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라뜨 무슬림 학살은
인도판 나치 홀로코스트
[인도 수구보수세력의 생얼-13] 항상 새로운 '적대자' 만들어
    2014년 09월 15일 09:3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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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수구보수세력의 생얼-12

1992년 아요디야 비극 이후 인도국민당의 권력은 우후죽순처럼 커져 갔다. 그런데 그것은 힌두 수구세력의 난동이 격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소수인 무슬림의 저항이 격화될 수 있음도 의미한다.

무슬림의 저항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테러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테러는 아요디야 사태가 일어난 직후인 1993년 3월 12일, 인도 최대의 경제 중심지인 뭄바이에서 터진 폭탄 테러다.

이날 뭄바이에서는 증권거래소, 쇼핑센터, 공항, 시장, 호텔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만 집중적으로 열세 군데에서 동시에 폭탄이 터졌는데 한번에 257명이 목숨을 잃고, 1,400 여명이 부상당했다. 그렇지만 무슬림의 테러는 힌두의 더 잔인한 학살을 낳았다.

그 가운데 가장 무서운 광란의 학살이 2002년 2월 27일, 인도 서부 구자라뜨 주의 작은 도시 고드라Godhra 역에서 발생한 화재 사건 직후부터 짧게는 삼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일어난 사태다.

구자라뜨 학살은 느닷없이 발생한 어느 기차 화재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월 27일 역을 막 떠난 기차 안에서 난데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5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불타 죽는 참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희생자는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 아이들인데, 수구 난동 세력인 세계힌두회의 대원들이 아요디야를 다녀온 길이었다.

기차가 고드라 역을 떠난 지 몇 분 되지 않아 무슬림 밀집 거주지에 비상 정지한 직후 무슬림 군중이 몰려 들어와 돌을 던졌는데 동시에 기차에서 불이 났고, 앞 뒤 출입문은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58명이 불에 타죽었다.

사건이 발생한 당시 연방 정부의 여당이면서 주 정부의 여당이던 인도국민당이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발표한 바에 따르면 무슬림 폭도가 휘발유를 구입해 바닥에 뿌리고 내부에서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분명한 무슬림 폭도에 의한 방화 사건이었고, 그 가운데 죄질이 무거운 31 명을 유죄로 판결했다. 제대로 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민 단체는 조사위원들이 뇌물을 받았다고 반발하였으나 별 영향력이 없었다.

하지만 연방 정부의 여당이 바뀌면서 조사위원회는 다시 꾸려졌고, 결론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났다. 방화가 아니고 식당 칸이나 아니면 또 다른 우연한 인자로 인하여 화재가 발생하였고, 외부에서 온 폭도들이 일으킨 난동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여전히 기차가 왜 그 자리에서 섰는지, 누가 그들을 선동 자극하였는지, 불은 어떻게 해서 났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밝혀진 바 없다. 그리고 그 사건의 기획자로 많은 사람이 지목한 자는 그 다음 선거에서 주 수상으로 압승을 거두고 정치인으로 승승장구를 한다. 진실은 밝혀진 바 없고 정치만 난무한다. 그리고 그 정치는 음모를 깔고 권력을 행사할 뿐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1987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 전국 순회가 폭력으로 물들며 대선의 물꼬가 지역주의로 순식간에 바뀌었음을 잘 알고 있다.

사건은 광주 유세에서 노태우 후보의 연설 때 청중 가운데 일부가 지역감정을 조장하며 후보에게 돌을 던지자, 옆에서 자극을 받은 상당수의 시민이 폭력에 참여했다. 이 사건은 계속적으로 방송을 탔고, 그 때문에 전국은 지역감정에 불이 붙었다. 그 다음 날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수많은 시민들의 보복성 돌팔매질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선거는 그 후 지역감정 중심으로 흘러갔고, 그 결과 노태우 후보의 당선으로 끝났다.

그리고 몇 년 후 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 광주 유세장 폭력은 안기부가 깡패를 동원해 조장한 작품이었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진다고 그것이 만들어낸 지역감정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지역감정은 곪을 대로 곪아버렸고, 그 지역감정의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이란 이미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뿐이다.

