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
    [책소개]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박김수진/ 이매진)
        2014년 09월 07일 12: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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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즈비언이 레즈비언에게 묻다

    한 사람이 있었다. 《레이디경향》과 《주부생활》을 뒤지고 피시통신의 바다를 헤매며 자신을 감싸고 있는 어떤 두려움의 정체를 찾아 나선 사람,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별나라에서 온 대사’ 취급을 당한 사람, 지금 당신 옆에 있는 어느 누구일 수 있는 사람, 바로 동성애자다.

    평범한 30대 동성애자 박김수진, 레즈비언 박김수진은 2000년에 레즈비언 인권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한 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성애 칼럼을 쓰고 홈페이지를 열어 정보를 공유하는 활동을 펼쳤다.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을 사랑한다는 다른 정체성 때문에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정보를 만들어 퍼뜨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 ― 조금은 외로운 우리들의 레인보우 인터뷰》는 그런 활동의 결과물이다. 1부 ‘별에서 온 그대들 ― 레즈비언 바로 알기’는 동성애 바로 알기 지상 강의 형식을 띠고 있고, 2부 ‘내 마음 네가 다 알잖아 ― 레인보우 인터뷰’는 레즈비언이 레즈비언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본 20번에 걸친 인터뷰를 정리한 기록이다.

    레즈비언

    또 다른 나를 기록하다 ― 20번의 속 깊은 인터뷰로 우리를 알아가기

    사랑이라는 말의 정의를 놓고 소란이 벌어지더니 퀴어문화축제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마찰이 빚어지는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 없는 사람들, 동성애가 무엇이고 레즈비언이 누구인지 궁금한 이들은 이 책 1부에 실린 레즈비언 바로 알기 지상 강의에서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동성애와 레즈비언의 정의부터 남성성과 여성성의 관계, 레즈비언부터 호모포비아까지 동성애 관련 용어의 올바른 정의, 동성애 인구 통계의 문제, 동성애와 종교, 레즈비언의 정체화 과정, 커밍아웃까지 조금은 딱딱할 수 있는 내용을 당사자의 눈높이에 맞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이어지는 인터뷰는 박김수진이 엄마와 언니 등 가족부터 친구와 지인을 만나 나눈 레즈비언 이야기다. 그중에는 레즈비언도 있고 레즈비언이 아닌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모두 동성애와 레즈비언 문제를 삶의 문제를 받아들인 이해관계자다.

    공식 질문인 “너는 왜 레즈비언이니?”로 시작하는 인터뷰는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우리 사회의 동성애 문제가 지니는 복잡함과 다양함을 보여준다. 먼저 정체성 문제다. 동성애자를 ‘스스로 동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으로 보는 박김수진은 스스로 동성애자로 살아가기로 선택하는 과정을 알아보기 위해 조금 도발적인 이 공식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답하는 각기 다른 모습 속에서 우리는 동성애 또는 레즈비언이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계층, 계급, 상황 속에서 다양한 결이 드러나는 삶의 한 단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열심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레즈비언들은 한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한다. “그냥, 레즈비언이니까!”

    레즈비언들이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인 가족과 커밍아웃에 부딪히면 다들 쉽게 당당해질 수가 없다. 가족도 “누가 물으면 우리 딸 레즈비언이라고 답할 자신”은 있지만 먼저 꺼내어 말하기는 어렵다.

    또 결혼 문제와 경제 문제는 일상을 늘 괴롭힌다. 결혼 문제에 대처하는 자세에는 맞선을 60번 보고 퇴짜를 60번 놓은 교사 레즈비언 ‘에림’의 경우처럼 가족의 요구를 어느 정도 들어주며 우회하거나, “나 결혼 안 한다”고 미리 열심히 선언해버린 공무원 장수생 레즈비언 ‘로마’의 방식이 있다.

    그런데 사랑을 매개로 한 ‘결합’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레즈비언 사이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동성애도 당연히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피곤해서 차라리 연애 안 하고 만다는 생각도 해봤다는 여성운동 하는 레즈비언 ‘아자’는 명색이 레즈비언으로서 연애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맞받아친다.

    때로는 경제 문제도 걸림돌이 된다. 집안 사정으로 50번의 알바를 거치며 진정한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명개’는 돈 때문에 연애를 못했고, 돈 때문에 파트너와 다투기도 한다. 광주 대표 레즈비언 ‘서현’은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좁은 지역사회에서 이성애자인 척 살아가는 레즈비언의 고충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부산에서 활동하는 레즈비언 인권운동가 ‘가루’와 ‘랑랑’은 서울하고 5년, 10년 차이가 나는 지방에서 존재 자체만으로 운동을 하는 셈인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괴로움을 특유의 열정과 여유로 이겨내고 있다.

    한국레즈비언상담소에서 활동하는 ‘소윤’과 ‘려수’도 이런 “활동을 왜 안 해야 하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단체 활동 자체가 거의 유일한 커뮤니티 활동인 현실에서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세상을 만들려면 함께 모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수자 중에도 소수자는 있다. 이성애자로 살자고 마음 고쳐먹고 동성애자에서 벗어나 ‘탈반’을 감행했다가 다시 레즈비언으로 돌아온 퀴어-종교인 ‘지훤’은 기독교인이다가 불교로 개종하더니 지금은 성당에 다닌다. 연극을 하는 바이섹슈얼 ‘고리’는 상식을 깨고 당연한 세상을 뒤흔드는 자신의 연극처럼 정체성을 변화시킨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재한 일본인 ‘스즈키’는 외국인이자 레즈비언이자 계약직 강사이면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처지를 담담히 전한다.

    저 무지개 너머 어떤 나라 ― 아는 언니들의 그냥 잘 살아가는 이야기

    동성애자나 레즈비언이 ‘섹스에 미쳐 날뛰는 변태성욕자’라고 떠들어대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한국에서 동성애자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레즈비언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현실이 꿈이라는 말 앞에 ‘아직은’이라고 적어 넣고 저 무지개 너머 있는 어떤 나라를 꿈꿀 자유마저 빼앗지는 못한다.

    아는 언니들의 그냥 잘 살아가는 이야기는 지금도 ‘나는 레즈비언일까?’라고 묻고 ‘나는 누구일까?’라고 스스로 되물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작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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