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차 대전 후 독일 LGBT 운동
    [세계 LGBT 운동의 역사] 동성애 규제법, 나치 이후 잔존해
    By 토리
        2014년 08월 25일 11:4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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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 이후 독일에는 퀼른 등지에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독일은 도시 문화 발달이 낮았기 때문에 게이 문화가 크게 발달하지는 못했다. homosexual이란 개념이 독일 등지에서 사용된 것은 19세기 초반이었다.

    동성간 성관계가 탈범죄화된 것은 20년 전의 일이며 여성간 성관계는 오스트리아 일부 시기 외에는 범죄화되지 않았다.

    오늘날 독일 형법에서는 동성애와 이성애 행동에 대한 구분을 삭제했으며 스위스는 1992년부터, 동독 지역은 1988년부터 삭제하였다. 현재는 헌법상 반차별 수정 조항을 삽입하고 동성 결혼를 법제화하는 데까지 정치적 요구가 나아가고 있다.

    독일은 오랫동안 공공장소에서의 차별을 금지해 왔다. 보수적 정치인들도 차별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으나, 이 때의 의미는 완전한 반차별과 통합이라기보다 관용의 의미로서의 평등에 가깝다.

    군대나 교회 등에서는 정체성을 숨기는 한 동성애 행위가 가능하긴 하나 그 곳은 차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사적인 영역이나 직장 등지에서 벌어지는 차별을 법적으로 제지하는 것 또한 아직은 쉽지 않다.

    1970년에서 1990년 사이 수행된 조사들에 따르면 최소한 독일인의 1/3은 동성애에 대해 비우호적 태도를 보이며 1/3만이 관용을 보였다.(Bochow, 1993; Wienold & Lautmann, 1977) 그러나 많은 도시들이 게이바와 크루징 포인트들을 갖고 있으며 레즈비언 게이 커뮤니티가 잘 발달된 특징을 보인다.

    서독의 반동성애법

    거의 16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독일에는 일관된 형법이 없었다. 왕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 영주들의 힘이 커지면서 자체 법을 만들기 시작했고 사형에 이르는 법 조항도 급증하였다.

    독일이 최초의 범죄법(Constitution Criminalis Carolina)을 갖게 된 것은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5세 하에서였다. 여기서 소도미(sodomy)는 “만약 사람이 동물과, 남성과 남성과, 여성이 여성과 함께 음란한 관계를 가진다면 생명을 저버리는 것이고 화형으로 처형한다”(art.116)으로 되어 있다.

    19세기에는 철학자 임마뉴엘 칸트의 영향을 받아 1813년 독일의 바이에른 공국 법에서 처음으로 동성간 성관계가 비범죄화된다. 다른 지방에서는 그대로 사형이 언도되는 등 지역적 편차가 심한 편이었다.

    19세기 초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영향을 받아 프로이센에서 새로운 형법이 마련되면서 우선 동성애 처벌은 대중에게 부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이해되어 형법에 넣지 않았다. 이것이 다시 “남성 간에서나 인간과 동물 간의 비자연적 간통”이 삽입된 것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때였다. 이는 6개월에서 4년 사이의 구류 및 시민권의 일시적 박탈의 형벌이 내려졌다. 독일 형법이 몇 차례 변화를 거쳐 최종적으로 1871년 새로이 독일 제국이 성립되면서 만들어진 독일 형법의 조항 175가 되었다.(Höinghaus, 1870)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된 바이에른 공화국에서 동성애 탈범죄화 시도가 있었으나 남성간 “성행위 및 유사한 행동”에 대한 처벌은 유지되었다.

    사회민주당 국회의원 구스타프 라드부르흐(Gustav Radbruch)가 법무부장관이 되면서 보다 진보적 접근이 중시되었고 초안에서 동성애 비범죄화를 제시하였다. 1929년 법무부 회의에서 과반을 약간 넘겨 동성애를 형법에서 제외키로 논의되기까지 하였다.

    나치가 이 모든 진보적 성장을 중지시켰음은 따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치는 “국가 공동체”라는 자신의 이념으로 기존 형법들을 재해석했다. 새로이 입안된 형법 조항 175a는 동성애 행동을 포괄적으로 해석하고 더 강한 패널티를 부과하는 조항이었다. 나중에는 성적인 접촉 없이도 형법을 위반했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나치제국이 패망한 후 연합군이 지배하면서 나치의 법은 전부 무효화되었지만 형법 조항 175 및 175a는 남게 되었다.

    1950년대부터 서독은 형법 조항 175와 175a가 법적으로 유효하다고 판결했고, 헌법재판소는 심지어 이들 조항이 나치 시대의 입법이라 하더라도 민주주의 원리에 합치하므로 위헌이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1950년대에는 나치 시대보다 더 많은 수의 동성애자들이 이들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판결받았고 그 숫자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4배 가량 되었다.

    새로운 개정 형법은 1960년대 말 무렵에 제정되었다. 처음으로 상대방이 21살 이상일 경우 단순 동성애 행위는 범죄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형법 175a은 여전히 잔재하여 의존 및 유혹의 남용이나 남창, 광의의 화간 등은 처벌할 수 있다.

    이 부분은 1973년 형법의 개정으로 ‘비도덕적 성범죄’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에 반하는 범죄’로 바뀌게 된다. 18세 이하 남성간 동성애를 처벌하는 조항은 여전히 남아 있어 차별이라는 인식이 높으나 이는 사민당, 녹색당 등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기민당이 여전히 개정에 반대하였다. 이것이 바뀐 것은 통일이 이루어지고 난 후 새 형법이 제정되고 나서였다.

