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어느 한 혁명가의 기록
    [서평] 『젤롯』(레자 아슬란/ 와이즈베리)
        2014년 09월 13일 02: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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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란 출신의 저자는 어릴 때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다가 종교학을 공부하며 성서를 다시 꼼꼼히 학문적으로 읽으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를 20년 간 해왔다. 그 자신은 조상들의 종교인 이슬람교로 돌아갔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감동과 존경은 기독교 신자일 때보다 더 깊어졌다고 고백한다.

    <젤롯>은 한 유대인 시골 청년에서 로마제국이라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치 질서에 저항한 열혈 혁명가로, 그리고 이후에는 평화의 목자이자 숭고한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변화해간 ‘예수’의 삶과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그 연속과 단절, 변화와 차이의 의미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예수라는 존재에 대해 더 깊게 다가갈 수 있다.

    저자는 ‘나사렛 예수’와 ‘그리스도 예수’를 구분한다.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 예수이며 그리스도 예수는 종교적 예수라는 것이다. 종교적 예수와는 달리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록과 자료는 대단히 빈약하다. 그렇지만 필자는 역사적 존재, 실존적 존재로서의 예수에 대한 흔적을 찾아다니며 그 흔적의 조각들을 꿰어 맞춘다.

    역사적 자료에 남아있는 예수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실증적 사건은 단 두 가지 뿐이다. 예수가 기원후 1세기 전반에 팔레스타인의 유대 민중운동을 일으킨 유대인이라는 것과 로마당국이 그를 정치범의 처벌 방식인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과 당시의 시대적 상황적 역사를 배경으로 저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만들어낸 순한 목자의 이미지가 아닌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정치적 혼란기에 활동을 한 열정적인 혁명가로서의 예수의 모습을 되살려 낸다.

    젤롯

    또한 저자는 예수라는 개인의 존재를 예수가 반영하고 대변하고 참여했던 역사적 운동 속에서 그를 위치 지운다. 반로마 유대 민족주의 민중운동이며, 당시의 체제내화 되었던 종교적 기득권과 지배질서에 대한 반란운동이 그것이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에는, 그리고 예수 전후의 시기에 수많은 예언자들과 설교자들, 메시아를 자처하는 이들이 많았다. 신약성서에도 나와 있는 이들은 종교적 민족적 열정을 호소하고 예언하였다.

    이들의 상당수는 로마 당국에 의해 학살당하거나 살해당했다. 이들의 반로마적인 태도의 강약과 별개로 유대 민족주의와 민중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호소하는 것 자체가 로마의 지배집단에게는 위협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당시는 유대교라는 민족종교와 유대 민중운동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고, 정치적 행동은 종교적 맥락과 흐름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예수와 수많은 예언자들이 주장한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는 당연히 실천적으로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예수와 예수 운동은 이러한 반란운동의 연장에 있다. 하지만 예수 운동이 당시 유대의 예언자들과 일정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의 처참한 현실과 결합하고, 예루살렘이라는 유대 공동체의 핵심지역이 아니라 주변부의 가난하고 배제된 지역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민중들의 운동인 것이다.

    또 유대 민중들의 또 하나의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었던 속류화되고 상업적 돈벌이에 혈안이 된 대제사장과 유대 공동체의 종교적 기득권 질서에 대해 정면에서 부정하고 공격하는 태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의 삶의 극적인 정점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신전에서 행한 파격적인 행동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한 예언과 그 이후의 사건들이다. 반기득권 운동이고 반체제 운동인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운동은 젤롯당과 같은 조직된 무장세력의 활동과도 또 달랐다. ‘젤롯(열심, 열의)’은 종교적 열정과 사상, 경건함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며, ‘젤롯당(열심당)’은 66년 유대 항쟁 이후 나타난 정치적 당파를 의미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운동은 조직화된 세력의 정치운동이라기보다는 종교적 민족적 열정을 호소하고 전파하고 혁신을 일으켰던 대중운동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역사적 예수의 모순적인 모습들을 드러내는 요인이기도 하다. 강한 유대 민족주의의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고, 탈민족적인 보편주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무조건적인 평화와 박애를 전파하기도 하고, 폭력과 전쟁을 호소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예수 운동의 모습 속에서 이후 종교적 예수로의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정한 단절과 차이이기도 하고 또 연속과 계승의 의미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그 계기와 그것으로의 필연성을 상대화시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저자는 복음서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기록들이 왜 예수를 당시의 반로마 반란과 유대민족의 반로마 정서의 실제적 현실과 분리하려고 했는지? 왜 그의 정치성과 혁명성을 거세하려고 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이를 로마와의 항전에서 철저히 패배하고 로마의 무관용 억압 정책 속에서 어떠한 현실적 근거지로 둘 수 없었던 역사적 배경에서 그 요인을 찾는다. 무력 항쟁과 급진적 반로마 운동의 처절한 패배 속에서 미래를 찾을 수 없었던 예수 사후의 기독교인들과 지도자들이 예수 운동 속에 각인된 정치성과 혁명성을 약화시키면서 평화주의와 영적 지도자로서의 예수 운동의 요소들을 특권화 일반화시키는 경로를 밟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역사에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 예수’로, ‘유대인 예수’에서 ‘탈 유대화된 예수’를 창조하는 최대의 공헌자가 된다. 그래서 바울의 관심은 역사적 예수에 관심이 없고 종교적 예수에 집중되며, 그에게는 역사적 예수의 행적과 파격과 예언보다는 ‘예수의 부활’이 모든 설교와 담론의 핵심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예언자, 해방자, 유대 왕들의 계보와는 질적으로 다른 예수의 위상을 형성하는 관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예수 운동을 사고하고 실천했던 야곱과 베드로를 비롯한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과 바울은 일정하게 충돌한다. 바울에게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가 아니었고, 예수는 유대인의 범주에 묶어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리스도교를 창설한 것은 예수가 아니라 바울이라는 말의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의 책은 여기에서 끝난다. 아마도 그 이후의 역사는 ‘나사렛 예수’가 아닌 신앙의 영역인 ‘그리스도 예수’의 역사가 시작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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