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유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책소개]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백상현/ 책세상)
    2014년 09월 07일 12: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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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광장에는 사람들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 밀양 할머니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러나 일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세계와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는 권력의 귀에까지 가닿지 않는다. 하루하루의 삶을 버티듯 살아가는 우리도 이들의 호소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세계로부터 거부당한 채 강고한 현실의 벽 주위를 배회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유령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들을 유령으로 만든 세상의 부조리가 앞으로도 나만 피해 갈 거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삶을 불행으로 이끌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없게 하는 이 세계에 지금 당장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무시해온 그 부조리가 언제 우리를 덮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결국 우리가 도처에서 마주하는 유령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이다. 당신의 존재를 제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 그것만이 당신에게 강제된 유일한 의무이다.

자크 라캉은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윤리라고 말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강제된 세상의 법과 권력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는 것은 가장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뜻이기도 하다.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은 이러한 라캉의 윤리적 명제―끝까지 욕망하고, 끝까지 저항하라―를 ‘유령 이미지’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작품 속에서 풀어낸 책이다.

저자가 특별히 예술작품들을 통해 라캉 철학을 설명하는 이유는 지배 질서에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예술의 창조 활동이 라캉 철학의 핵심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령 이미지’는 우리가 안주하려는 세계의 허상을 폭로하는 (비非)존재로, 라캉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가 만든 새로운 인문학적 개념이다.

당대의 질서와 지식 체계, 권력 등에 반항하는 이미지들이 바로 ‘유령 이미지’인 것이고, 저자는 이 이미지들을 통해 하나의 예술작품이 어떻게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윤리적 탐구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결국 유령 이미지의 역능이 주체를 매혹해 그를 행동하는 윤리적 주체로―유령으로―다시 태어나게 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정신분석학에 기반을 둔 라캉 철학은 그 난해한 개념들―응시, 거세, ‘대상 a’ 등―로도 유명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개념들을 이해하는 어려움 때문에 라캉 읽기를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은 이러한 라캉 이해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저자가 미술사의 명화들과 사진, 비디오아트를 포함한 현대 미술, 여기에 다양한 소설과 영화 이야기를 곁들여 그 개념들을 설명함으로써 라캉 철학에 한 발짝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라캉을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말라고 말한다. 라캉 철학은 난해한 지적 유희가 아닌 실천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난해한 개념들을 동원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유령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 이 세계의 한계 밖에서 사유할 것. 지금 우리가 마주한 유령들은 어떤 모습이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들이 맞서 싸우려는 세계의 실체는 무엇인가?《라캉 미술관의 유령들》은 독자들에게 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라캉

권력과 지식 체계를 위협하는 ‘유령 이미지’란 무엇인가

‘유령phantom’이란 이 세상에 없어야 하는 존재가 이승에 출현하여 놀라움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phantom은 판타즘phantasm(환영)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판타스마φ?ντασμα(phantasma)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우리말과 의미의 차이가 거의 없다.

유령이란 결국 우리의 정상적 현실, 즉 질서로부터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불길함의 대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유령은 우리의 삶이 좌초할 때, ‘제대로’ 흘러가지 못할 때 비로소 출현한다.

한 시대의 질서와 지식 체계, 권력 등을 위협하는 ‘유령 이미지’를 품고 있는 예술작품들은 라캉이 이야기하는 진리에 한 발짝 다가선 작품들로, 이를 보는 감상자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재현한 듯 보이는 그림에서 세계를 전복하는 무언가를 발견한 감상자는 자신 앞에 펼쳐진 강고한 현실의 리얼리티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유령 이미지’는 예술작품 외에도 다양한 이미지들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저자에게는 어린 시절 서울역 모퉁이에서 보았던 ‘광주 민주항쟁의 현장 사진’이 충격적인 유령 이미지의 체험이었다. 광주 학살의 증언들은 80년대 대한민국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발 디디고 살고 있는 현실이 사실 기만적 세계라는 것을 충격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기존 정치권력에 맞서 싸우게 했다.

이처럼 공포와 충격의 형식으로 다가오는 유령이미지는 현실의 강고한 스크린 뒤에 감춰진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한다.

규범적 아름다움을 비틀어 낯설고 기이한 ‘진리’의 공백으로 안내하는 유령이미지

라캉 윤리학의 핵심을 이루는 저항의 근원에는 ‘진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존재한다.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는 존재”이고, “진리는 지식 체계에 난 구멍”이라는 말로 철학사에서 거의 잊혔던 ‘진리’ 개념을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에 다시 불러들인 라캉은 정신분석이 의학이 아닌 인간 실존의 가능성의 차원을 다루는 윤리학, 나아가 정치학의 성격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라캉은 강연을 시작한 1950년대부터 사망하던 1981년까지 줄곧 ‘진리’에 대한 언급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가 말한 ‘진리’란 신학적 진리 또는 임상 정신의학이 의존하는 실증 과학적 진리 개념은 아니다.

