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농민운동가의 모범
    [책소개] 『땅의 아들3』(농민운동가 노금노 유고집/ 돌베개)
        2014년 08월 30일 01: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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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난해 농민의 벗, 땅의 아들 노금노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났다. 어려운 농촌을 지키며 농민의 권익 실현을 위해 헌신해온 농민운동 지도자 노금노 동지가 6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업과 식량을 국민과 함께 소중하게 인식하고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해 농업계의 노력이 한층 필요할 때에 동지의 떠남은 너무나 안타깝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노금노 동지는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개인의 이해보다는 사회 모순을 극복하는 데 평생을 다 바쳤다. 이 땅의 모든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문제 해결을 위해 농민을 중심으로 싸워나갔다. 동지는 변혁을 통해 따뜻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최고의 종합 과학자이자 예술인이었다.

    노금노 동지는 농민운동에서 이론가 역할을 했다. ‘크리스챤아카데미’ 농민교육의 1, 2차 과정과 장기전문과정을 거치면서 사회과학 이론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농민운동에 적용했다. 동지는 농민운동의 주체와 조직문제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투쟁과 함께 이론적 토대를 갖춘 동지의 농민운동에 대한 열정은 모든 농민운동가의 모범이었다. 항상 농촌 현장의 이해와 농민의 요구에 바탕을 두고 조사하고 학습하면서 일반 농민들을 교육시키고 조직하고 현장 농민들과 함께 투쟁하는 대중투쟁의 모범적인 운동가였다. 동지의 살신성인의 삶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아 후손들이 본받을 것이다.

    -「여는 글」 중에서

    땅의 아들

    자주적 농민운동의 선구자 노금노 선생의 삶과 정신을 오롯이 담은 유고집

    1980년대 중반,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타오르면서 현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무렵에 한 농민운동가의 수기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땅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두 권짜리 책으로 주인공은 당시 농민운동의 일선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고 노금노 선생이었다. 이 책은 대학생들이 농촌으로 투신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던 당대 필독서였다.

    그는 1949년에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평생을 땅과 더불어 살면서 마을 이장 역할을 하던 중 1974년 사촌형의 권유로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실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농협에서 강제한 출자금을 당연시하던 그는 분반토론 교육을 이끌던 이우재 선생으로부터 ‘당신같이 병신 같은 이장이 있어 농촌이 요 모양 요 꼴’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비난을 들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의 인식 부족 탓으로 이 나라 농민들이 못사는 것만 같은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게 된 그는 이후 농업·농촌·농민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농업·농민문제는 어느 한 지역이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모순이 집약된 가장 절실하고도 뿌리 깊은 국가적 문제라는 인식하에 그는 1970년대 가장 인상적인 농민운동이자 일제시대 암태도 소작쟁의(1923~24년) 이후 농민의 최대 승리라는 평가를 받는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1976년 11월부터 1978년 5월까지 장기간 이어진 이 투쟁을 통해 관료적 부패와 행정에 의한 농민들의 피해를 보상받는 데 성공한 것에 이어 이후에도 굵직굵직한 투쟁들을 주도하여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는 한편 크리스챤아카데미사건, 남민전사건 등으로 큰 고초를 겪기도 하고 광주항쟁 당시 이 사태를 최초로 외부에 알리는 등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을 온몸으로 살아낸 장본인이 바로 노금노 선생이다.

    1980년대에는 자주적 농민운동의 개척자로, 1990년대에는 농민운동 정치세력화의 선구자로 활동한 그는 1990년 영광·함평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 농민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시 깃발만 꽂으면 당선은 떼놓은 당상이었던 평민당의 드높은 아성에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나 마침내 1995년 제2대 기초의회 선거에서 무소속 농민후보로 당선되어 함평군의회 의원으로서 주민의 인간다운 삶과 진정한 지방자치 실현에 온힘을 쏟았다.

    치밀한 기록 보관자로서 주요 활동 과정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남기는 한편 농민운동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분석, 수십 년 전에 일어난 정파 간 대립과 논쟁점 등에 대해 놀라운 기억력과 통찰을 보여준 노금노 선생은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수준 높은 정책적 이론가의 역할도 충실히 해낸 인물이다.

