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를 향한 돌직구
    [독서노트 ①]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 (테리 이글턴/ 길)
        2014년 09월 03일 04:2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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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종석씨가 테리 이글턴의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에 대한 독서노트를 보내왔다. 다소 길어서 3회에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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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대의 폐허와 마주선 마르크스

    경제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2008년 미국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는 잠시 회복되는 듯했지만 더블딥에 빠진 이후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장기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미 연준은 경기를 부양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양적완화, 제로금리, 포워드가이던스 등.

    그러나 경제가 정상적인 회복국면으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은 좀체 나오지 않고 있다. 이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 아시아도 마찬가지다. 일본도 양적완화 등의 다양한 정책을 취했지만 경기회복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한국도 투자 부족, 장기 저성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경지변동을 이야기 했고, 위기의 가능성을 주장해왔지만 자본주의의 경쟁 논리 자체로부터 구조적 위기의 필연성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상가는 마르크스다. 이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현 시대는 그런 구조적 위기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학계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특히 한국에서 그렇다.

    급진주의적인 철학에 관심을 두는 이들조차 들뢰즈, 가타리니 고진 혹은 탈식민주의 사상가들의 이상야릇한 이야기들에는 관심을 두고 두지만 그람시나 알튀세르,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과거의 유산으로 취급한다.

    교양 있는 독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두어도 현실 변혁을 위한 것보다는 지적 유희에서 그런 경우가 많다. 슬라보예 지젝이나 자크 랑시에르, 알랭 바디우와 같은 급진 공산주의 철학들이 열정적으로 소비되는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오늘날은 매우 과격한 공산주의 철학자도 대학에서 스타 취급을 받으며 대중 강연을 하고 언론의 주목을 받지만 정작 이 급진주의 사상을 운동의 힘으로 전화시키려는 활동들은 거의 부재하거나 냉소적으로 취급받는 시대이다.

    운동진영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소수화 된 것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운동진영의 한 흐름으로 평가받고 있는 평등파들은 대부분 사민주의자들이다. 사민주의는 오늘날 사회운동의 주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사민주의 내부에서도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지만 이 사상에 관심을 두는 대부분의 이론가, 활동가들은 사회주의로의 체제 전환은 더 이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회운동의 힘이 매우 미약하다는 것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가 곧 전체주의 체제라는 관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제대로 고쳐 쓰면 사회주의로 가는 것보다 인민들에게 더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사민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시대를 향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돌직구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마르크스가 왜 옳았는가]』(도서출판 길, 테리 이글턴: 이하 『마르크스』)는 매우 적절한 시기에 출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는 마르크스주의의 죽음, 역사의 종언, 각종 포스트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서 포스트식민주의까지)의 범람 이후 다시 도래한 ‘자본주의의 폐허’와 마주한 시대이기 때문이다.『마르크스』는, 마르크스가 예언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를 망각하는 시대를 향해 던진 돌직구 같은 책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에 대한 현대적인 방어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양 있는 지식인들, 대학생들은 역사유물론을 읽지 않는다. 더불어 진보적 교양인들이 알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사상은 사회의 모든 문제는 경제로 환원되고, 노동자계급이란 역사의 주체이며,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도래한다는 식이다. 오늘날 식자층에게 마르크스주의는 구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지식인들, 진보적 교양인들이 지니고 있는 통념에 맞서서 ‘역사유물론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조야한 이론이 아님’을 논증하는 책이다. 더불어 문학전공자의 화려한 말주변, 유머와 재치를 동원하여 마르크스주의에 덧씌워져 있는 오해들을 한 꺼풀씩 벗겨낸다.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라는 제목은 언뜻 보기에 교조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의 항변처럼 들린다. 그러나 테리 이글턴이 마르크스를 무작정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캘리니코스 썼던 것처럼 ‘정통 맑시즘과 어긋나는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무엇이 진실에 가깝게 보이는가를 밝히는 것’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켈리니코스,『역사와 행위』, 교보문고, 25쪽)

    이글턴은 “마르크스의 제자들은 그의 작업에서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에서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성찰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현대화시키는 데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마르크스』가 제기하는 주요 쟁점들을 몇 가지 주제로 재구성하여 ‘역사유물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간략하게 답하는 것이다. 필자는 유물론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더불어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결정론이라는 비판에 대해 논한다. 필자는 마르크스주의 경제적인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야말로 경제적인 것을 초월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힐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노동자운동과 사회운동의 의미를 살펴본다. 오늘날 노동자운동만큼 대중운동으로서 신뢰를 잃은 운동이 없다. 더불어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계급의 중요성을 논하는 마르크스주의는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필자는 그런 비판이 상당부분 타당한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운동은 여전히 사회운동의 중요한 축임을 주장할 것이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룩하고자 하는 새로운 세계는 어떤 특징을 지녔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사회주의란 여전히 우리가 추구하는 매우 ‘현실적인 유토피아’라는 점을 밝힐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면서 필요하다면 다른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 연구서들도 활용했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그들이다.)