고드라 열차 사건의 경우 그것이 무슬림의 보복 방화 사건인지, 아니면 고도의 음모에 의한 정치 작품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사건 직후 세계힌두회의를 비롯한 수구 세력들이 구자라뜨 지역의 무슬림을 학살하려 계획하고 집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무런 법적 행정적 권한이 없음에도 구자라뜨 전역에 철시(strike)를 선언한다고 발표했다. 대법원은 그것을 불법이라 규정했지만 주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지역 전체는 자연스럽게 철수되었다. 그들은 구자라뜨 주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당의 공공연한 지원을 받으면서 서서히 인간 사냥을 개시하였다.

VEHICLES BURNED

구자라트 학살 당시 차량을 불태우고 있는 힌두교도들

그들은 우선 이 사건이 무슬림의 소행일 것이라며 모든 무슬림을 남김없이 처단해야 한다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부가 운영하는 방송은 희생자 가족의 울분과 증오 그리고 애도로 가득 찬 방송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방송으로 흘러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폭동을 자극하는 방송이었다.

그런데 그 방송은 당시 연방 정부의 여당인 회의당(I)가 1984년 델리 시크대학살을 자행할 때 인디라 간디의 죽음을 놓고 실행했던 그 방식이었다. 더불어 밑도 끝도 없이 무슬림들이 힌두 여성을 집단 강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은 고드라를 넘어 삽시간에 구자라뜨 주 전역에 퍼졌다.

그때 1년 전에 전임자의 사임으로 수상직을 맡은 모디는 방송은 물론 군중들의 움직임에 대해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스스로가 힌두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런 것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고드라 열차가 ‘테러리스트’에 의해 불에 탔고 우리의 형제가 모두 불타 죽었다는 언어로 선동하였다. 누가 듣더라도 무슬림이 힌두를 테러했다고밖에 들리지 않는 언어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 무슬림에 대한 원한은 고드라를 출발하여 구자라뜨 전역으로 퍼졌는데 특히 구자라뜨 주도인 아흐메다바드Ahmedabad에서는 한 달 동안 학살 난동이 벌어졌다. 아침부터 힌두 수구 세력의 색깔인 황토색 옷을 입고 힌두 전통 칼과 도끼 그리고 활, 몽둥이 등으로 무장을 한 폭도들이 규칙적으로 각 시내 전역에 배급되었다. 수백 명이 한 집단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집단은 상부의 지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먼저 집에 돌을 던지고, 석유를 뿌린 후 불화살을 날려 불을 질렀다.

경찰이 진압을 시작한 후 그들이 사살한 사람 또한 모두 무슬림뿐이었다. 그 결과 셀 수 없이 많은 무슬림들이 힌두 수구 세력의 난동에 쓰러졌다. 그 쓰러진 사망자 수가 적게는 1,000여 명에서 많게는 5천 명이 넘었다.

칼에 찔려 죽거나 불이 타 죽는 사람은 대부분 현장에서 알라를 욕하라거나 힌두 신을 찬양하라는 요구를 받았고, 그런 경우 칼로 목을 베거나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여성의 경우 강간당하거나 젖가슴이나 생식기를 도려냄을 당한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았고, 사지가 절단된 어린이 수 또한 집계가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 남자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여성을 강간하는 방법을 현장에서 가르쳐 주기도 했고, 인도의 종교 공동체 간 폭력 갈등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적극적으로 폭동에 가입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죄악은 이곳에서 저질러졌다. 식민주의가 나쁘고, 전쟁이 나쁘다 한들 2002년 인도 구자라뜨 무슬림 학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고드라 열차 사고가 우발적으로 일어난 화재 사건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치밀하게 계획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사건 이후 즉시 힌두 수구 세력은 구자라뜨 전역을 계획적으로 난동질을 했다는 것이다.

난동은 집중적으로 무슬림 상가와 섬유 공장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면, 그렇게 정교하고 치밀하게 무슬림 경제 기반만 약탈하고 마비시킬 수는 없었다. 사전에 치밀하게 각본이 짜여 져 있었고 누군가가 지휘하였음에 틀림없다. 원래 이 지역은 무슬림이 상당한 섬유 공장을 소유하면서 경제 산업계에 큰 손으로 군림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래서 힌두와 무슬림 간에 경제적 갈등이 심한 곳이었고, 오래 전부터 그러한 것이 종교 공동체 갈등의 모피를 두른 모습으로 폭발하곤 했다.

집단 폭력은 그 폭력을 행사하는 자의 배후가 정권과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결탁되어 잇고 그 정권은 다음에도 교체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설 때 발생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권력은 집단 폭력을 행사하는 난동자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권력의 확실함을 보여주는 행사를 수시로 열게 되어 있다.

