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리스모 오페라,
    고상하고 먼 예술 장르 아니다
    [클래식 음악 이야기] 잔 카를로 메노티(1911년~2007년)
        2014년 08월 29일 02: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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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말. 말.

    “작곡가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느끼는 주제라면 그 어떤 주제도 오페라에 적합하다.”

    내 집 소파에 앉아 오페라를 감상할 수 없을까? 이런 열망을 실현한 것이 텔레비전 오페라이다.

    일반 오페라 극장에서는 각 관람객의 눈이 카메라 눈이 되어 오페라를 관람한다. 그러나 이들의 눈이 동시에 같은 장소나 등장인물들에 집중한다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극 중 주인공이 아리아를 열창할 때 관람석에 앉아 있는 이들은 주변의 무대장치, 엑스트라들의 행동, 또는 옆 관객의 반응 등을 엿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런 산만함을 극복하고 오페라 하우스를 찾기 어려운 일반 대중들에게 오페라 감상 기회를 제공한 것이 텔레비전 오페라이다. 텔레비전 프로듀서는 안방에서 누구나 오페라를 즐길 수 있도록 중요한 장면들을 편집하여 내보낸다.

    텔레비전 오페라가 오페라 대중화에 기여한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편집을 거친 텔레비전 오페라는 카메라 클로즈업으로 시청자의 관심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오페라 장르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분장과 표정 및 과장된 몸짓, 거추장스러운 무대의상 등에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시청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한 것이 바로 ‘스튜디오용’ 텔레비전 오페라이다. 즉, 작곡가가 무대가 아닌 방송국 스튜디오용으로 만든 오페라이다.

    몇 개의 카메라로 모든 오페라 장면을 잡아내는 텔레비전 오페라는 프로듀서나 감독, 그리고 카메라맨의 결정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지 때문에 전통 오페라에서의 자유를 시청자들은 누리지 못한다.

    이러한 스크린을 통해 방영되는 오페라는 순간적으로 하나의 영상에서 다른 영상으로 바꾸는 ‘컷cut’으로 이뤄지며 이러한 컷들이 모여 전체 작품을 형성하게 된다. 적절한 순간의 컷팅은 서로 인접해 있는 두 개 샷의 성격과 프로덕션의 타이밍과 리듬에 달려 있다. 시청자들은 특정 아리아와 카메라 눈의 움직임, 그리고 극이라는 삼박자로 인하여 오페라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다.

    스튜디오용 텔레비전 오페라의 성패는 시청률에 좌우된다. 만약 오페라가 재미없다면 시청자는 곧바로 리모콘으로 채널을 돌려 버릴 것이다. 오페라 극장에서는 감상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반면, 텔레비전 오페라 감상에는 예기치 않는, 집중력을 빼앗아가는 여러 제반 요소들(전화벨 소리, 애기 우는 소리 등)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감독이자 프로듀서인 루돌프 까르띠에Rudolph Cartier(1904~1994)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감안할 때 텔레비전 오페라는 2시간을 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텔레비전 오페라와 스테이지(무대) 오페라는 내용 면에서도 다르다. 텔레비전 오페라는 안방에서 감상하기 때문에 그 내용도 일상의 현실적인 삶을 가져다 쓴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정치적 소재와 주제 문제(뉴스, 오락, 드라마 등)들을 다룸으로써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낸다. 이렇게 내용상 공감대를 형성하면 채널을 쉽게 돌리지 않고, 그렇게 되면 시청률을 높일 수가 있다.

    이러한 현실적인 소재와 음악 요소를 도입한 오페라가 낭만시대 이태리 문학에 나타난 자연주의 영향을 받은 오페라로 ‘베리스모Verismo’ 오페라라고 부른다.(‘Veri’는 ‘진실’이라는 뜻) 이 작품들은 낭만적 성향과 대립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회 비평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 예로는 마스카니Pietro Mascagni(1863-1945)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1890), 레온카발로Ruggero Leoncavalo(1857-1919)의 <팔리아치 I Pagliacci> (1892), 푸치니의 <토스카 Tosca> (1900)가 있다.

