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백혈병 항소심,
    배운 대로 이야기합니다
    [삼성반도체 2심 판결] 증명책임의 소재 바로잡아야
        2014년 09월 01일 04:33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최근 고등법원에서 삼성반도체 백혈병이 산업재해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2011년 1심 재판 이후 3년만의 판결이다. 삼성 백혈병과 직업병 문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부각되었지만 여전히 정부의 태도는 안이하고 무능하다. 여전히 삼성은 자신들의 잘못과 책임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서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업병으로 투병하거나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이에 삼성 직업병 피해자와 가족 등의 기고글을 연속 게재할 예정이다. <편집자>
    ——————

    * 삼성 직업병 2심 판결 관련 앞의 기고 글 링크

    “업무와 재해발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이 경우 근로자의 업무와 질병 또는 위 질병에 따른 사망 간의 인과관계에 관하여는 이를 주장하는 근로자 측에서 입증하여야 합니다. (중략) 저희 재판부는 이와 같은 대법원 판례에 입각하여 이 사건을 판단하였습니다.”

    2014년 8월 21일 서울고등법원 제1별관 311호 법정, 판결 이유를 간략히 요약 작성해 온 재판장은 판결 선고를 위와 같은 말로 시작했고, 저는 거기서 이미 반쯤 포기했습니다. 역시나, 재판장이 그 뒤에 선고한 항소심 판결의 주문은 1심 판결의 결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항소심이 故 황유미, 이숙영 님에 대해서 승소 취지의 판결을 유지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나머지 故 황민웅 님, 김은경 님, 송창호 님의 사망 또는 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본인의 승소에도 마냥 기뻐하시지 못하던 황상기 아버님(故 황유미 님의 아버님)과 패소의 슬픔을 안고 나가시던 정애정 님(故 황민웅 님의 아내)의 뒷모습이 아프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항소심 판결이 따라간 대법원 판례 법리가 저는 참 아쉽습니다.

    인과관계에 대한 증명 책임을 노동자에게 부과하는 것이 산재보험제도의 취지에 맞습니까?

    우리가 이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미 병들어 퇴사한 노동자가 자신의 병의 증거를 회사에서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회사는 관련 자료를 내놓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근로복지공단의 역학조사를 거친다고는 하지만, 이미 시간이 지나 라인 자체를 다 뜯어버렸거나, 깨끗이 청소해놓은 상태에서 받은 역학조사 결과에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무슨 병인지도 모를 희귀질병이나, 왜 그런 병이 생기는지 의사들도 제대로 모르는 병에 걸린 노동자에게, ‘당신의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의학적 인과관계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사실상 보상을 안 해주겠다는 말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물질이 쓰였는지를 알아야 왜 병이 걸렸는지를 증명하지 않겠냐고 하면 삼성은 영업비밀이라며 막무가내이고, 우리 법 제도는 그 막무가내 앞에 너무도 무기력합니다.

    현행 법제도 상으로는 회사가 영업비밀이라고 버티면 근로복지공단도, 법원도,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아무리 인과관계 증명의 정도를 완화하여 인과관계가 명백히 증명되지 않고 ‘추단’만 되어도 괜찮다고 선심을 써본들 그건 그저 말뿐인 ‘선심’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상황이 이러한데도 인과관계에 대한 증명책임을 노동자에게 부과하는 것이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한다는” 산재보험제도의 취지에 맞습니까?

    삼성반도체 산재

    법은 바뀌었는데 왜 판례는 그대로인가요? 소송법 원리는 왜 산재보험만 비켜가나요?

    이래서 증명책임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증명의 정도를 완화시켜주는 것만으로는 산재보험제도의 취지를 도저히 달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 증명책임이란 어떤 사실이 있는지 없는지 진위불명의 상태에 빠졌을 때 누가 소송에서 지는지를 정하는 것입니다.

    근로자에게 증명책임이 있다는 것은, 근로자가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하면 근로복지공단(산재소송은 근로복지공단에 보험급여를 해달라는 취지의 행정소송이므로 근로자의 상대방(피고)은 근로복지공단이고, 사용자(회사)는 ‘피고보조참가인’으로 소송에 참여합니다)이 가만히 있어도 근로자가 진다는 것이지요.

