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킨집 공화국과 세습 자본주의
    [사민저널] 세습사회와 금권정치 부활에 분노하라!
        2014년 08월 25일 10: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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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민저널> 8월호는 ‘불평등’과 ‘세습자본주의’를 가지고 구성되었다. 사민저널 측의 양해를 얻어 사민저널의 특집기사들을 몇차례 레디앙에도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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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세습 자본주의와 세습적 신분사회

    한 나라 국민의 불평등, 특히 소득 불평등의 수준을 설명하거나, 나라간의 소득불평등 수준을 국제적으로 비교하기 위하여 ‘지니계수’, ‘소득 10분위 배율’, ‘상대 빈곤율’, ‘소득 상위 1%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과 같은 다양한 지표를 사용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이런 불평등 지표들이 정치, 경제, 사회 영역에서 자주 거론되는 이유는 명확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1980년대부터 시작하여 전 세계 모든 나라들에서 –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

    소득불평등은 사회계층들 사이에 교육 기회와 건강의 격차를 확대하고, 그 결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대간 사회적 이동(즉 자식들의 출세 또는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축소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듯 세대간 사회적 이동의 가능성이 줄면서 개인 본인의 노력과 능력, 실적 여부가 사회적 지위와 보수를 결정하는 실력사회(meritocracy)는 점차 소멸하고, 부모의 부와 재산, 사회적 지위가 그 자식의 교육수준과 취업 및 소득, 그리고 부와 결혼까지 좌우하는 세습 사회(hereditary society)가 부활하고 있다. 과거 전근대 사회의 악습인 세습적 신분제가 오늘날 우리 눈앞에서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세습으로 부와 자산, 신분을 취득한 특권 집단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계속 조성하기 위하여 언론과 정치권력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통제하며, 그리하여 1인 1표 원칙이 적용되는 민주주의 정치가 약화된다.

    실력 사회의 소멸과 세습 사회로의 복귀는 이론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에서 모두에서 설명된다. 이론적으로는 요즘 아주 유명해진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가 쓴 <21세기 자본론>(Capital in the 21st Century)이 있다. 이 책에서 피케티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세습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라고 부른다.

    피케티에 따르면 오늘날의 21세기 자본주의는 부모로부터 부와 지위, 신분을 물려받은 상속 엘리트들이 지배하는 ‘신 빅토리아식 계급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세습 자본주의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현상이며,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미국처럼 복지제도가 구축되지 못한 나라일수록 더하다.

    무능한 재벌 3세들의 세습 귀족 사회

    우리나라의 경우, 대기업들에서 재벌 3세의 경영권 승계가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기업을 창업한 1세대 창업자와 그의 후광 아래 기업의 확장을 진두지휘한 2세대와 달리, 재벌 3세 경영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유리된 세계에서 성장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또는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가거나, 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국에 가서 사립고등학교와 사립대학을 졸업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만의 사교 집단을 만들어 교류하고, 자기들끼리 결혼하면서 귀족적 세습사회를 구축한다.

    그들은 하지만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는 무능하여 창업이나 확장도 힘들기 때문에, 그저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으로 세계의 이곳저곳에 투자하는 금융투자회사 또는 자산운용회사를 만들고 그 회사를 카리브 해의 조세회피국에 등록하여 투기꾼으로 나선다. 아니면 부모의 후광과 지원으로 해외명품 수입회사를 창업하거나, 아니면 아버지가 지배하는 대기업과 그 임직원을 고객으로 하는 서비스 회사를 손쉽게 설립한다. 마치 대중에게 경영 능력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다.

    자기 아버지 시대의 편법적인 경영권 세습이 요즘 힘들어지자, 이들은 합법과 탈법 사이에 있는 온갖 창조적인 편법을 동원한다. 그리고 어느 날 재벌그룹의 지주회사 또는 순환출자 고리의 핵심에 있는 회사의 최대주주로 등극하여 경영권을 상속받는다.

    우리나라 경제에서 재벌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재벌그룹의 경영권 세습은 그들만의 가족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경제 전체와 그리고 재벌 가문과 별 관계도 없는 보통 사람들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도 TV 드라마와 신문 등에서는 재벌 일가의 상속 문제를 세습적 신분제와 귀족제의 부활과 같은 심각한 사회 문제의 관점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그저 아버지의 재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형제자매들 간의 재산분쟁 차원에서, 형제자매들 중 누가 가장 많은 부를 상속받는지 라는 궁금증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현실이다.

    치킨집

    우리 모두의 인생 종착점은 치킨집

    실력 사회의 소멸, 세습사회의 부활이 나타나는 또 하나의 현실이 치킨집이다. 동네를 둘러보면 사방에 치킨집이다. 너무 많아 과잉이고, 그래서 망해간다. 누구나 쉽게 차리지만, 그만큼 쉽게 망한다.