    시청자의 집중 한계 시간인 2시간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실적 소재를 다룬 오페라를 거실로 끌어들인 현대 오페라 작곡가가 있다.

    바로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 작곡가 잔 카를로 메노티(Gian Carlo Menotti, 1911-2007)다. 그의 오페라는 한두 시간 정도로 짧은 구성으로 그 속에 드라마와 유머, 그리고 풍자적 정서를 깔고 있다.

    메노티

    잔 카를로 메노티(Gian Carlo Menotti, 1911년~2007년)

    특히 대도시 빈민가의 불우한 시민들의 황폐한 삶과 현대인들이 겪는 내면적 갈등과 가족관계를 주로 그린다. 즉, 소시민이나 하층민들이 겪는 문제와 우리 주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간적인 냄새가 가득한 이야기들, 그리고 질투심과 사악함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페라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다.

    <무당The Medium>(1946), <전화The Telephone>(1946), <영사The Consul>(1950) 등 메노티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오페라의 제목만 봐도 그 어떤 낭만적인 향수도 찾아볼 수 없다.

    오페라〈무당>은 남을 기만하려는 자신의 목소리에 희생되어 가는 2막의 비극 오페라이다. 딸과 벙어리 애인을 동원해 신들린 듯 속여 돈을 벌려던 무당이 결국 자기 속임수에 쫓겨 살인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전화>는 단막 희가극으로 당시 사회적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였으며, 작품 안에서 전화기는 사건을 발생시켜 극을 전개해 나가는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인간의 대화에 단절을 초래하는 방해자로 묘사된다. 전화기로 인해 벌어지는 일상적인 사건을 오페라의 소재로 다룬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영사>는 3막의 비극 오페라로서 전체주의의 지배하에 피해 받는 서민들의 단면을 그린 동서냉전의 암울한 여파에 희생되는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다.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힌 남편과 함께 국외로 탈출하기 위해 비자를 받으려는 한 여인의 노력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간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다.

    메노티가 우울한 소재만 다룬 것은 아니다. 메노티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헤로니무스 보쉬Hieronymus Bosch(1450-1516)가 그린 세 명의 왕이 마리아에 안긴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그림(<The Adoration of the Magi>)을 보고 영감을 얻어 대본을 썼다. 바로 헤롯왕 때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3인의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줄거리를 내용으로 한 <아말과 밤에 찾아온 손님Amahl and the Night Visitors>(1951)이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시즌 때마다 전 세계적으로 방영되고 있는 이 텔레비전 오페라의 주인공은 소년 아말Amahl이며, 오페라 전체가 이 소년의 눈높이로 진행된다. 이 작품은 NBC 방송국의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의 청탁을 받고 쓴 단막 텔레비전 오페라로서, 1951년 12월 24일 저녁 9시 30분 NBC 텔레비전 오페라 극장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계로 첫 방영이 되었다.

    이외에도 메노티는 <마리아 골로빈Maria Golovin>NBC(1959), <미로The Labyrinth>NBC (1963) 등의 텔레비전 오페라를 썼다. 그는 라 스칼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슈타츠오퍼 등 세계 굴지의 극장에서 오페라 연출가로서 그리고 자신의 오페라 뿐만 아니라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을 써 준 대본가로도 유명하다.

    메노티는 텔레비전 오페라 외에 라디오를 위한 오페라 작품도 썼다. 단막 라디오 코믹 오페라인 <노처녀와 도둑The Old Maid and the Thief>(1939년 4월 22일 NBC 라디오 초연)은 라디오방송용으로 작곡된 역사상 최초의 오페라이자 사회상을 풍자하는 오페라이다. 탈옥수인 미남 청년과 두 노처녀 사이의 사랑과 갈등을 묘사하면서 현대인이 겪는 일상의 무료함을 풍자한다.

