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가 우선'이 아니다 ①
    복지체제가 가능했던 경제 조건과 계급 힘 관계 주목해야
        2012년 07월 02일 07: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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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류 지식인의 새로운 담론, 2013년 체제!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당은 부동의 지지율 40%를 지닌 선거의 여왕 박근혜씨로 후보가 결정된 반면 야당의 후보는 오리무중이다. 안철수씨는 여전히 장외에서 분위기만 조율하고 있고 민주당의 후보들은 뚜렷한 강자 없이 서로 서로를 견제하고 있는 눈치이다. 통진당이 연일 초를 치는 바람에 야권 연대도 신통찮게 되었고, 그렇다고 안철수씨가 야당과 공개 경선을 하겠다고 나서지도 않는 마당이라 야권으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는 형국이다.

    나는 정치 관람객이 아니라서 이런 상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일 위인은 못된다. 다만 정치를 보는 지식인 사회의 흐름에 대해서는 한 마디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작년 말부터 2012년 총선/대선을 앞두고 진보를 자청하는 일련의 지식인들이 ‘2013년 체제’라는 표현을 공공연히 쓰고 있다. 올해 초 백낙천 선생은 [2013년 체제 만들기]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발간하기도 했다. 최근에 민교협 토론회의 제목에서도 채택되었듯이 ‘2013년 체제’라는 말은 지식인 사회 내에서 일반적으로 회자되는 개념이 되었다.

    나는 [2013년 체제 만들기]를 읽어보지 않아 그 책에서 정확히 무엇을 2013년 체제로 말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2013년 체제에 대한 일련의 담론 구조가 포스트 이명박 체제 혹은 포스트 97년 체제를 의미하는 것 같다.

    민주화를 상징하는 87년 체제가 IMF체제로 인해 신자유주의 체제로 전환했다면, 2013년 체제는 신자유주의의 모순 극복과 남북 평화공존을 위한 새로운 정치 체제의 수립의 필요성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듯하다.

    2010년 한림대와 김대중도서관 공동주최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주적 시장경제' 토론회

    그러나 고작 정권 교체를 두고 체제 전환을 운운 하는 것이 과연 지식인들의 제대로 된 태도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체제(레짐)의 전환이라는 개념은 최소한 헤게모니 분파의 전환이나 축적전략의 구조적 변화 정도는 존재해야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예컨대 2013년 이후 한국 자본주의가 고도의 경쟁력을 지닌 경제구조와 복지체제를 갖추고, 미일주도의 동북아 패권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평화체제 구축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체제 전환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의 신자유주의 축적구조에서 다른 어떤 구조로 변한다면 그것은 분명 체제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2013년 정권 교체는 단지 정부교체일 뿐 무슨 체제전환 따위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2013년에 정권이 교체된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신자유주의 정부에서 다른 신자유주의 정부로의 교체일 뿐이다.

    2012년 대선에 대해 ‘레짐의 교체’라는 지식인들은 고작 민주당 정권 획득을 두고 ‘대단한 혁명’이라도 일어날 것이라고 떠들고 있는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새롭게 부상하는 ‘주류지식인 집단’의 형상이다.

    나는 주류지식인들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한국 사회의 주류이자 헤게모니 분파의 지배적 구성자들이다. 이들이 정치계급 내에서 상대적 진보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들의 정책이 새누리당과 다른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은 중도우파로서 한나라당과 함께 지배블럭을 구성하는 자들이지 전혀 다른 지지기반을 갖고 있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이 권력을 잡는 것은 하나의 정부에서 다른 정부로의 이행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정부 교체를 온갖 수사학을 남발하며 ‘체제의 전환’이라고 떠들고 있는 자들은 그저 헤게모니 분파의 일원으로 체제의 재생산에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주류 지식인들’일 뿐이다. 이런 모습을 두고 주류지식인이라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두고 우리는 주류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부교체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유별난 선전은 유럽의 지식인들과 비교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영국 보수당이 12년 만에 권력을 잡은 걸 두고 체제(레짐)의 전환이라고 아무도 쓰지 않는다. 누군가 이렇게 썼다면 아마 그는 지식인 사회에서 퇴출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바마가 권력 잡았다고 누가 체제의 전환, 레짐의 교체라고 축복했단 말인가? 이런 사건은 단지 정부교체일 뿐이다.