    튼튼한 이론과 투철한 투쟁의지를 한데 어우른 그는 유고집 간행위원회 위원장인 이우재 선생의 표현대로 “변혁을 통해 따뜻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려는 최고의 종합 과학자이자 예술인”이었다.

    평생을 농민의 벗으로 살아온 노금노 선생은 농민운동사 정리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았으나 60대 초반 1년여 간 암 투병생활을 한 끝에 안타깝게도 2012년 8월 29일 63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책 『땅의 아들 3』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민중 중심의 자주적·민주적 삶을 위해 헌신해온 그의 유지를 따르고자 1주기 추모식에 모인 이들이 뜻을 모아 그동안 선생이 남겨놓은 많은 자료를 취합·선택해 펴낸 것으로 그의 농촌·농민 사랑이 오롯이 배어 있다.

    이 유고집은 2007년의 인터뷰 자료(1부 구술 자료), 농민권익투쟁 현장(2부), 농민운동의 과제와 방향(3부), 함평지역 농민운동사(4부), 농민의 정치세력화(5부), 언론 게재 칼럼(6부) 등 전체 여섯 개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부_ 땅의 아들이 말하는 ‘농민운동의 한길을 걸어오며’(구술 자료)

    노금노 선생의 성장과정과 당시 시대상을 비롯해 농민운동가로서의 ‘생애사’라 할 정도로 1970년대에서 1990년대, 2000년대 초까지 선생의 활동사와 관련 운동사가 잘 담겨 있다. 마치 고인이 완성하려던 농민운동사의 대강을 보는 듯 구수한 입말로 풀어낸 매우 구체적인 설명이 생생한 현장감과 인간미를 물씬 느끼게 한다. 선생이 평소에 가진 문제의식들이 운동현장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운동과정에서 겪은 주요 성과와 각종 고초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등이 잘 서술되어 있으며 5·18광주민주항쟁에 대한 부분도 비중 있게 다뤄진다.

    2부_ 농민권익투쟁의 현장에서

    1980년대 초반의 신협과 농협 민주화 관련 논의, 80년대 후반의 농가부채문제, 생산조정과 농민조직의 역할, 과중한 농촌 의료보험료 개혁을 위한 투쟁, 추곡 수매가 요구 등 당면 과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이 담겨 있다. 1984년에 전개된 농민들의 농협 조합장 직선제 서명운동, 1983년에 전국 최초로 실시된 농가부채 실태조사를 비롯해 함평군 농민위원회가 주도한 투쟁이 상세히 소개되어 있다.

    3부_ 농민운동의 과제와 방향

    1970년대 한국 농민운동의 성장과 한계에 대해 고찰하고 1988년부터 시작된 농민운동조직 통일과 전농 결성의 과정이 집약되어 있다. 그는 농민운동의 최전선에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전국단일조직이 시급함을 역설했으며, 마침내 1989년 4월 24일 ‘전농’(전국농민협회)이 출범하기까지 준비위원회 사무처장으로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70~80년대 농민운동을 70년대(농민운동의 형성과 준법투쟁기), 80~82년(70년대 농민운동의 반성과 평가), 82~84년(자주적 농민운동의 모색기), 85~87년(자주적 농민운동의 형성기), 88년 이후(자주적 농민운동의 정착 시기)로 시기를 구분하고 각 시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4부_ 함평지역 농민운동사

    함평은 노금노 선생을 대표로 하는 선진활동가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지속되어온 곳으로 선생이 철저하게 자신이 살고 있는 함평지역 농민의 역량 발전에 근거해 자주적 농민운동을 건설해왔음을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준다.

    1970년대 농민운동의 최대 투쟁 사례였던 ‘함평고구마사건’, 농민운동의 정치투쟁성 강화와 대중성 확보를 위해 전국에서 최초로 시도된 ‘함평·무안 농민대회’, 85년 4월 1일 자주적 농민운동조직인 ‘함평농우회’ 결성, 86년 5월 17일 ‘학살정권 타도 함평농민대회’ 개최, 87년 ‘전농’ 결성의 주도적인 역할, 90년 4월 2일 지역 내 가농·기농·농우회를 통합한 ‘함평군농민회’ 창립 등 농민적 성격과 방법이 주도하는 농민운동을 정착시키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이 집약되어 있는 함평지역이야말로 농민운동사의 꽃이라 할 수 있다.