    텔레비전 오페라와 라디오 오페라의 등장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무대 오페라 <빌리버드Billy Budd>(1924), <피터 그라임스Peter Grimes>(1941), <나사의 회전The Turn of the Screw>(1954), <엘버트 헤링Albert Herring>(1947)을 작곡한 20세기 영국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1913-1976) 역시 <오웬 윈그레이브Owen Wingrave>(1971)라는 텔레비전 실내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젊은이의 반전사상을 표현한 이 작품은, BBC 채널을 통해 첫 전파를 탄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방영되고 있다.(1974, 1995, 1997, 2007, 2010년)

    사실 라디오 오페라는 텔레비전 오페라보다 훨씬 전에 생겨났다. 보후스라프 마티누Bohuslav Marinů(1890-1959)의 <숲의 소리Hlas Iesa>(1935, Czch Radio), 이탈리아 작곡가 루이지 달라피콜라Luigi Dallapiccola(1904-1975)의 <죄수 Il prigioniero>(1949, RAI), 독일 작곡가 한스 헨체Hans Werner Henze(1926-2012)의 <시골의사Ein Landarzt>(1951, Nordwestdeutscher Rundfunk), 프랑스 작곡가 제르멘 타유페르Germaine Tailleferre(1892-1983)의 <주인Le Maitre>(1959, Radio France), 영국 작곡가 로버트 색스턴Robert Saxton(1953- )의 <방랑하는 유대인The Wandering Jew>(2010, BBC Radio) 등이 이 새로운 현대 장르의 맥락을 잇고 있다.

    텔레비전 오페라를 위한 상(Der Salzburger Opernpreis)이 따로 있을 정도로 유럽 국가들의 텔레비전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만이 수상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Der Salzburger Opernpreis의 수상작을 간추려 보면 파울 앙게러Paul Angerer(1927- )의 <여권통제Die Passkontrolle>(1959, 오스트리아), 요시로 이리노Yoshiro Irino(1921-1980)의 <다마스크 드럼The Damask Drum>(1962, 일본), 하인리히 주터마이스터Heinrich Sutermeister(1910-1995)의 <캔터빌의 유령Ghost of Canterville>(1965, 독일), 잉바르 리드홀름Ingvar Lidholm(1921- )의 <네덜란드인Hollandarn>(1968, 스웨덴), 인골프 게볼트Ingolf Gabold(1942- )의 <오르페우스를 위한 7장면 Seven Scenes for Orpheus>(1971, 덴마크), 미치오 마미야(Michio Mamiya,1929- )의 <나쿠라미Nakurami>(1974, 일본), 레이몬드 & 버벌리 패넬Raymond Pannell & Beverly Pannell의 <아버판Aberfan>(1977, 캐나다), 노먼 케이Norman Kay(1929-2001)의 <크리스마스 캐롤A Christmas Carol>(1980, 영국) 등이다. 우리나라에선 김자경 오페라단이 2005년에 메노티의 <전화>를 현대에 맞게 <핸드폰>으로 각색하여 국립극장에 올렸다.

    오페라는 더 이상 먼 나라의 고상한 예술 장르가 아니다. 오페라도 현실 세계, 뉴스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 매체가 될 수 있다. 당대의 이슈를 소재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까지 전달하는 예술적인 작품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성범죄, 정치인 뇌물수수, 관피아, 논문 표절, 뉴스 앵커의 실수, 연예계, 개그콘서트, 청문회, 문화재 방화, UFO 출현, 국제결혼 사기 등 이야기 거리는 너무나 많다.

    진화하는 것은 기술문명만이 아니다. 예술도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로운 옷을 갈아입는다. 21세기에 새롭게 선보이게 될 오페라는, 텔레비전 오페라가 아닌 24시간 휴대하는 손 안에 쏙 들어가는 스마트폰 안에서 아리아를 부르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로봇 이야기가 아닐지.

    필자소개
    한양대 음악대학 기악과와 동대학원 졸업. 미국 이스턴일리노이대 피아노석사, 아이오와대 음악학석사, 위스콘신대 음악이론 철학박사. 한양대 음악연구소 연구원, 청담러닝 뉴미디어 콘테츠 페르소나 연구개발 연구원 역임, 현재 서울대 출강. ‘20세기 작곡가 연구’(공저),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번역),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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