    그렇다면 백낙청과 같은 주류 지식인들이 야당의 권력 장악을 두고 새로운 체제의 전환이라는 식으로 축복을 내리는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나는 진보적 지식인들의 이런 ‘유치한 발상’을 통해 민주당 정권에게 축복을 내리고자 하는 이유는 이들이 ‘정치의 역능’을 무한히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권만 교체된다면 한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전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그들이 정부교체를 두고 이런 황당한 표현을 쓸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최종심’에서 정치가 결정한다고?

     정당 정치에 대한 큰 기대는 정치의 역능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과거 심상정 의원의 보좌관이었다가 최근 손학규 보좌관으로 간 손낙구씨는 한 때, 민주노총보다 ‘국회의원 한 명의 역할’이 더 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 자신이 민주노총 출신 활동가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 한 명의 역할이 민주노총 전체의 역할보다 더 크다고 본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민주노총에게는 정말 굴욕적인 표현이지만 정치의 역능에 대한 이보다 더 큰 찬사가 있을 수 있을까?

    손낙구씨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오늘날 진보주의자들 일반이 그렇다. 최장집 사단을 비롯하여 진보적 자유주의를 대변하고 있는 일련의 친민주당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떠들고 있는 것이 정치의 자율성과 정치의 역능이다.

    정치가 인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렴하여 올바른 정책을 실현한다면 민중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많은 부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 정치적 역능의 요체이다. 좋은 정책으로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정치의 역능’의 핵심이다.

    소위 정치의 역능,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지식인들이 공공연히 의존하는 것이 세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라는 저작이다.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사회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주의의 많은 문제점을 극복하고, 계급간 연대, 공동체의 복원, 인권의 향상, 삶의 질의 개선, 자유의 향상을 이뤄냈다고 주장한다. 버먼은 전후 복지체제는 사민주의 정치이념의 실현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글은 [정치가 우선한다]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이 아니기에 깊이 있게 들어가지는 않겠다. 다만 세리 버먼이 강조하는 바가 경제 결정론에 빠져 있는 마르크스주의나 경제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시장 자유주의와 달리 사민주의의 핵심은 정치의 우선성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정치의 역능을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결하고 제대로 된 사회체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체제는 비록 자본주의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인 것이다.

    한국의 진보주의자들도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 정치만 제대로 된다면 신자유주의 초래한 경제 위기,인민의 고통, 불평등은 충분히 해소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고 올바른 정책만 실현할 수 있다면 상황은 충분히 통제가능하고, 불평등은 해결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장집 사단이 이런 정치 우선주의를 선전하는 대표적인 세력이라는 것쯤은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자들 모두가 강조하는 바가 정치의 자율성이다. 사실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이 바로 정치와 경제의 분리,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정치가 경제나 사회적 세력들, 관계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공동체 내부의 자율적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는 각자의 고유한 역할이 있고, 각각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사회가 작동한다는 발상이다.

    물론 정치의 역능을 강조하는 입장은 자유주의 논리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정치가 우선한다’는 논리에는 정치에 의해 경제와 사회가 재구성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내재되어 있다. 어떤 정치를 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적대와 경제적 모순이 폭발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세리 버먼은 전후 사민주의 체제나 스웨덴에서 경험에서 보듯이 제대로 된 정치만 구성된다면, 사회적 갈등과 모순은 충분히 공동체적 원리를 통해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알튀세르를 역전시켜 쓴다면, ‘최종심에서 정치에 의한 결정’이 이뤄질 수 있다는 논리다.

    보수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은 무엇이 달랐는가?

    [정치가 우선한다]는 주장에 대해 많은 사민주의자들이 공감하고 있지만 20세기의 역사는 그 책에서 논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세리 버먼은 1950년대 이후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사민주의의 힘으로 묘사한다. 전후 복지국가는 사민주의의 이념이 실현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2010년 독일 기민당 아데나워 재단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의 협력 제휴 조인식

    그러나 전후 서유럽 자본주의의 변모가 사민주의로 인해 가능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소위 사민주의 정부가 전후 경제를 책임지던 나라는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국가들 밖에 없다. 영국 복지체제를 제도적으로 기초한 비버리지경은 우파였지 좌파가 아니었다. 물론 ‘비버리지 보고서’를 최초로 실행한 정부가 노동당의 애틀리 정부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51년 보수당이 권력을 잡은 이후 그들은 12년간 애틀리 정부의 복지정책과 다른 어떤 근본적 전환도 보이지 않았다. 보수당과 노동당은 복지 공급에서 실질적인 차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독일에서 사민당 집권은 1970년대에 와서나 가능했다. 독일 복지 체제의 기원은 보수주의자 비스마르크이며 전후 독일은 아데나워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사회적 시장경제를 정립한다. 이탈리아/일본도 말할 것 없다. 1930년대 인민전선 이후 프랑스에 좌파정부가 들어선 것은 68혁명과 함께 드골이 꼴사납게 물러난 이후이다.

