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슈바이처와 헬레네
    [산하의 가전사] 말이 아닌 삶과 행동으로 산 사람들
        2014년 09월 15일 05: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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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삶을 던져 불우한 이들을 돕는 의사는 참 많다. 돈에 눈이 벌건 의사도 많은 게 사실이고 정치적으로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꼴통인 의사도 허다한 건 맞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직업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선한 본성을 기꺼이 발현시키는 이들도 적지 않아. 그 헌신의 도가 넘어서면 어김없이 붙는 칭호가 ‘슈바이처’다.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호칭은 고 장기려 박사에게 헌정돼 있고 얼마 전 돌아간 이태석 신부는 ‘수단의 슈바이처’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소록도에 오래 근무하신 오동찬 의료부장님은 ‘소록도의 슈바이처’로 불리고 전진상 의원을 세운 벨기에 여의사 배현정 원장님은 ‘시흥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지.

    이 슈바이처의 원조(?)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분쟁의 땅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이야.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힘의 논리에 따라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기도 했던.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려는 유럽 열강에 맞서서 프랑스인들이 소리 높여 불렀고 오늘날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가 탄생한 건 바로 알사스 로렌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였어. 슈바이처가 태어난 도시지.

    하지만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기세 앞에 프랑스가 만판 깨진 뒤 이 지역을 독일의 차지가 된다.(1871)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그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지.

    슈바이처는 1875년 생이야. 4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프랑스인이었겠지만 그는 독일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런 접경 지역 사람들의 특징은 대개 극단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아. 일종의 변경 의식으로 어느 한쪽에 편입되려는 완강한 집착을 보이거나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하거나.

    슈바이처도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별 관심이 없었던 듯 해. 그의 성 자체가 독일어로 ‘스위스인’이라는 뜻이고 스위스 출신 이민의 후예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꽤 저명한 신학자이자 음악가 바흐의 권위자인 음악가이자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기도 했어. 그의 글을 아마 요즘 한국 기독교 목사들이 접한다면 아마 거품을 물고 이단 취급할지도 몰라. 그는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에 접근했고 처녀수태니 하는 건 취급하지 않고 세례 요한을 만난 예수에서부터 출발하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 대한 견해만 해도 “묵시적 유대 선지자로, 그리고 세상 종말이 그의 사역 가운데 올 것(마 10:23)이라고 희망하였던 선지자”로 봤고 세상 종말이 오지 않자 죽음을 택했다는 식의 해석을 했으니 기독교 탈레반이라 할 한국 기독교 목사들로서는 눈이 튀어나올 일이지. 그래서 종종 슈바이처를 이단이라고 비난하기도 해. 하지만 하느님이 누구를 천국에 부르실지는 난 확실히 안다.

    각설하고, 그 학자로서, 음악가로서, 연주자로서 안온한 삶을 누리던 그가 아프리카 정글 속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간단해.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를 나만 누려도 되는가.” 하는 아주 간단하지만 무척 복잡한 질문이었어.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답을 찾으려면 인생이 무척 꼬일 수도 있는 질문.

    일찍이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을 자주 설교에 인용했던 아버지의 기억과 독일계와 프랑스계 모두에게서 “돼지”라고 불리우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감내해야 했던 동네 유태인의 처지에서 받은 느낌도 그렇겠지만 그는 애초부터 떡잎이 좀 특이한 사람이었어. 좋은 옷을 입히려는 부모에게 “남들은 이렇게 입지 못하는데 왜 나만!”을 외치는 아이였고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려고.

    그런 그에게 나병에 걸려 부락으로 쫓겨난 채 죽어간다는 콩고의 흑인들의 이야기는 큰 감응을 줬고 “그들을 어떻게 도울까?”의 고민은 금새 ‘의사’라는 답을 내 왔던 거지.

    그는 나이 서른부터는 전혀 새로운 봉사자로서의 삶을 살 생각을 하고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우리 나라로 치면 중견 신학자에 음대 교수님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될 바로 그 순간에 인생 경로를 틀어 버린 거지. 그가 해부학 강의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이는 서른살이었다. 내 친구가 그랬어도 미쳤다고, 다시 생각하라고 하겠다. 슈바이처 주변 사람들도 그랬어.

    의대 공부하던 중 그는 헬레네 브레슬라우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돼. 나이 차이는 많았지. 동료 교수의 딸이었으니. 주위 사람들은 좋아했다. 네가 가려는 곳이 도대체 어디인줄 아느냐며 통탄하던 슈바이처의 아버지나 파이프 오르간의 대가였던 비도르 교슈는 슈바이처가 사랑에 빠져 유럽에 눌러앉을 수 있다고 봤을 거야.