    왜 마르크스가

    2. 철학에 반하는 철학

    마르크스에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무엇보다도 실제적이고, 물질적이며, 육체적인 존재이다.”(『마르크스』, 124쪽)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가 핵심적으로 보이고자 한 것이 바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우선 누군가는 ‘생산’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간 개인이든 사회 전체이든 우선 재생산 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경제적 생산과 성적 생산이 보장되어야 한다. 의식은 육체의 효과이지만 육체를 초월한다. 그러나 의식 그 자체는 신체의 재생산을 토대로 한다. 이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기초적인 사실이다. 별반 새로울 거도 없다.

    신체가 재생산되기 위해서 인간은 노동을 한다.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이 생존을 위한 노동을 포이에시스(poiesis: 생산)라고 했는데, 이는 ‘노예의 삶’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자유인의 삶 그러니까 예술을 사랑하고, 공동체의 삶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창조적 행동을 하는 실천을 프락시스(praxis: 자유의 실천이라고 하자)라고 했다.(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문화과학사 67쪽: 이하 『철학』) 시민적 주체의 삶을 프락시스(실천)라고 표현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둘을 결합시켰다. 생존을 위해 노동하는 인간은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시민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입장이었다. 결핍이라는 조건에 노출된 이 생물학적 존재는 노동을 통해, 노동하는 과정에서 맺어진 사회적 관계를 통해 자연을 변형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며 자기 스스로도 변화한다. “우리가 문화나 역사나 문명으로 알고 있는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요구를 갖는 인간의 육체와 그 물질적 조건이 놓여 있는 것이다.”(『마르크스』, 132쪽).

    이런 물질적 조건으로 인해 인간은 사유할 수 있고 정신적인 활동을 할 수 있으며, 그런 정신적인 활동을 통해 인간은 다시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이성, 자유, 특정한 앎의 형태는 노동하는 인민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실천은 이제 생산적인 활동이자 곧장 변혁의 원천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마르크스』, 136쪽) 노동은 노예의 삶이 아니라 자유인의 삶이며, 노동하는 존재는 또한 세계를 변화시키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보여준 철학혁명의 실체이다.

    마르크스는 직접적 생산자를 억압하는 사회적 관계로 인해 노동하는 인간들의 자율적인 실천은 제약되고, 배제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억압적 사회관계를 철폐하게 되면 노동하는 인간들의 창의성은 더울 발현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해방된 세계에서 노동은 창조성의 실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는 노동이 강압적인 생산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능동적인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에 대한 자율적인 통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마르크스』, 122쪽)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해방의 의미이다. 이 말은 아무리 유토피아처럼 들릴지라도 이 모두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꿈꾸는 것이다.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우리 모두는 자아의 실현을 꿈꾸는 존재가 되지 않았는가?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것이 바로 ‘자아실현’이다. 마르크스는 다만 모든 인간이 자아실현의 주체가 되려면 억압과 착취에 의존하는 사회체제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제기한 것일 뿐이다.

    과거의 철학자들은 존재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 이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진리에 어떻게 도달하는가를 중심으로 철학을 작업했다. 그들은 생산, 노동, 인민의 삶을 배제하고, 자유롭게 사유하는 시민의 삶을 노래했다.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신체가 제거당한 고립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다루었던 것이다.(『마르크스』, 126쪽)

    마르크스는 달랐다. 그는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 노동하는 인간, 생산과정에 맺는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철학을 했다. 그는 사변철학이라고 불렀던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을 벗어나서 신체적 존재이자 노동하는 존재로서 인간으로부터 출발함으로써 여타의 철학과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는 전통적인 철학의 외부에서 작업함으로써 철학의 의미 자체를 바꾼다. 에티엔 발리바르는 이를 철학에 반하는 철학이라 하여 마르크스를 ‘반철학의 철학자’라고 불렀다.(『철학』, 40쪽)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에 대한 최악의 오해는 그가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이다. 반면 전통적인 철학자들은 인간다운 인간이란 진리, 예술, 즐거움, 쾌락, 행복, 우정, 정신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존재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물질적인 존재, 속물적인 존재로 여겼던 반면 전통철학은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적인 철학이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우월하다는 통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결코 인간을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존재라고 묘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창조적 행위로서의 예술, 우정의 공동체, 정신적 풍요”를 누구보다 중시했다.(『마르크스』, 119쪽)