    ‘이원석’이 쓴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책에는 공부를 고등학교까지는 대학 입시 시험공부와 대학에서는 다양한 스펙 쌓기를 위한 취업 공부라는 두 가지로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과 사회적 통념을 비판한다.

    이 책에서 이원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죽어라 공부한’ 학생의 인생 경로를 그림으로 도식화하는데 그런 학생의 최종 종착지는 아사(실직), 과로사(취업) 같은 ‘사망’이거나, 아니면 ‘치킨집’이다.

    문과계열의 대학을 나온 청년은 아예 취업에 실패하는 까닭에 굶어죽거나 그렇지 않으려 바로 치킨집을 차린다. 이과계열의 대학을 나온 청년은 그나마 취업이 쉬운데, 취업 후 너무 많이 일하다가 과로사하거나, 또는 나이 들어 희망퇴직 후 곧장 치킨집을 차리거나, 아니면 희망퇴직 후 잠시 다른 개인 사업을 하다가 망하여 별 수 없이 그 역시 치킨집을 차린다.

    결국, 우리나라에서 숨 쉬기도 힘들게 공부에 내몰리는 인생의 최종 종착점은, 경로만 조금씩 다를 뿐,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모두가 치킨집 사장이다.

    치킨집은 프렌차이즈 모회사에서 가게의 디자인과 포장재, 요리재료, 요리기기 등을 모두 제공한다. 또한 치킨에 대한 수요는 늘 있기 때문에 적은 자본으로 동네에서 창업이 가능한 좋은 자영업 아이템이다.

    그래서 너나 나나 모두 치킨집이다. 이원석의 그림에는 나오지 않지만, 죽지 않고 살아가는 치킨집 사장의 삶은 비참하다. 프랜차이즈 모기업의 수탈과 동네 다른 치킨집들과의 경쟁에 시달리면서 동시에 치킨을 튀기고 손님을 접대하고, 그리고 또한 배달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하며 팔아도 남는 것보다는 빚만 쌓여간다. 앞뒤로, 좌우로 출구가 꽉 막힌 채 몰락해 가는 동네 자영업자가 치킨집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아무리 청소년 시절에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또한 대학 입학 이후에 또 다시 아무리 좋은 대기업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학점 관리하고 다양한 자격증 따서 스펙 쌓기를 한다 하더라도, 부모 잘 만나서 대기업 직장과 각종 ‘사’자 직업을 구하지 못하는 한, 그 종착점은 결국 치킨집이다. 그리고 동네 치킨집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모두가 망해간다.

    세습 자본주의의 시대에 부모 잘못 만나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못한 신분의 최종적 인생 귀결점은 치킨집이다. 이런 점에서, 치킨집은 세습적 신분사회의 재탄생을 알리는 상징이다.

    박근혜 정부의 세습 인사와 로스쿨 변호사들의 세습 귀족 사회

    부와 지위가 세습되는 슬픈 현실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확인된다. 2013년 2월 집권 당시부터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위원과 행정부 장관 임명에서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 때 고위 관료로 일했던 사람이나, 그의 자식을 임명하였다. 박근혜 정부의 고위급 인사 정책은 결국 “최고의 스펙은 너 자신의 노력이나 성과보다는 ‘아버지’를 잘 만나는 것”임을 보여준다.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하고 우수한 능력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부와 지위가 세습되는 것은 로스쿨 제도에서도 나타난다. 서울 강남에 거주하면서 특목고나 자사고를 거쳐 서울의 손꼽히는 대학에 진학하고, 대학 졸업 후에는 1년 등록금이 2천만 원에 이르는 로스쿨에 진학하여 졸업 후 변호사, 판검사가 된다.

    그 과정에서 일부 개인의 노력이 없지 않겠지만, 부모의 부와 자산이 일단 로스쿨 진학과 졸업 여부를 결정한다. 게다가 로스쿨 졸업 이후에도 유명 로펌에 취업할 수 있는지 여부는 부모가 부유한지, 부모가 좋은 대학 나와 정관계, 재계의 인맥이 풍부한지, 법조계와 친분이 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사법고시 제도가 사라지고 로스쿨제도가 정착되면서, 운이 없어 돈 없고 힘없는 부모를 만난 서민의 자식들은 아무리 피땀 흘려 노력하더라도 변호사나 판검사로 출세하는 길이 봉쇄되었다.