    2007년 전부 개정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제37조 제1항은 “다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식으로 기존에 없던 인과관계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 넣었습니다.

    소송법상 증명책임 분배의 기본원칙인 소위 ‘법률요건분류설’에 따르면, 법 문언상 단서에(예를 들면 “다만” 뒤에) 규정되어 있는 것은 그 법률 규정에 의한 효과를 저지하려는 자에 의해 증명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즉, 산재보험법 제37조 제1항의 경우 ‘인과관계가 없으면 그렇지 않다’는 취지의 규정을 단서에 넣고 있으니, 인과관계가 있어서 급여를 받아 갈 근로자가 아니라, 인과관계가 없어서 급여를 안 줘도 됐으면 하는 근로복지공단이 그 인과관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1989년 이래 위 항소심 재판부가 인용한 증명책임의 법리를 20여 년 동안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습니다. 법이 바뀌었는데 판결이 안 바뀌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2007년 개정 전에는 근로자에게 인과관계의 증명책임이 있다고 하는 판례 법리가 맞았다고 하더라도, 2007년 개정 이후에까지 그게 유지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법원은 위 2007년 개정 후에도 여전히 1989년의 판례를 계속 인용할 뿐이고, 학자들은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증명책임이 전환되면 안 된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합니다.

    지금이라도 증명책임이 공단에 있는 것을 분명히 하자고 하면 그건 증명책임을 전환하자는 이야기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신중하지 못하고’ 과격한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지어 법원도 이미 증명책임이 일정 부분 근로복지공단과 사용자 측에 있음을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소위 ‘부비동 암’ 판결(서울고등법원 2009. 12. 2. 선고 2009누8849 판결, 대법원에서도 다뤄져서 상고기각으로 확정된 판결입니다)에서 근로자가 취급물질이 발병 원인으로 될 의학적 가능성, 노출 사실과 원래는 건강했던 사실, 그리고 업무수행 중에 그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만 증명해내면(이번 반올림 사건에 이 법리를 그대로 적용해보면, 이 부분들은 당연히 충분한 증명이 되어 있습니다), 취급물질이 근로자의 발병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나, 업무가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그 질병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거꾸로 근로복지공단과 사용자 측이 증명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즉, 근로복지공단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비로소 보험급여를 안 해준 게 소송에서 정당화된다는 이야기니까, 이게 곧 ‘증명책임의 전환’입니다. 심지어 법원도 인정한 적이 있는 이야기를 ‘신중하지 못하고 과격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요.

    다른 소송법 영역에서는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증명책임 분배의 원리가, 왜 유독 산재보험법에서만 적용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까? 법원도 이미 확인한 법리입니다. 과격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자고, 일반 법원칙을 이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하자고, 그 말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희는 있는 대로 공부하고, 배운 대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희 산소통은 몇 해 전 저희 과의 한 교수님을 통해 삼성 측으로부터 반도체 공정 견학을 제의 받았습니다. 학생들이 너무 ‘한 쪽 입장’만 들었으니 회사 측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는 논의 끝에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저희는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공부했고, 그래서 배운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대법원이 근로복지공단에 증명책임이 있음을 선언하는 것도, 근로복지공단이 ‘신속한 재해보상’을 위해 더 이상의 상고를 하지 않는 것도, ‘법대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저희 생각입니다. 대법원과 근로복지공단보고 그렇게 하라는 것은 결코 ‘과격한 주장’일 수 없습니다. ‘한쪽 편만을 드는’ 주장일 수 없습니다.

    현행 산재보험제도, 문제 많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그 산재보험제도만이라도 지금 있는 법 그대로, 낡은 판례 법리가 아니라 개정된 법 그대로, 적용해달라는 것입니다. 신속한 재해보상을 꾀한다는 산재보험인데, 이 분들은 산재신청으로부터 벌써 8년째 싸우고 있습니다. 항소심만 3년을 했습니다. 이 분들은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근로복지공단은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한다는” 산재보험법의 취지에 따라 원고 승소 부분에 대한 상고를 포기하고, 대법원은 패소 원고 3인에 대한 상고심을 통해 업무와 질병 사이의 증명책임의 소재를 바로잡아 주시길 바랍니다.

    필자소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