라캉은 진리를 ‘공백’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는 일종의 전회를 시도했는데, 이는 진리를 인간이 현실과 맺는 관계의 특수한 형식으로서 사유하는 라캉의 독특한 진리관의 바탕이 됐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리는 절대적인 이데아로서의 사유의 종착지가 아닌 무엇이든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사유의 창조적 출발점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미술은 아주 오래전부터 라캉이 이야기하는 ‘진리에 대한 욕망’을 실천하는 아주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저자가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화가들로부터 이 책의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 역시 화가들의 진리에 대한 욕망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화가들은 어떻게 화폭 위에서 ‘진리’에 대한 욕망을 추구했을까?

라캉은 ‘거세’라는 정신분석학적 개념을 통해 인류의 문명화 과정을 설명했다. 거세는 하나의 완결된 체계 속에 안주하려는 보수적 욕망이 그에 반하는 욕망을 억압하고 길들이는 방법이다. 화가들은 문명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거세와 그에 반하는 활동을 이미지 재현의 영역에서 동시에 수행해왔다.

이 책에서는 후자 즉, 현실의 질서를 구성하는 규범적 아름다움의 형상을 비틀어 낯설면서도 기이한 유령 이미지를 창조하고, 그것을 새로운 아름다움―라캉이 이야기하는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자 투쟁한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시각 예술 영역에서의 진리에 대한 욕망을 이야기한다. 이들이 화폭 위로 불러낸 유령들은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의 매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상자에게 일깨우며 기존의 세계 질서 속에 안주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욕망을 포기하도록 만든다.

유령 이미지는 우리 모두가 욕망의 적극적 실천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미래를 향한 자아의 창조는 이러한 유령 이미지의 초대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 초대를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오로지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카라바조에서 앤디 워홀까지 유령 이미지의 미술사

세계의 이미지를 질서화하려는 의지는 인간의 문명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서구에서 이미지를 질서화하려는 의지가 가장 본격적으로 그리고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것은 르네상스시대였다. 르네상스시대에 발명된 ‘원근법’은 이미지를 길들이는 가장 확실한 도구로 당대의 수치 계량적 세계관을 화폭 위에 완성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질서화의 의지는 르네상스의 정점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완성한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매너리즘기의 화가들이 형상을 일그러뜨리는 방식으로 고전주의적 시각으로 세상을 재현하는 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진리’에 다가가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는 없다. 공백으로서의 ‘진리’로의 접근은 기존의 시각적 재현의 질서를 완전히 전복하는 유령이미지들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구 미술사에서 진리의 공백에 가장 근접하는 유령이미지를 창조한 예술가는 카라바조와 고야, 그리고 이 책의 3부에서 소개하고 있는 현대의 해체주의 예술가들이었다.

바로크 회화를 대표하는 카라바조는 저잣거리의 부랑아들을 성화 속 인물들의 모델로 삼음으로써 1500년 동안 지속되어온 기독교적 이미지 재현의 역사에 반기를 들었고, 고야는 ‘귀머거리의 집’에서 그린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 그림 연작’을 통해 오랫동안 성서나 신화라는 고전적 의미 체계에 갇혀 있던 이미지를 해방시켰다.

20세기 이후 유령 이미지를 창조한 현대 예술가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화 논리와 매끈한 진리의 평면을 형성한 매스미디어 이미지에 대항해 진리의 공백을 다양한 이미지들의 매혹을 통해 보여주었다.

저자가 20세기의 진정한 풍경화가라고 지칭한 앤디 워홀은 반복 속에서도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얼룩을 만들어내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 체계에 반하는 유령이미지를 만들었고,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초점이 나간 듯한 희미한 이미지를 통해 매스미디어 이미지의 거짓 선명함에 저항하는 유령이미지를 만들었다.

물론 예술작품 속 유령이미지를 한번 본 것으로 우리를 둘러싼 기만적 현실이 일거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경험이 우리 삶에서 반복될 때, 그리고 어느 날 우리가 삶 속에서 스스로 유령이 되고자 할 때, 우리는 행동하는 주체로서 라캉이 이야기한 윤리적 도약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모든 것에 대해 반항하고, 새로운 자아의 창조로 나아가는 출발선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을 통한 유령이미지의 체험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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