이다.

아시다시피 1979년 부마항쟁과 이어진 광주민중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 공업 중심의 급속한 산업화의 모순이 폭발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재벌경제의 한계가 표면화된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사공일 내각은 중화학 공업 구조조정, 은행과 공기업 민영화, 보호주의 철폐(시장 개방) 등 일련의 경제 자유화 조치를 취한다. 당시 강경식 재무 장관 김재익 경제 수석 등은 모두 한국 신자유주의의 전도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1985년 미/일/독의 플라자협정 이후 펼쳐진 3저 호황으로 인해 기업 구조조정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미 1980년대 30대 재벌 상당수가 한계이윤 상태에 도달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3저 호황이 낳은 착시효과로 인해 재벌기업들은 대마불사-문어발 확장을 지속한 것이다.

이것이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와 맞물려 97년 IMF사태로 폭발한다. 과잉 중복 투자의 결과가 이때까지 지속된 것이다.

골드만 삭스 출신의 미 재무장관 루빈과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지체되고 있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IMF를 계기로 급진시킨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경제의 금융화와 노동의 신축화를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 기업들은 실물투자보다 이윤 배당으로 소유주의 권익을 보호하고 있으며, 외국계 사모펀드는 한국 주식시장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소수의 안정된 정규직을 제외하면 대부분 저임금, 장시간, 불안정 고용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정우나 최장집 같은 ‘대단한 지식인들’은 진보진영이 무능하고 관료들을 통제하지 못함으로써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떠들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신념을 갖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완성했을 뿐이다.

전두환 정권의 기획이 김대중·노무현에 이르러 완성된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핵심 경제관료들(이성규, 이헌재, 이기호 등)은 대부분 그 이전 정권의 경제 관료들이었고, 노무현 정부 역시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경제관료들이 득세하는 정부였다. 그들에게 ‘신자유주의 질서’는 일종의 경제적 규범이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서유럽 사민당과 보수당의 차이가 근본적이지 않았듯이 한국의 전두환정권과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지향점 역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없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이후 서구 사민당이 보수당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주체가 되었듯이 한국의 신군부나 김대중·노무현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주체가 된 것이다. 그들은 경제체제가 강제하는 정책전환의 실행자가 된 점에서 동일한 정체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87년 민주항쟁을 위해 싸운 선배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한국의 경험도 역시 ‘정치의 역능’이 아니라 ‘경제의 우선성’을 예증하는 것일 뿐이다. 한국은 1980년을 기점으로 발전주의 국가에서 신자유주의 국가로 전환했고, 전두환 정권과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차이는 전혀 근본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레짐의 차이라는 점에서는 박정희의 노동 배제적 발전주의 국가와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국가로 구별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 한국의 주류 진보주의 지식인들처럼 ‘같은 신자유주의 정권’을 두고 87년 체제, 97년 체제로 구별하는 것은 지적 기만일 뿐이다.

2013년 체제 담론의 의미는?

2013년 체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민주당이 집권한다 해도(사실 요즘 분위기로는 이것도 물 건너갔는가 싶다), 그것이 무슨 대단한 체제 전환이라고 떠들고 있는 ‘2013년 체제’론자들의 선동과는 반대로, 현재의 축적국면을 그대로 이어갈 것을 나는 확신한다.

왜냐하면 2013년 체제에 대한 논의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생산하는 담론구조 내에서 복지에 대한 장황한 선전 말고 경제체제를 전환시키겠다는 어떤 급진적인 문제제기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자유주의 정권을 두고 2013년 체제 운운하는 것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촌극인 것이다.

정치의 타율성!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치의 본질은 정치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외부의 사회적 관계에서 찾는다. 이런 사회적 관계는 계급관계, 인종적 관계, 민족적 모순, 성적 갈등 어느 것도 가능하다. 이들 모순들은 상호 연관되어 있어서 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잉결정’되어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정치를 최종심에서 결정하는 것은 경제라는 점을 강조했다. 경제체제의 조건이 정당들의 정책의 기본적 토대가 된다고 본 것이다.

정당간의 이념적· 정책적 차이보다 축적체제의 객관적 조건과 이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계급의 힘 관계가 정치를 결정하는 근본 요소임을 보이고자 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경제 결정론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경제가 정치 행위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을 경제결정론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경제결정론자가 되겠다.

물론 나는 경제결정론자로서의 나의 예측이 틀리고 내가 비판하는 ‘주류 지식인들’이 진리이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민주당이 권력을 잡고 보란 듯이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복지체제’를 성립시켜 주길 바란다는 말이다. 나의 주장이 올바른 것보다 신자유주의로 인해 고통 받는 인민들의 삶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그렇고 유럽의 역사적 경험도 그렇고 이런 기대감은 그저 환상일 뿐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민주당의 정권 획득을 두고 레짐의 교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소도 웃을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소위 한국의 진보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바로 그 소도 웃을 이야기를 너무나 공들여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겠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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