    이렇듯 세습 귀족 사회가 부활됨에 따라, 아무리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노력하더라도,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그의 평생은 결정된다. 개인이 노력하는 실력 사회를 상징하던 “개천에서 용 났다”는 사례는 더 이상 보기 힘들다. 이제 “양재천에서만 용이 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세습 자본주의는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든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1기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에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Robert Reich)는 2013년 자신이 주인공이자 화자로 출연하는 교육용 영화 ‘모두에게 불평등(Inequality for All)’를 제작하였다.

    이 영화에서 라이시가 불평등의 폐해로 지적한 주제들 중 하나는 ‘불평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과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까?’였다. 라이시는 소득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침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이시

    자신이 만든 다큐 영화 (모두를 위한 불평등)의 소개하는 로버트 라이시

    현대의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 형제애(박애)’를 내세운 프랑스 대혁명(1789년)과 함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만민평등 사상으로 과거의 세습 신분제를 폐지하면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은 미완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에게만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제공하고, 재산이 적거나 아예 없는 대다수 농민과 노동계급에게는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민주주의는 소득과 거주 지역, 인종·민족 및 성별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성인 모두에게 1인 1표의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 선거권제도’가 19세기 말, 20세기 초반에 제도화되면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신분제 사회에서와는 달리,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사회구성원이 부모와 재산 및 신분과 무관하게 평등한 대우를 받으며 사회적,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 – 적어도 절차적으로는 –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렇듯 보통선거권의 획득은 1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동반된 사회운동의 결과였다.

    개천에서 용 난다고? – 세습 신분제의 소멸과 재탄생의 1백년

    우리나라에서 세습 신분제는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귀족과 양반, 상놈, 노비 등의 신분제적 관습은 지속되었다. 세습 신분제가 마침내 사라진 것은 1945년 8월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고, 1950년 3월 농지개혁의 완료, 1953년 7월 한국전쟁의 종전이라는 약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루어졌다. 해방 정국의 정치적, 사회적 격동 속에서, 커다란 사회적 운동 없이, 세습 신분제가 법제도 및 관습으로서는 사라진 것이다.

    또한,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확정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국민들에게 보통선거권이 생겼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세습 신분제의 폐지와 보통선거권의 획득은 서구에서와 같이 민중이 스스로 쟁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위로부터,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만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이나 자부심은 크지 않았다.

    게다가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진 농지개혁과 지주계급의 소멸, 초등학교 보통교육의 전면화에 이어서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이루어진 고등학교 평준화 등의 결과로 농민과 서민의 자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 치하의 정부 주도의 고속의 압축적 공업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기구의 확대에 따라 대기업 일자리와 정부 관료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농민과 서민의 자식들이 대거 대기업의 임직원이나 고위 공직자로 출세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지면서 부정선거와 독재가 지속되었지만, 많은 국민들은 경제가 고속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신들도 ‘출세’하고 ‘한 몫’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자신의 사회적 부와 지위를 더 높일 수 있다면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1970~80년대에 우리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 치열한 민주화 항쟁으로 1987년 6월부터 헌법 개정과 함께 정치적 민주주의가 드디어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이후부터, 정치적 민주주의가 발전하면서 ‘이상하게도’ 동시에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다시 심화되기 시작했다. 자사고와 특목고 등이 ‘교육자율화’라는 이름으로 본격 도입된 것이 김영삼 정부 시절이었다. 교육의 세습 자본주의화가 부활한 것이다. 민주화=자율화(시장 자유화)라는 명목으로 ‘자유주의’가 우리의 사회경제 생활에 본격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등장하여 각종 ‘시장 개혁’ 즉 자유주의 개혁을 실시하면서서부터 빈부격차와 각종의 불평등한 격차는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벌어졌다. ‘부자 아빠 되세요!’ 신드롬이 처음 등장한 것이 김대중 정부 시절이어다. 부자 아빠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은 좌절하였다. ‘우리 모두의 종착점은 치킨집’이라는 새로운 역사 시대가 개막된 것도 김대중 정부 때 시작된 희망퇴직, 정리해고와 함께였다.

    또한 예컨대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로스쿨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 역사상 ‘개천에서 용 난’ 대표적인 큰 사람으로 평가받는 노무현 대통령이 등장한 시절이다.

    김영삼 정부에 이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펼친 각종의 시장개혁, 즉 (신) 자유주의적인 방향의 사회경제 개혁과 함께 세습 자본주의는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는 세습 자본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노심초사 하고 있다.

    ‘자율화’와 불평등, 금권정치

    시장 자유화가 더욱 강화되면서 각종 불평등이 더욱 깊어지고 있으며, 정치적 과정(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부유한 세습 자산가들의 영향력이 날로 확대되면서 실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는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줄어들고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 ‘진실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 그 자체에 동원되는 관심은 현란해 보이지만,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에서 투표율이 낮아지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과거처럼 지연과 혈연의 영향력은 줄어들고 있지만, 특목고 학연과 미국 사립 고등학교-사립대학 유학 학연, 로스쿨 학연이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그리고 부유층 자제간의 혼인으로 맺어진 새로운 혈연이 등장하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연줄 자본주의(crony capitalism)가 출현했다.

