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목 이병린의 슬픔
    [산하의 가전사] 사생활로 사람을 나락으로 내모는 세력들
        2014년 08월 27일 03: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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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 시절 아버지가 ‘법대 가라’는 말을 꽤 오랫 동안 하셨어. “너는 다른 머리는 없어도 암기 머리는 있는 것 같으니 고시에 패스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네 인생이 편하고 대접받으며 살 수 있다.”는 거였지. 그런데 그 몇 분 뒤에는 “제일 썩은 게 검찰이고 변호사는 허가 낸 도둑놈”이라고 일갈하셔서 불초 자식을 당황하게 만드셨던 기억이 나.

    내가 고시에 패스할 수 있으리라는 예측을 제외하면 아버지의 말씀은 모두 일면적인 진실일 것 같다. 5공화국 때 육사와 서울 법대들이 민정당 요직을 차지한다고 육법당이라고 불렀다는데 요즘 주요 정당들은 판검변당이라고 불리워도 별 무리가 없을 거고 어느 영역에서든 고시 패스란 꽤 유력한 ‘출세줄’ 가운데 하나인 건 우리가 다 아니까. 물론 소수의 예외는 있어. 내 친구 긴따꿍이라는 넘처럼.

    뭐 그래도 판검사나 변호사 부러울 일은 없었는데 <긴급출동 SOS 24> 하면서 변호사는 참 부러워지는 경험을 했어. 다른 건 아니고 어쨌건 맘만 있으면 자기 능력을 발휘하여 사람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직업이더라는 거지.

    남편에게 두들겨 맞는 아내를 구할 수도 있고 사면초가에 몰린 사람에게 동앗줄이 되는 법 조항을 찾아낼 수도 있고 억울해서 피눈물 흘리는 사람 등 두드려 주고 그 몫을 위해 대신 싸워 줄 수도 있는 사람들이 변호사라는 직업군이더라는 거지. 물론 “맘이 내키면” 말이지.

    “변호사들은 허가 낸 도둑놈”이라는 험구에도 불구하고, 또 그게 상당 부분 일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에는 그 “맘이 내켜서” 정의의 길로 뛰어들어 어두운 세상의 빛과 썩어가는 누리의 소금이 된 변호사들이 많은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야. 그 가운데 우리는 한 이름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어. 이병린 변호사라는 분이야.

    이병린

    서울지방변호사회관에 있는 이병린의 흉상

    1911년 한의사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 외가는 의병장 유인석과 이어진 집안이었지만 이병린 변호사는 평생 동안 마음의 작은 굴레 하나를 가지고 계셨대.

    그건 우봉 이씨, 이완용의 집안이라는 거였지. 아주 먼 친척이긴 해도 이완용이라는 이름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나쁜 쪽으로 지대했지. 그와 본을 같이했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을 느낄 만큼. 이병린 변호사의 부친도 그 치욕을 못이기신 건지 나라 망한 뒤 술만 먹다가 돌아가셨다고 해.

    그러니 그의 학창 시절은 빈한하기 이를 데 없었지. 일화 하나로는 아래가 다 터진 바지를 입고서 친구한테 돈을 빌리러 갔다가 거절당한 이야기. 오죽하면 그런 바지라도 입고 나가야 했을까만 나 같아도 그런 옷 입고 오면 있던 돈도 치웠을 거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죽어라 공부밖에 할 게 없었지. 일제 시대의 고시 낭인. 1940년 그는 변호사 자격을 얻는다.

    그는 변호사로서 지녀야 할 사회적 책임에 최선을 다했어. 3.15 부정 선거 진상 조사 규명 위원도 역임했고 정도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만큼 철저했지.

    최종고가 쓴 <한국의 법률가> 중 한 대목을 볼까. “1961년 초여름에 그가 귀속재산소청심의위원으로 있을 때 귀속재산 관리권 문제로 다투던 한 목재회사에서 공정히 심의해 주었다는 뜻으로 송이버섯 한 상자를 보내왔다. 그의 사무장이 별 생각없이 받아 두었는데, 이 변호사가 호통치는 바람에 주인을 찾아 돌려주느라고 닷새 동안이나 고생했던 일도 있었다.” 불쌍한 사무장.

    이런 사람 앞에 독재로 치닫는 박정희 정권은 눈의 가시였고 당연히 그도 박정희 정권의 눈동자에 박힌 선인장이 된다. 그는 1964년 6.3 사태 때 일찌감치 구속돼. 비상계엄 해제와 구속자 석방 등을 ‘건의’ 했다가 영장도 없이 구속돼 버린 거야.

    당시 그는 변호사협회 회장이었어. 그러자 100명이 넘는 변호인단이 구성됐는데 이때 박정희 정권은 “건의한 것만 취소해 주면” 풀어 주겠다고 속삭였다는군. 이에 “회장님 어쨌건 나가셔야지요?”라고 안타깝게 말한 변호사는 이병린에게 벼락을 맞아.

    “당신들이 변호사야? 젊은 사람들이 왜 그리 기개가 없어? 나 안 나가! 대법원까지 가서 판결 받아 보겠어!” 이 양반 얼마나 꼬장꼬장한가 하면 계엄 해제 후 석방될 때도 판결 받을 때까지 안나가고 버티다가 “계엄 해제로 자동 석방이니 제발 좀 나가 줍쇼.”하는 말을 듣고야 나오시지.

