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주의인가?
    [독서노트③ ]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테리 이글턴/ 길)
        2014년 09월 15일 10:1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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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② 링크

    6.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의자인가?

    사실 어떤 의미로도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주의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그가 추구했던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관련된 악명 높은 사실이다.(『마르크스』, 60쪽)

    그가 공산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라고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는 공산주의 사회에 대해 거의 논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그의 동료 엥겔스는 그가 유토피아 사회주의라고 이름 붙인 일련의 당대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사회주의의 특징을 묘사하는 다양한 미사여구를 빌어 오기도 했다.

    이런 미사여구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각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사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체제’,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 등. 그의 주요 저작 『자본』에서는 연합적 생산양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구체적이지 못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르크스는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예측하는 점쟁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역사의 예언자였다면,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예측한 점이 아니라 현존하는 사회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부조리와 악덕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분석했다는 점에서이다.

    마르크스는 이 체제가 지속된다면 더 큰 불행이 올 것이라고 말한 점에서 예언자였지,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다고 말한 예언자는 아니었다.(『마르크스』, 71쪽) 그러므로 ‘공산주의 필연적 도래’라는 환상은, 적어도 후기 마르크스의 글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역사의 비극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함으로써 비극 그 자체를 초월하려 했던 예언자이다.(『마르크스』, 80쪽)

    마르크스의 비판은 아직도 유효한가? 그가 직시하고자 했던 비극은 아직도 진행 중인가? 한 쪽에서는 캐비아를 먹으며 우주여행에 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부르주아가 있고, 그 반대편에서는 1억 명의 인구가 빈곤선 이하에 살고 있으며 6000만 명 이상의 아이들이 기아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다면 이 세계는 살만한 곳인가? 지구가 생태적 재앙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축적과 과잉소비주의가 체제의 작동원리라면? 노동자들 대다수는 불안정고용과 실업의 위기에 직면해야만 하고, 다수의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현실은 어떤가?

    우리 사회는 여전히 장시간 노동, 노동과정에서의 예속,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고통 받고 있다. 그나마 우리가 선진국이라는 사회는 살 만하지만 대다수의 국가들은 이런 풍요로부터 배제되고 있다. 가장 풍요로운 사회인 미국은 극단적인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맑스 포이에르바흐

    훔볼트 대학교 본관에 전시된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사진=한상원)

    마르크스는 이 체제의 작동원리 실패에서 이런 위기가 온다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체제의 본질이 이와 같은 삶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지만 마르크스의 예측은 틀린 것이 없다. 더불어 체제가 유지되는 한 크게 개선될 여지도 없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과학자이자 예언자이기도 하다.

    사민주의자들도 비현실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유주의자들이나 사민주의자들 역시 비현실주의자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주의자들과 닮았다. 그들은 현재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점들이 자본주의 그자체에서 필연적으로 비롯된다는 점을 반박한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조정하면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굴러가는’ 혹은 ‘잘 관리되는 자본주의라’는 관념 자체가 환상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잠정적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그들 또한 단 한 번도 위에서 제기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들은 구조적 위기를 부정하고 현재 직면한 위기들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다만 자유주의자들이나 사민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들, 즉 자본주의 체제 내의 고유한 문제들에 대해 짐짓 그런 문제는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행세한다고 말하는 게 더 현실에 가깝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유토피아주의자라고 비난할 처지는 못 된다. 마르크스에게만 유독 자신이 꿈꾸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이라고 비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들이 꿈꾸는 세계에 대한 잠정적인 상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 인민들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생산수단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에 토대를 둔 공동체가 구성되어야만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자기 소유는 개인 소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는 대규모의 생산수단이 존재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연합에 의한 소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연합에 의한 자주관리야 말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삶에 결정적인 요소라고 본 것이다.

    미국의 위대한 자유주의자 제퍼슨은 미국 인민들이 진정으로 존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생산수단(토지)을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동료들은 인민들이 자유로운 시민 주체로 공화정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장의 피고용자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마이클 샌델 『민주주의의 불만』, 2012, 동녘을 보라)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사라지고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 인민들이 종속된다면, 그들의 정신은 타락하고, 삶의 자율성은 상실된다고 본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경제체제를 비판한 것은 비단 사회주의자들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제퍼슨과 동료들은, 미국 자본주의가 성장하면 필연적으로 대규모 자본이 출현할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인민주의는 역사의 길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달랐다. 마르크스 역시 제퍼슨이 비판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인민들의 삶의 문제를 고찰했다. 그러나 그는 퇴행적인 인민주의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연합에 의한 생산수단의 자주관리와 공동체주의를 통해 모든 인민들이 자율적인 삶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현실 속에서 대안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인가?