    독일도 프랑스도 우파가 복지체제를 정립했다는 말이다. 포드주의 축적 체제의 중심국인 미국은 사민당이 아예 없다. 북유럽 국가들 말고 도대체 어디에서 사민주의가 전후 복지체제를 완성했다는 것인가?

    이런 주장에 대하 세리 버먼을 추종하는 사민주의자들은 보수당의 복지정책도 사민당의 이념을 받아들인 것이라 억측을 부릴지 모르겠다. 어떤 정당이 복지체제를 공급했는가가 핵심이 아니라 누가 공급을 하든지 사민주의의 이념이 실현되었다면 그것은 사민주의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억측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는 “사민주의는 좋은 것”이라고 정의하고선 누가 하든 좋은 것은 사민주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환원하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사민주의 이념 환원론이다.

    서유럽 복지 체제가 좌우파와 상관없이 정착된 것이라면 그것이 가능했던 조건을 특정 정당의 이념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객관적 조건을 구명하는 것이 연구자의 기본적 태도가 되어야 한다.

    전후 복지체제의 성립이 가능했던 조건은 전후 황금기였다. 경제의 고도성장을 토대로 사회적 타협이 가능했던 것이다. 계급타협과 복지는 어디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에게 완전고용을 보장하고, 투기적 금융을 억압하고, 이윤을 지속적으로 생산부분에 투자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사회주의 체제가 존재했기 때문에 서유럽은 노동자계급을 체제 내화해야 했다. 복지체제는 혁명에 대한 보험이었던 셈이다.

    전후 복지체제의 성립과정에서 좌우파 정당들은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보수당이든, 자유주의정당이든, 사민주의정당이든 경제적 조건이 양호하고, 계급적 세력관계에서 노동자계급의 힘이 강화되자 복지국가 건설에 능동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전후 복지체제는 정치의 역능이 아니라 경제적 조건과 계급 힘 관계가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처칠 말대로, 이 경우 정당간의 차이는 ‘뉘앙스 상의 차이일 뿐이다.’

    전후 호황과는 반대로 경제체제가 위기가 오자 복지체제는 어디에서나 붕괴되고 있다. 70년대 위기 이후 서유럽 복지국가는 소위 보편적 복지에서 ‘잔여적 복지’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고용은 포기되고, 노동의 신축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부르주아들은 이윤율 하락을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으로 만회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제일 먼저 이를 실행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 뒤를 따랐으며 1990년대에 독일과 서유럽 전체에서 구조조정은 일정에 오르게 된다. 북유럽 국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구조조정을 해 오고 있다. 사민당이 권력을 잡아도 똑 같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치가 우선한다는 말이 정당화되려면 이념이 다른 정당 간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야 한다. 정치적 이념의 차이에 따라 정당이 실질적인 정책의 차이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전후 호황기일 때는 보수당도 보편적 복지 공급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가 오자 사민주의 정당들도 거의 전부 신자유주의의 전위가 되었다. 정치정당들은 경제적 조건과 계급관계가 지시하는 대로 동일한 방향으로 경향적으로 수렴된 것이다. 축적체제의 조건과 계급의 힘 관계가 국가정책의 방향을 결정했지 정당의 이념의 차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전후 유럽의 역사는 정치의 우선성이 아니라 경제의 우선성, 계급투쟁의 우선성을 보여줄 뿐이다. 경제가 호황일 때 복지가 제대로 이뤄졌고, 경제가 위기로 전락하자 복지체제는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현재와 같은 경제위기에서, 현재와 같이 노동자계급의 힘이 약한 상태에서는 어떤 정당이 권력을 잡아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간다는 말이다. 정치를 ‘섹쉬하게 하면’ 무슨 대단한 변화가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 이어서 한국에서 전두환 정권과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경제정책의 연속성에 대한 글이 게재될 예정이다(편집자)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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