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주아들이야말로
    경제결정론자들이다
    [독서노트② ]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테리 이글턴/ 길)
        2014년 09월 11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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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르크스는 왜 옳았는가-1 링크

    4. 자본가들이야말로 자발적인 마르크스주의자!

    토대-상부구조론은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쟁점이다. 베버리안을 따르는 역사사회학자들은 권력 자체를 독립적인 역사적, 사회적 추동력이라고 설정한다. 세계체제론자 지오바니 아리기은 『장기 20세기』(그린비, 2008)에서 이런 역사 사회학의 관점을 채용하여, 마르크스적인 역사적 추동력(자본주의)과 베버적인 역사의 추동력(영토주의)을 평행적으로 서술한다.

    마이클 만은 『사라질 권력, 살아날 권력』(생각의 길, 2014)에서 권력의 원천을 다원적이라고 주장한 베버를 현대화 한다. 자유주의 정치학자들이라면, 그 입장의 차이를 떠나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 독립성을 옹호할 것이다.

    문화주의자들이라면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이 경제적인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한 문화주의자 레이몬드 윌리엄즈는 그의 초기 대작 『기나긴 혁명』(문학동네, 2007)에서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 경제적인 것에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

    에드워드 톰슨은 그의 대작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0)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형성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논한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이들 사상가들은 모두 역사유물론에 대한 나름의 비판을 대표한다.

    토대-상부구조론의 의미

    토대와 상부구조는 사회체제를 설명하기 위한 은유이다. 이는 경제적인 것과 경제외적 제도가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자, 사회적 권력,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것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개념적 장치다.

    정치적인 것의 근원적인 기원은 정치 외적인 것 즉 경제에 있다는 것이다. 국가권력의 작용은 계급질서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관점이다. 우리가 정치제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 의회, 법, 군사적 행위 등이 그 자체의 속성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결합되어, 경제적인 것으로부터 제약받으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의회에서는 복지제도와 관련된 입법을 만들고,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을 만들지만, 의회 자체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제도를 만들지 않는다. 민법의 핵심은 사유재산 보호이다. 미국이 세계체제의 질서를 관리하는 경찰기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미국 자본가계급의 이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142쪽)

    상부구조의 역할을 지배계급의 착취만을 위한 것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매우 조악한 발상이다. 국가를 착취의 수단이라고 단순화 하는 사고방식을 ‘도구주의’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도구주의적 국가관, 이데올로기관이 광범위하게 물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국가가 복지를 강화하는 것은 대중들의 불만을 안정화시키면서 체제에 복종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거나 군대와 경찰은 억압적 기능만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체제에 순응하는 인간을 생산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주장도 자주 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을 기능주의라고 한다. 국가기구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지배체제의 재생산을 위해 능동적으로 복무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145쪽)

    그러나 이데올로기적인 것들은 결코 지배체제를 재생산 하는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변혁운동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며,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힘이 될 수 있다.(『역사와 행위』, 295쪽)

    노동조합이라는 제도는 분명 계급타협, 지배계급의 양보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노동자운동의 성장을 위한 실질적인 토대가 된다. 의회는 비록 지배계급의 이익을 실현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자본가계급의 단기적 이해를 제어하고 사회 전체를 재생산하기 위한 입법적 기능을 담당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의 이익, 민중들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는 경로들을 제공한다.

    문화의 영역도 마찬가지다. 문화는 분명 지배적인 가치를 재생산하는 공간이지만 예술이 그렇든 언제나 반란적인 상상력을 생산해 내는 곳이기도 한다. 제도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시민사회는 해방을 위한 새로운 진영의 꾸릴 수 있는 잠재력을 허용한다.(『역사와 행위』, 266쪽)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은 언제나 분리되는가?

    더군다나 자본주의에서는 비록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분리되지만, 봉건제나 전자본주의 체제에서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은 밀접히 결합되어 있고, 일상적인 삶에서 정치적인 것, 종교적인 것이 더 우위에서 작용하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역사와 행위』, 294쪽) 예컨대 서구 봉건제에서는 영주가 직접적인 착취자이자 권력을 통해 농민들을 직접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았고 착취체제는 근본적으로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작동하고 있었다.