    슈바이처도 고민이 됐다고 해. 헬레네를 분명히 사랑하는 건 스스로 알지만 자신의 뜻을 따라 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고. 사랑을 따르자니 자신의 뜻이 울고. 뜻을 견지하자니 사랑이 아쉽고.

    천하의 슈바이처도 몇 날 몇 일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결연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어. “나는 아프리카로 갈 사람이오.” 그때 헬레네의 답은 이것이었다는군, “제가 간호사가 된다면 당신을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군요.” 슈바이처는 그렇게 자신 플러스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꾸게 된다.

    이 의사와 간호사 커플은 그 후로부터 수십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부었고 ‘오강가’ (마술사)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포로 생활을 하게 되기도 하고 (세계대전 당시 슈바이처는 독일인으로 치부돼 프랑스 군에게 구금된다) 치명적인 병을 얻으면서도 무슨 꿀단지라도 감춰 놓은 양 아프리카에 돌아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

    이른바 쿵짝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아마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일지도 몰라. 물론 낭비벽 심한 남편과 경제 개념 없는 아내처럼 쿵짝 맞는 건 말고. “나는 의사로 아프리카에 갈 거요.”라는 남자가 “어머 그럼 저같은 간호사가 필요하시겠네요.”라고 답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의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니.

    노년의 슈바이처 부부

    노년의 슈바이처 부부

    슈바이처 부부는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면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다. 수많은 흑인들의 목숨을 구했고 많은 이들의 양심을 건드렸지.

    한 이탈리아 소년의 아스피린 얘기는 유명하다. 슈바이처의 얘기를 들은 한 소년이 있었어. 이탈리아 주둔 미군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탈리아 주둔 공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썼지. “제가 아스피린 한 병을 샀습니다. 공군기를 시켜서 슈바이처 박사님의 병원에 떨어뜨려 주세요.” 흐뭇하게 편지를 읽은 사령관은 방송국에 이 편지를 보냈고 청취자들은 무려 40만 달러를 모아 슈바이처에게 기금 폭탄을 안긴 거지.

    슈바이처가 바꾼 인생 중에 가장 인상 깊은 한 쌍이 있어. 래리머 멜런과 그 부인 그웬 멜런 커플. 1947년 가을 미국 갑부 집안의 막내 아들 래리머 멜런(1910~89)은 잡지 ”라이프”에 실린 슈바이처의 기사를 읽고 머리에 뭘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아.

    그 역시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하는 마음으로 슈바이처보다 더 늦은 서른일곱의 나이에 의사가 될 것을 결심심해. 그 부인 그웬에게 결심을 얘기했을 때 그웬의 답은 이랬다고 해. “뭐 나도 목장에서 소들 보면서 앉아 있는 거 싫어요.” 그리고 남편이 의학 공부를 하는 동안 부인은 아이티로 가서 병원을 세운다. 대륙과 세월을 초월한 이 쿵짝 부부들의 평행 이론.

    그로부터 18년 동안 슈바이처와 멜런은 여러 통의 편지를 나누면서 우정을 쌓게 돼. 슈바이처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빠짐없이 전했고 “당신은 용감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고백해. 멜런은 1989년 세상을 떠났지만 부인 그웬은 2000년까지 병원을 지키다가 죽었고 지금은 그 자식과 손자들이 여전히 봉사하며 살고 있다고 하네.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 여기서 사람이란 한 개인의 특성과 성격을 말하는 것이겠지. 동시에 그 사람이 쌓아온 개인사와 주변 환경을 가리키기도 해. 그러니 한 사람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니.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존경하는 ‘위인’일 거고.

    하지만 사람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변화의 단초를 제공하거나 변화의 조짐을 일깨우거나 변화의 가능성을 던지는 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몰라. 당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말이지. 거창한 사회 개조니 뭐니 할 것 없이 저 아들 녀석부터라도.

    나이 많은 슈바이처가 젊은 아내를 반하게 만들고 또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비결(?)을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일화에서 그 답의 조각을 찾아 본다.

    어느 기자가 물었대. “갑자기 왜 의사가 된 겁니까?” 그러자 슈바이처는 이렇게 얘기했다는군. “나는 도저히 말로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가 없더군요.” 아마 모든 매력적인 남자들이란 아내로부터 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일 수도. “허구헌날 말만!” 또는 “말로는 뭘 못해!”

    1965년 9월 4일이 그의 기일이었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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