    세습 자본주의의 산물인 새로운 유형의 세습 부르주아들이 이 사회를 지배한다. 여기에는 재벌 일가만이 아니라, 좋은 대학 나온 386(이제는 486) 세대의 고소득 전문직들과 벤처사업가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진보일지 몰라도, 일상적 삶에서는 세습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스스로 노력한다. 서울 강남의 대치동과 목동의 사교육 시장에서 자식들을 서울의 일류 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하여 분주하게 움직이는 엄마 아빠들의 다수가 486 민주화 세대라는 것이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이들 세습적 특권층은 정치후원금을 통해 정치권력에 대한 영향을 확대한다. 미국식 로비스트는 현행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온갖 로비가 횡행한다.

    기업을 위한 구제금융 제공과 법인세 감면, 그리고 부자들을 위한 각종 소득세 감면과 상속세 감면이 입법의 우선순위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에 반해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위한 입법은 후순위 관심사로 밀려 버린다.

    법안의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부자와 기업을 위한 입법은 소비지출 증가와 수출증가를 통한 경제성장 촉진, 일자리 확대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최우선시 되고 있다. 여당만이 아니라 야당도 마찬가지이며, 여기에 486 정치인들도 동참하고 있다.

    ‘1인 1표’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투표율 저조와 입법부에 대한 부자와 기업의 로비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결국 ‘1인 1표’가 아니라 ‘1원 1표’라는 ‘금권정치’가 입법과 사법, 행정 등 모든 국가기구의 정치과정에 영향력을 넓혀 나가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들고 있다.

    세습 사회와 금권정치의 부활에 대하여, 분노하라!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명시적으로 ‘사람 위에 사람 있었고, 사람 밑에 사람 있었다’. <홍길동전>에는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인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는 발언은 혈연보다도 신분이 우선시되는 전근대적 사회 질서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부와 자산뿐 아니라,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까지 세습될 수 있는, 21세기에서 부활한 세습 귀족 사회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무수히 배운 것과는 동떨어진 원리가 작동한다. 즉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출세와, 신분상승, 지위 상승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본인과 그 가족의 세대 간 계층이동이 막혀있고, 부모 잘 만난 아이가 그대로 사회적으로 성공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이 사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made) 있는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가 아닌가!

    이러한 의미에서,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할 수밖에 … 이런 식의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는 스테판 에셀(Stephan Hessel: <분노하라>의 저자)의 외침은 세습사회의 부활, 금권정치로의 복귀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보통 사람과 그 자식들은 제아무리 피땀 흘려 노력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치킨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스테판 에셀이 말하는 것처럼 “젊은이들이여! 분노하라, 저항하라!”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행복과 인생을 위해, 투표하라!

    이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투표를 통한 선거 참여다. 사실 지난 역사 속에서 과거의 세습사회가 현대적인 실력사회로 전환된 것은, 그리고 민주주의가 일반화 되어 뿌린 내리게 된 것은 보통선거권의 쟁취와 함께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부와는 관계없이 보통 사람들도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결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보통선거권의 쟁취와 함께 노동자계급이 선거 참여와 의회 과반수 획득을 통해 자신들의 삶과 인생을 점진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었다.

    사회민주주의 기본 가치는 자유와 평등, 정의, 연대이며 사회민주주의는 국회와 지자체에서 다수당이 되어 세습 자본주의를 끝내고, 세습 부르주아의 특권을 폐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소득과 부, 사회적 지위의 공정한 분배를 촉진하여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고, 이와 함께 ‘실질적 평등’과 ‘실질적 자유’를 실현하고자 한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누구나, 그 부모의 재산 및 지위와 관계없이, 인생의 행복과 안정을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하며, 그러려면 국가와 사회가 모든 개개인을 지원해야 한다.

    그런 세상을 만들려면 유권자들이 선거에 참여하여 투표에 나서야 한다. 그래야만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고, 세대 간의 사회적 이동 가능성이 확대되며, 세습 사회가 아니라 실력 사회가 부활하여 사람다운 세상이 만들어진다.

    “투표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 참여 슬로건이 있다. 20세기 서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선거에 참여하여 집권하고 세상을 바꾸었다. 21세기 초의 우리나라 국민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

    물론 빠른 시간 안에 우리나라에서도 사회민주주의 정치 세력이 탄생하여야만 비로소 국민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투표장에 달려가게 될 것이다.

    <사민저널 원문 링크>

    필자소개
    사민저널 회원.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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