    연합적 생산양식 하에서의 자율적인 공동체가 과연 인간들의 본성에 맞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아담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썼듯이, 시장에서의 교환이 인간본성에 맞기 때문에 시장의 자유로운 발전을 억압하는 것, 이기성을 추구하는 것을 제약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억압적 질서가 될 수 있다는 비판 말이다. 공동체적 소유가 인간의 이기적 본성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논리 자체가 사회에서 만들어진 관념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진화생물학자들은 동물들 일반이 이타적으로 진화해 왔다는 많은 증거를 제시해 왔다.(매트 리들리 『이타적 유전자』, 사이언스 북스, 2001)

    리차드 도킨스는 유전자의 이기성을 논하지만 이것은 유전자 수준에서 그런 것이지 그 결합물인 인간은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도킨스『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 그러니 도킨스의 책 제목에 현혹되지 말고 텍스트를 직접 읽어보시라. 인간이 ‘조상들’(동물이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들은, 종의 번식을 위해 기꺼이 연합할 수 있도록 조각되어 왔다.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것은 과학적 사실과도 맞지 않다.

    인간 사회가 이기적으로 변한 것은 계급의 분화와 사회적 자원(권력과 부)을 독점하는 집단이 나타나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계급이 분화되지 않은 사회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들에서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강한 지향성이 남아있었다. 우리가 익숙해진 자본주의 체제는 경쟁과 배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더 극단적인 형태의 이기성이 나타난다.

    이 점에서 인간의 이기성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학습되고 더 강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환경에 유전자를 조각하는 능력이 존재하지만 제도와 환경 변화는 이기적으로 조각돼 문화적 유전자를 반대의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제도와 사회체제의 작동 방식이 형재애를 강화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이기적인 이유로 붕괴하기 보다 더 많은 자유로운 삶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합리적으로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사회라고 해서 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예컨대 자급자족 공동체라거나) 다른 국가, 집단으로부터 고립된 삶이 되는 건 아니다. 형재애를 뭉친 공동체 사회일수록 더 개방적이고 확장된 연대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들은 공동체에 대한 더 많은 책임감을 갖고, 타자들과 공존하며, 생태적으로 친화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호혜에 바탕을 둔 세계를 만든다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7. 사회주의는 가능한가?

    마르크스 자신도 그렇고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 어느 누구도 세계로부터 고립된 국가에서 사회주의 체제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레닌,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유럽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었다. 유럽혁명의 실패 속에서 독자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당황했는가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주의체제가 고립된 상태에서 건설될 수 없다면, 국제적인 협력 하에서만 이 체제가 건설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사회주의 실현 가능성은 세계 시장에서 더 큰 힘을 행사할 수 있고 더 많은 자원과 시장을 관리할 수 있는 중심부 국가들의 변동에 크게 의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점도 제기된다. 한국과 같은 개방경제에서 자율적인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한다는 것은 한 낮의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다. 베네주엘라와 같이 핵심적인 자원을 국가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국가들은 제국들의 사보타지를 견뎌 낼 수 있겠지만 한국과 같은 반주변의 국가는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이 문제제기는 국제주의의 문제점을 즉각 제기한다. 오늘날 어떤 국가도 국제적인 연대 없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 주변부 자본주의체제는 이런 제약이 훨씬 더 크게 작용한다. 중심부 국가들 내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자운동의 성장,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에 의해 뒷받침 되는 사회운동의 성장만이 사회주의 실현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별 국가에서의 사회주의의 실현은 매우 난망하거니와 반주변, 주변부의 국가들에서 이의 실현은 더더욱 어렵다. 이런 어려움은 사회주의 실현을 유토피아적 비전으로 만드는 또 다른 요소이기도 하다. 왜냐면 국내에서조차 노동자들 간의 연대도 잘 안 되는데, 어떻게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 하는 쟁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분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은 ‘체제’로서가 아니라 ‘운동’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체제 너머를 생각하며 체제 내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노동자운동의 조건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통해 정세에 개입해야 한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이란 노동자운동 내부의 가장 단호한 분파로서 분석하고 발언해야 한다. 이 점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란 도달해야할 어떤 상태가 아니라 현실의 운동”이라고 했던 이유이기도 한다.

    우리는 앞에서 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이란 어떤 보증도 없는 ‘역사의 내기’라고 했다. 그것은 개인들의 선택과 노동자계급의 집합적 행동을 통해 건설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열려진 세계이다. 오늘날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가련한’ 존재들은 이렇듯 역사를 하나의 내기로서, 그것 말고는 어쩌면 파국과 야만이 있을 뿐이라는 매우 현실적인 근거 하에서 기꺼이 ‘유토피아주의’를 선택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끝>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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