    서독의 친동성(애) 운동

    1898년 의사 마그누스 히르쉬펠트(Magnnus Hirschfeld)가 주도하여 전세계에서 최초로 동성애자인권운동단체 ‘과학적 인문주의자위원회’(Scientific Humanitarian Committee)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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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LGBT운동의 선구자 마그누스 히르쉬펠트 (1868~1935)

    과학적 인문주의자위원회는 젊고 유능한 변호사였던 커트 힐러(Kurt Hiller)의 비젼에 따라 움직였다. 과학적 인문주의자위원회 외에 있었던 단체로 아돌프 브랜드(Adolf Brand)의 저널 Der Eigene 등이 있었다. 이 저널은 남성-남성간 에로티시즘 문화를 주로 다루는 저널이었다.

    바이마르 지방 동성애 운동은 멤버쉽 서비스를 갖춘 다수의 ‘프렌드쉽 클럽’과 동성애 잡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0년대 들어 이를 출판업자이자 사업가였던 프리드리히 라쯔바이트(Friedrich Radzuweit) 가 ‘인권을 위한 리그’(League for Human Rights)라는 네트워크형 조직으로 묶어냈다.

    서독의 동성애 인권 운동가들은 세계대전 후 새로이 운동을 재건하고자 하였다. 나치 치하에서 과거 중요한 지도자들은 모두 사망하였고, 새로이 건설할 세대들은 이전 세대와 단절되었다. 활동가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영광을 꿈꾸었으나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는 되기 어려웠다. 나치 수용소와 전쟁의 기억을 가진 이들은 재차 조직에 속하는 걸 두려워했다.

    이 무렵 미국과 유럽에서는 새로이 국제 동성애 인권 네트워크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그누스 히르쉬펠트 또한 1920년대에 이러한 네트워크(성적 개혁을 위한 세계 리그)를 시도하였으나 그의 노력은 각국에서 일부 개인들 외에는 조직이 없음에 따라 실패로 돌아간다.

    다시 발생한 국제 동성애 인권 네트워크는 독일, 영국,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오스트리아 등을 망라하였고 동성애 문제에 촛점을 맞추게 된다. 네트워크의 중심은 스위스 단체 The Circle이 맡았다. The Circle은 1932년에 설립된 조직으로서 설립자는 레즈비언이었던 안나 보크(Anna Vock)였으나 그녀가 사퇴한 후 칼 마이어(Karl Meier)가 새로이 리더가 되었고 거의 남성만을 위한 조직으로 바뀌었다.

    The Circle은 1950년대 및 60년대 취리히에서 각종 클럽과 파티 등 문화를 영유하였으며 자체 매거진 Der Kreis를 발간하였다. 1959년 무렵 Der Kreis는 매호 2천부를 발간하였고 독일 및 서부유럽에도 많이 팔리게 되었다.

    1950년대 말 미국에서는 미국 내 최초의 동성애 인권단체라고 여겨지는 메타친 소사이어티가 결성되었다. 원래 이 단체는 과거 공산주의자 활동가였던 헤리 헤이(Harry Hay)가 설립한 것이었으나, 단체가 확장되면서 동성애를 소수자 정체성으로 놓고자 한 헤리 헤이의 노선과 다른 노선 갈등이 발생하였고, 헤리 헤이는 리더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헤리 헤이의 노선을 대체한 노선은 동성애자는 이성애자와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자고 주장하였고, 운동권 언어보다 의사 과학자 등에 의한 교육을 중시하였다.

    메타친 소사이어티의 전략 노선은 유럽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노선은 과거 프리드리히 라쯔바이트와 그의 ‘인권 리그’가 걸었던 노선과 유사하게 인식되었고, ‘친동성(애)(homophile)’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 단어는 과거 homosexual이란 단어를 대체하려는 단어로서 성적 접촉보다 관계의 정서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독일에서 친동성(애) 활동의 시작은 1949년 마틴 노프(Martin Knop)가 서베를린에서 잡지를 발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베를린은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 어려워졌고, 프랑크푸르트가 친동성(애)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가장 성공적으로 길을 닦은 조직은 1949년에 결성된 ‘인간적 삶을 위한 연합(Association for a Humane Way of Life)’이었다. 하인쯔 미닝거(Heinz Meininger)가 설립한 이 조직은 성공적으로 안착화되었고 형법 조항 175를 폐기하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미닝거는 당시 의대생이자 성과학자였던 한스 기스(Hans Giese)를 만났는데, 그는 곧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한스 기스는 우선 과거 성과학 연구소를 재건하고 ‘과학적 인문주의자 위원회’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한스는 과학적으로 합리적인 논증으로 국회의원들이 설득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전후 독일 활동가들은 과거 바이에른 공화국 시절의 영광을 재건할 것을 꿈꾸었다. 비록 나치 이전 시절만큼의 에너지를 회복하기는 어려웠지만 지역 조직을 일부 재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계적 사상 및 담론 흐름에 맞추어 사회 개혁과 관용이란 자신들의 오랜 담론을 갱신하였다. 비록 과거만큼 대중적 규모로 동성애자들을 조직해내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성과들을 남긴 것이다.

    <참고>

    Whisnant, C. J. (2012). Male homosexuality in West Germany: Between persecution and freedom, 1945-69. Houndmills, Basingstoke, Hampshire: Palgrave Macmillan.

    West, D. J., & Green, R. (2002). Sociolegal control of homosexuality: A multi-nation comparison. New York: Kluwer Academic Publishers. 

    필자소개
    LGBT 인권운동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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