구자라뜨 학살의 경우, 이 난동을 일으킨 모디 정권은 갖은 수를 써서라도 차기 선거에서 재선을 이루어내야 했고, 그래서 그들은 대규모 대중 집회를 열어 끊임없는 선동을 일삼았다. 2006년 구자라뜨의 의용단일가는 선거를 한 해 앞두고 250헥타르에 이르는 대규모 행사장에 22개의 힌두교의 목욕 의례 시설을 만들어 100만에 가까운 대중을 동원했다.

그들은 의례를 통해 힌두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면서 정치적 세를 과시했는데, 그 안에는 기독교에 대한 적대화도 물론 포함되었다. 그들에게는 종교를 정치 이데올로기로 만드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선거 운동은 없었다. 대중은 이러한 집단주의에 쉽게 환호하고 현혹되는 법이다. 결국 2007년 선거에서 구자라뜨는 학살자 모디를 다시 선택하였다. 수구 난동은 인민들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다.

구자라뜨 폭동은 전형적인 인종 청소 형태의 학살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획한 것은 주 정부였고, 실행한 것은 공무원과 경찰 그리고 수구 난동 세력이었다. 영화감독 라케시 샤르마(Rakesh Sharma)는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해 그 이름을 최종 해결 (Final Solution)이라 지었다. 명백하게 나치가 유대인 학살을 자행한 홀로코스트(the Holocaust)이 비견한 것이다.

영화는 힌두의 학살을 피해 고향을 떠나 임시 정착한 무슬림 난민 캠프를 유대인 게토에 비유하고, 힌두 수구 세력이 무슬림을 인도에서 모조리 쓸어 없애버려야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이 사건이 단순한 종교 공동체 갈등을 넘어 나치의 홀로코스트 형 인종 청소 형태로 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수구 세력은 이제 무슬림은 이 나라 국민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이 나라 안에 그 무슬림이 살 공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나치가 유대인을 10년의 기간 동안 차별, 탄압, 분리, 학살 등을 단계별로 실시하면서 마치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는듯한 레토릭을 한 것과 유사하다. 나치 인종 청소 담론의 명백한 차용이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나치는 그 사악함을 강제수용소와 가스실에서 은폐한 채 자행했다면 인도의 수구 난동 세력은 그 학살을 대낮 길거리에서 보란 듯이 저질러졌고 그것이 티브이로 중계방송 되었던 점이 다를 뿐이다.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 당시 주 수상이던 나렌드라 모디는 여전히 주 수상의 위치에 있다.(지금은 지난 총선의 결과 인도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사건 이후 모든 기준은 ‘우리’ 힌두로 통합되었고, 그 안에는 빈부의 격차도, 노동의 조건도, 시민의 얌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주의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개인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주 수상의 요청에 따라 희생을 묵묵히 견뎠고, 그 결과 구자라뜨 주의 거시 경제 지표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의 인기는 구자라뜨를 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살을 조장하고 감정에 불을 지르며 공무원과 경찰들로 하여금 학살을 하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모디는 2012년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판결 받았다.

무슬림 진영과 시민 인권 단체는 대법원의 판결에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고 또 다른 법적 절차를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올 4월부터 치러지는 총선에서 야당인 인도국민당의 수상 후보로 확정되었고, 현재로서는 여론 조사에서 회의당(I)의 라훌 간디 후보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1위를 달리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학살자’가 수상이 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자신은 ‘학살자’가 아니고 순결자임을 국민으로부터 평가받았다고 떠들어 댈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난동의 학살극의 진실을 국내외 언론, 시민 단체, 그리고 인도의 국가인권위원회 등이 양심적이고 헌신적으로 드러내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중앙 정부의 정권 교체가 바뀌지 않고 인도국민당이 계속 집권하였다면, 난동 세력 가운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학살의 난동은 그 후 일상사가 되었을 것이고 그 풍경은 인도 전역에 퍼졌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금은 비록 무슬림에 대해 칼끝이 겨누어져 있지만, 시간이 가면 그 칼끝이 같은 힌두의 일부 즉 공산당원, 불가촉천민, 기독교인, 시민운동가 등에게 향할 가능성이 농후해졌을 것이다. 난동은 배후 권력이 바뀌지 않는다는 확신이 설 때 일어나고, 그것을 저지르는 수구 세력은 항상 새로운 상대를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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