    중국의 공납제도 마찬가지다. 공납제 생산양식은 조세체계라는 경제체제가 국가체제의 일부로서 작용하고 있었으며, 국가의 행정적 기능 자체가 경제 활동을, 그것도 탁월하게, 포함하고 있었다.(켈러니코스,『이론과 서사』, 일신사, 275쪽) 이 경우 상부구조는 토대를 작동시키는 핵심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토대-상부구조론이 정치와 경제의 상대적 독립성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전자본주의 생산양식에는 적용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토대-상부구조론의 핵심은 비경제적인 제도들,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경제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적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봉건제에서는 정치적인 것이 더 우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도 그것은 봉건체제의 지배계급의 이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었다. 이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토대-상부구조 모델의 또 다른 핵심은 비경제적인 영역의 작동방식이 경제적인 것들에 의해 크게 제약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런 설명방식은 다른 이론들과 비교해보았을 때에 그 장점이 더 잘 발휘된다. 앤서니 기든스나 마이클 만 같은 베버주의 사회학자들은 권위적 자원의 배분이 사회변동의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왜 특정한 국가가, 특정한 개인이 권력을 확장하기 위해 군사적,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지 분명한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

    베버주의자들은 니체를 따라 모든 인간들, 국가들, 지배집단들은 권력의지, 지배 의지를 지녔다고 설명한다. 즉 인간본성에 토대를 두고 권력 작용, 군사적 팽창을 설명한다는 점이다.(『이론과 서사』, 207쪽)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계급의 이해관계, 제국주의적 이해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정치의 작용을 사고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치의 근원은 정치 외부에 있다고 하는 점에서 다른 이론들과 근본적으로 구별 된다.

    정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문화를 예로 들어보자. 문화가 삶의 양식이고 대중들의 자발적인 참여의 공간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해도, 오늘날의 문화 영역이 경제적인 원리와 분리된 채 작동한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헛소리처럼 들린다. 종교를 보자. 종교는 가장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곳이지만 가장 세속화 되어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최근 한국 기독교 최대의 교단은 11조를 내지 않으면 신도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했다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부르주아들이야 말로 경제결정론자들이다!

    어쩌면 부르주아들이야말로 ‘자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마르크스』, 115쪽) 부르주아들은 모든 것을 현금관계로 바꾸어 놓았고, 모든 삶의 질서를 경쟁, 이윤동기, 이기심으로 바꾸어 놓은 주체이다. 한국 사회는 이런 주장을 정당화하는 전시장이다. 대학도 자본이 장악했고, 문화계는 예전에도 그랬으며, 학업 성취도, 사회적 기회도 모두 돈과 연결되었다. 말 그대로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해야 마땅하다. 경제 논리가 사회체제의 모든 곳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형상대로 모든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켜 놓은 것이다. 부르조아들이야말로 자발적인 경제결정론자인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는 토대가 상부구조의 은유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결정적이지 않은 사회를 바랐다. 그는 모든 것들이 현금관계로 환원되고 모든 인간적 가치가 돈의 의해 결정되는 것을 경멸했다. 더불어 그는 노동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것, 그 자체의 즐거움이 되는 활동이기를 바랐다. 예술적 생산, 창조적 활동이 그 자체의 즐거움을 주는 사회적 활동이다.

    마르크스는 특정한 인구만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사회가 아니라 노동하는 모든 인민들이 자율적이고 행복한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의 탁월함이란, 고귀한 모든 것들에 대해 노동하는 인민들이 자유롭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경제적 억압,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이들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점에 주목한 점이다. 마르크스는 경제적으로 착취 받고, 어쩔 수 없이 노동해야하며, 불평등한 부의 배분이 지속되는 한 자유로운 삶,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실천하는 그런 사회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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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대회 모습 자료사진(사진=노동자연대)

    5. 싸우지 않으면 노동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진보적 지식인들만큼 노동자계급의 존재에 대해 불신하는 이가 없다. 노동자 운동은 독자적인 의제설정 능력이 없고, 임금 인상에만 관심을 두며, 심지어 보수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정보사회론자들이나 탈현대 사상가들은 노동자계급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졌으며, 그들은 파편화되고, 분화되었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스트들은 계급 내에 성의 억압이 가로지르며, 노동자운동은 가부장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이라는 실체가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러우며, 그들이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뿐이며, 그나마 존재하는 노동자들은 보수적이거나 그저 도움이 필요한 가련한 존재들일 뿐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오늘날 계급의 형상이 변한 것에는 의문을 달지 않는다. 마르크스 당대에 가장 수적으로 많았던 노동자는 산업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부르주아 가정의 ‘하인들, 여성들’이었다.(『마르크스』, 159쪽) 산업노동자계급은 가장 많았을 때조차도 노동자 전체의 40%가 되지 않았으며, 현재는 채 20%밖에 안 된다. 마르크스 당대에는 더 작았다!