    5부_ 농민 정치세력화의 일선에서

    “80년대가 변혁운동으로서의 농민운동 시대였다면 90년대의 농민운동은 정치적 농민운동으로 발전해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노금노 선생이 90년대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농민 정치세력화의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당시 민자당을 미국 독점자본과 국내 독점재벌 등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충실히 보호하는 반공보수집단, 평민당을 지역당의 한계를 가지고 독재에 반대하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민자당과 별 차이 없는 자유주의적 보수세력으로 규정하고, 농민의 정치세력화와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민중의 통일된 당 건설이 필요함을 강력하게 역설했다.

    1990년 김대중 평민당 대표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영광·함평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 농민후보로 출마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뚝심 있는 농민운동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으며, 1995년에 치른 제2대 함평 군의원 선거과정 또한 매우 상세히 그려져 있다.

    6부_ 칼럼을 통해 본 노금노의 농업·농촌·농민 사랑

    2000년대 후반에 『서남권신문』과 『노령신문』을 통해 서민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정치의 필요성과 농업보호·식량주권을 강조한 칼럼들이 실려 있다.

    ‘자주적 농민운동의 건설자’였던 선생의 정확한 사태 진단과 깊이 있는 대안들은 외국 농축수산물 수입개방 확대와 농업소외정책의 심화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 농업과 농민 회생책 마련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는 농민운동 참여자들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선생이 활발히 운동을 펼치던 1989년에 37%였던 식량자급률이 20%대로 현저히 떨어진 데다 그가 그토록 우려했던 쌀 시장개방을 목전에 두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정치권은 물론 온 국민이 선생의 성찰과 당부에 귀 기울어야 할 것이다.

    ▶ 노금노의 삶

    1949년 전남 함평군에서 태어났으며 고대 노동문제연구소 교육, 가톨릭농민회 교육, 크리스챤아카데미 교육 등을 통해 농민문제를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면서 농민운동가의 삶을 시작했다. 1975년 가톨릭농민회 외대화 분회를 결성, 농협 강제출자 거부운동을 주도해 성공리에 해결했다. 1976년 11월부터 1978년까지 치열하게 전개한 함평고구마 피해보상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농민운동의 대중적 복원과 질적 발전에 기여했다.

    1978년부터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총무를 역임했으며 1979년 크리스챤아카데미사건으로 연행되어 조사받고 남민전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다. 1979년 10월에는 정부가 보급한 불량종자 노풍벼에 대한 피해보상운동을 주도해 마침내 그해 보상 해결을 성취함으로써 유신독재 말기의 용공조작과 탄압으로 침체되었던 농민운동의 대중적 고양에 기여했다.

    1980년에는 ‘민주농정 실현을 위한 전국농민대회’를 주도했으며 1984년 ‘함평·무안 농민대회’를 조직하여 자주적 농민운동을 위한 현장 주도적 대중투쟁의 길을 열었다. 그 후 1985년 ‘함평농우회’ 결성으로 자주적 농민대중조직의 전국적 확산을 이끌어냈다. 1987년 전국농민협회 초대 사무처장, 1989년 전국농민회총연맹 준비위원회 사무처장, 1989년 11월 ‘쌀값보장 전량수매쟁취 전국농민대회’의 실무책임자 등을 성공리에 수행하고, 마침내 1990년 4월 24일 그의 평생 과업이었던 자주적·대중적 농민운동의 전국 단일대오 전국농민회총연맹 창립에 실무 산파역을 맡는다.

    1990년 함평 영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무소속 농민후보로 출마한 바 있고 1995년에는 함평군의회 제2대 의원에 무소속 농민후보로 당선되었다.

    저서로는 『땅의 아들 ― 어느 농민운동가의 수기』 1, 2가 있으며 2012년 8월 29일 향년 63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2013년 ‘농촌운동가’ 매헌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매헌농민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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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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