    마르크스가 독특한 점은 지배계급이 향유하는 고결한 정신적 가치는 피지배계급의 노동을 통해 물질적 삶의 조건이 보장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 점에 있다. 마르크스는 ‘정신의 고결함의 조건’이 바로 물질적 삶이었고, 그런 물질적 삶의 조건을 생산하는 피억압자들도 그들이 억압적인 사회적 조건에서 해방만 된다면, 누구보다도 더 창조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언어에도 주목한다. 인간은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공동체 속에 존재하면, 그 공동체의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조건이 바로 언어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교통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표(음성과 문자)라는 물질성을 지니는 언어는 공동체 내의 “공유된 의미의 유산”으로서,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임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표이다.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라는 물질적 수단”이 존재하지 않으면 구체화될 수 없다.(『마르크스』, 134쪽) 언어가 물질적인 것이라는 것은, 언어의 문자성은 그 자체로 의식의 조건이지 의식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공동체의 유산이면서, 그 정신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인간을 물질만 숭배하는 존재로 보았다거나 의식은 모두 물질로 환원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주목한 것은 의식, 정신 활동, 창조적인 것들은 모두 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 존재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신체, 노동(생산), 언어를 물질적인 것으로 보았다.(『마르크스』, 135쪽)

    의식의 조건이되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노동이나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주목했던 신체의 육동(욕망과 무의식)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주목함으로써 의식적 존재, 이성적 존재에 주목해 온 전통철학을 전복한다. 니체는 신체로부터 권력에의 의지를 끌어냄으로써 도덕, 정신적 가치, 예술적 고결함 뒤에 숨겨진 ‘추함’을 발견했다.

    신체, 언어, 욕망, 노동은 모두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되 의식의 조건을 이루는 점에서 물질적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유물론을 주장했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인간을 물질로 환원했다는 것으로 왜곡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의식의 조건을 사고하지 못한 채 의식적인 것, 정신적인 것의 중요성만을 떠드는 것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기만이라는 것이 마르크스 유물론의 핵심인 것이다.

    3. 체계적 카오스의 시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핵심적 비판 가운데 하나는 마르크스주의가 경제결정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경제결정론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갈래다. 정치학에서는, 정치, 사회, 문화가 경제적인 것으로부터 독립적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론은 경제에 의해 정치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에서는 현대 사회의 갈등, 적대는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는데,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인 것만을 본질적인 적대로 사고하고 다른 것들은 주변적인 것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한다. 역사학에서는 마르크스주의가 생산력의 발전이 역사 변화의 핵심적인 동력이라고 본 점에서 경제결정론이라고 비판한다.

    역사학의 비판부터 답변을 시작하자.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서문에서 저 유명한 표현,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라는 것을 언급한다. 생산관계는 직접적 생산자와 생산수단 소유자가 맺는 사회적 관계이다. 이는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관계가 아니라 개인 행위자들이 이미 존재하는 구조 속에 편입된다는 의미에서 사회적관계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발전에 조응하는 관계’라고 표현함으로써 생산력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것처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고대나 봉건제에 대한 연구에서 이미 밝혀졌듯이 생산력 자체가 생산관계를 규정한다는 사고는 옳지 않다. 생산력이 발전이 사회발전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것만을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말할 수 없다.(『마르크스』, 49쪽)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관계, 특정한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조건을 규정한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생산력의 발전을 추동하는 것이지 생산력의 발전이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 자신의 입장과 달리 “생산력을 개선하려는 추동은 역사의 일반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에 한정된 요구”라고 본다.(『마르크스』, 47쪽)

    생산력주의를 현대적으로 정당화시키려고 했던 코헨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역사유물론의 현대적 해석에서 생산력이 역사의 추동력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론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옳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합의점이다.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다고 해서 사회적 변혁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은 지속적으로 발전하지만 불평등한 사회체제는 지속될 수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 하에서는 지속적인 경쟁으로 인해 생산력이 발전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이것이 사회주의를 낳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 카오스를 낳을 공산이 훨씬 크다. 체계적 카오스란 자본주의의 위기가 구조적으로 심화되어 지속되지만 새로운 대안은 출현하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다. 경제는 붕괴하고 고통은 지속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 공멸하는 세상이다.(『마르크스』, 54쪽) 미래는 결정된 것이 아니다. 주체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것의 운명은 결정된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생산력의 발전이 중요하다면 그것이 바로 해방의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이다. 공산주의 하에서 노동시간을 축소하고,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정 정도 이상의 생산력은 갖춰야 한다.(『마르크스』, 62쪽)

    민주주의의 부재와 저발전 국가에서의 사회변혁은 늘 우울한 결과만을 가져왔다. 빈곤한 상태에서도 공산주의는 가능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사회적 부를 독점하는 억압적 권력의 출현 조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풍요는 공산주의를 위한 충분조건도 아니고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지만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넘어서는 정도의 생산력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는 것만은 동의할 수 있다.

    ‘현존했던 사회주의’가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체제보다 더 퇴행적이었던 이유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대부분의 국가들은, 생산력이 저발전 된 상태에 있었고 자본주의 제국의 경제적 사보타지에 의해 고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역사가 부재한 상태에서 사회주의로 곧장 이행했기 때문이다.(『마르크스』, 28쪽)

    이 모든 조건들을 고려했을 때 생산력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자. <계속>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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