    반면 서비스 노동자들의 규모는 대폭으로 증가했다. 대형 마트, 백화점, 복지서비스, 다양한 분야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수는 대폭 늘어났다. 사무직 노동자들 역시 대량으로 늘어났다.(『마르크스』, 162쪽) 산업노동자계급은 공업생산이 증가하는 주변부 국가들에서 더 확대되고 있다. 오늘날 노동자계급이 종사하는 직종들, 산업들은 변화했지만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오히려 확대되었다. 이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안녕을 떠들었던 앙드레 고르와 같은 급진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마치 산업노동자계급만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규정하는 듯이 말한다.(『프롤레타리아여 안녕』, 2011, 생각의 나무) 그러나 이것은 전혀 진실에 맞지 않다. 자신의 노동력 외에 다른 생계수단을 지니지 않은 존재이면서, 생산과정에서 지배받는 모든 이들이 노동자계급이다.

    마르크스의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역사의 주체’라는 이미지를 덧붙인 것에 있다.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적 착취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도록 역사적인 역할이 주어져 있다는 이야기 말이다. 이를 역사철학적 주체의 이론이라고 한다. 헤이든 화이트와 같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을 ‘서사’ 즉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폄훼한다.(『이론과 서사』, 2장 참조)

    노동자계급에 대해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 체제는 노동자계급 일반을 체제적으로 통합할 수 없다는 것. 일부의 화이트칼라 중간계급, 정규직 노동자들을 체제내로 통합할 수 있지만 다수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고도 성장기는 노동자들의 삶이 좋아질 수 있지만 경제위기 때는 그 모든 위기의 결과를 노동자계급이 떠맡게 된다는 것.

    불안정 고용, 생계위협, 노동과정에서의 인격적 모독, 실업의 위험, 소득불안정 등은 다수의 노동자계급 가정이 앉고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핵심적인 주장인 셈이다. 오늘날 세계 노동자들의 대부분이 이 상황에 처해있다. 이것이 바로 ‘구조의 힘’이다.(『역사와 행위』, 168쪽)

    둘째 마르크스는 자본의 축적 체제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노동의 불안정성을 확대시키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그들의 계급적 이해를 위해서라도 생산과정에서 자본가계급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그들의 직접적인 이익만이 아니라 그들 계급의 장기적 이해관계에 조응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급적 이해관계이다. 임금이 올라가고 생산관계 내에서의 인격적 예속을 벗어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체제와 맞서야 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의 결론이다.

    셋째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노동자들이 착취 받는다는 것이 곧바로 그들이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세계는 자동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세계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획기적인 사회 변동이 노동자계급의 객관적 이해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역량이 커지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필연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역사와 행위』, 119쪽) 즉 계급투쟁의 고양과 사회변혁이 노동자계급에게 이익이 된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투쟁하지 않는다면 세계는 나쁜 방향으로도 전진할 수 있다.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의 선택

    한 가지만 덧붙여 보자. 개인으로서 노동자는 노동조합 결성이나 불법적인 파업시위에 참여하기보다 관리자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실현할 수 있다. ‘해고’나 ‘전환 배치’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노동자와 연대하여 노조를 결성하고 싸우는 것이 그 자신에게도, 동료에게도 이익인 된다는 것, 그리고 실질적으로 노조를 결성하면 그 싸울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그는 계급적 행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특성으로 인해 개인으로서의 노동자가 계급적 행위자로서의 노동자계급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특정한 개인이 계급적 행위자로 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 아니라 ‘개인 행위자의 능동적 선택’이라는 점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 역의 선택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역사는 열려져 있는 것이다.

    오늘날 노동자운동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이 현실을 반영한다.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은 조직률이 형편없고, 비정규직과 정규직간의 계급적 연대의 전선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으며, 조직된 노동조합들 내에서도 통일된 행보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진보주의자들은 노동자운동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 진보주의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시민의 힘이 변화의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비정규직들은 그저 법으로 보호해줘야 할 가련할 존재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계급이 단결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싸우지 못한다면 이런 처우를 받을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불행히도 그 예측은 오늘날에 딱 맞아 떨어진다. <계속>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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