    박정희 정권과의 악연은 그 뒤로도 유구하게 이어져.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 대표가 됐고 유신 이후에는 김지하 필화 사건 변호에 앞장섰으며 유신 체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민주회복국민회의에도 이름을 올리지. 그야말로 이른바 인권 변호사의 시조격인 인물이고 누구보다 강고하게 법을 무기로 사람들을 잡는 독재에 대해 맞섰던 사람이지. 그런데 이 양반에게 묘한 일이 벌어진다.

    이 대쪽같은 양반이 1975년 1월 글쎄 ‘간통죄’로 구속된 거야. 종로의 한 일식집 마담과 엮여서 말이지. 이때 이병린 변호사는 사별한 상태였다고 하고 여자 또한 남편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해.

    둘이 호텔에 있었을 때 누군가가 들이닥쳐 사진을 찍었는데 (누군가는 아니라 분명 중앙정보부였겠지만) 이병린은 태연하게 여자에게 죄 지은 거 없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포즈까지 취해 주었대. 그런데 사실 여자에게는 별거 상태에 가까운 남편이 있었던 거지. 그리고 이 남편이 누군가에게서 상세한 정보를 받고 간통 혐의로 고발해 버린 거야.

    간통죄로 구속되기 전날 중앙정보부원이 이병린을 찾아왔대. ““거 간통죄로 피소되셨습디다. 허허… 거 참 어르신이 참… 우리도 뭐 망신드리긴 그렇고…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사퇴하는 각서 한 장이면 저희가 고소 사건을 잘 무마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이런 데에서 보통 사람과 위인의 차이가 갈린다고 생각해. 열심히 싸우고 투쟁하고 하는 건 사실 보통 사람들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발밑이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위험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거야. 더구나 여자 문제 같은 자신에게는 중요하지만 밖에서 보기엔 일종의 ‘치부’가 코 앞에 들여대진다면. 하지만 이병린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해.

    “대표위원 사퇴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사표를 내도 왜 정보부에 낸단 말이오.” 그리고 그는 구속된다.

    어디 가나 모텔이 널려 있고 등산길에서도 중년 남녀가 눈 맞는 일이 많다는 요즘에도 누가 여자랑 무슨 관계가 있네 저 여자가 남자관계가 복잡하네 하면 도덕군자들이 돼서 쌍심지 돋우는 사람들이 지천인데 그때야 오죽했겠니. 대쪽 같은 변호사, 의로운 변호사, 민주화 운동의 상징 같은 변호사 이병린의 이름은 구정물을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어.

    풀려나온 뒤로도 그는 민주화운동의 일선에 설 수 없었고 그는 담담히 아무 연고도 없고 변호사로서 제대로 일하기도 힘든 경북 지역으로 일종의 자진 유배를 떠난다. 이때 남긴 시조 한 수.

    “고우(故友)여 태안(泰安)하라 북악(北岳)도 잘 있거라

    남행천리(南行千里) 가는 길에 북풍한설(北風寒雪) 몰아치니

    눈물도 얼을 싸하여 손수건에 담노라.”

    나는 참 아쉽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권력을 이용해서 중앙정보부원을 채홍사로 부리며 “저 처자 이쁘네” 해서 자기 옆에 데리고 온 경우가 아니라면,혹 이병린 변호사가 여자의 약점을 잡아서 협박해서 몸을 요구한 사례가 아니라면, 나이 예순 다섯의 노인이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와 사랑을 나눈 게 뭐가 그리 큰 일이란 말인지.

    여기서 부인은 사별했다는 걸 굳이 말하기조차 궁색하다. 부인이 살아 있었다 해도 이병린은 그 부인에 사죄하고 책임을 지면 되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나 법정에서 머리를 숙일 이유가 뭐란 말이냐. 대체 한 사람의 공적인 메시지가 왜 메신저의 사생활로 평가받아야 하고 평생을 올곧게 살아온 변호사가 그렇게 쓸쓸히 퇴장해야 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약자와 핍받받는 자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이병린 변호사였기에 나는 이병린 변호사가 그 여인에 대해서도 삿된 마음 없이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고, 짧은 사랑이었겠지만 그 둘은 둘만의 시간 속에서라도 행복했으리라고 믿어.

    어떤 사람은 상대 여자를 “일식집의 접대부”라고 표현하던데 이건 이병린 변호사를 오히려 더 욕되게 하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하는 변호사는 사랑도 하지 말란 말이냐. 그게 ‘실수’이고 쉬쉬해야 할 문제란 말이냐. 그건 아니잖아.

    그로부터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누가 이혼했다고 하면 수신제가를 논하고 40일 동안 밥을 굶는 아버지 앞에서 이혼하고 양육비 안보냈으니 나쁜 넘이라고 우기고 어디서 어떻게 뒤졌는지 월 3만원짜리 국궁을 배웠다고 그러면서 양육비 안보냈냐고 우기면서 그 심장에 날창을 찌르는 세상에 살고 있네.

    한 사람이란 여러 면모를 지니고 그 속을 들여다본다는 건 여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 아닐 게야. 그런데 불거진 사생활의 자락 하나로 그 사람 전체를 나락에 빠뜨리고 “그런 놈이었구나?” 낄낄거리고, 전혀 맥락이 다른 사생활들을 “국민의 알 권리”랍시고 폭로해대는 자들은 정말 용서하기 어렵네. 조선일보를 비롯한 자칭 우익 꼴통들….. 정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이병린 변호사는 1986년 8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대한변호사협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그의 관은 젊은 변호사들이 들었지. 이병린 변호사의 삶과 뜻을 이해하고 존경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은 ‘민변’의 단초가 된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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