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정치사상의 300년 역사
    [책소개] 『여성의 정치사상』(박의경/ 책세상)
        2014년 08월 23일 01: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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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성인이 된 남녀라면 당연히 누리는 참정권과 선거권. 이 권리를 여성이 쟁취한 지는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선거와 투표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역사에서 ‘여성’은 오랜 세월 배제되어 있었다.

    영국에서는 차티스트 운동의 결실로 1832년 모든 성인 남성이 선거권을 획득했으나 여성은 1918년에, 그것도 30세 이상의 기혼 여성만이 투표권을 인정받았다. 미국에서는 수정헌법 19조〈남녀평등 조항〉이 통과된 1920년에야, 프랑스에서는 1848년 보통선거가 도입된 지 거의 100년 만인 1946년에야 여성 투표권이 인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 5월 10일 총선거 때 처음으로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여성은 오랫동안 정치적 주체로 인식되지 않았고 사상의 역사에서 배제되었으며 여성의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이어져왔다.

    이 책은 여성의 문제를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것에 대한 성찰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정치사상사’의 차원에서 다룰 때 불완전한 근대의 공백이 메워진다고 이야기하면서 여성정치사상사 쓰기를 시도한다.

    여성의 권리에 대한 주장과 관련 활동을 찾아내어 정치적 담론으로 승화시키려는 한편, 근대를 출발점으로 설정하여 그 연원과 흐름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여성의 눈으로 정치사상의 역사를 다시 본다는 것은 ‘남성들만의 리그’에 갇혀 있던 불완전한 역사를 온전한 인간의 역사로 복원하는 것이며, 과거로 돌아가 문제의 근원을 분석함으로써 미래의 비전을 정립하려는, 현재와 미래를 위한 기획이다.

    여성정치사상의 근대적 토대를 마련한 장본인이 18세기의 여권 운동가이자 페미니즘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실천한 19세기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다.

    이 책은 이 두 인물의 사상을 중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여성의 존재를 소외시킨 근대정치사상의 부족함을 채우고 여성정치사상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부터 근대에 걸쳐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누릴 만한 존재임을 천명해온 크리스틴 드 피장, 안나 마리아 판 수르만, 메리 애스텔, 올랭프 드 구주, 해리엇 테일러 등의 주장들도 소개한다.

    20세기에 들어서 여성의 권익이 크게 신장하고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남녀평등을 헌법에 명기하고 있음에도 정치 참여와 교육, 노동의 기회가 여성에게 제대로 주어지지 않거나 남성 중심적 사고에 따른 차별과 억압으로 여성 인권 문제가 심각한 나라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고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돌아보고 정치사상사 속 여성의 존재를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20세기에 여성의 권익 신장을 주장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하거나 퇴행하게 된 것은 여성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근저에 대한 분석과 연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며, 역사 속에 존재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찾아내는 ‘숨은그림찾기’ 작업에 주목한다. 이 작업이 이행되어야만 과거와 현재를 연결 짓고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사회를 새로이 구성하여 미래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남성만을 인간으로 보고 민주주의 사회를 구성하려 했던 시도는 권력의 불균형을, 근대의 모든 기초를 의심하는 상황을 초래했다고 본다. 여성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은 인간의 해방이나 인권은 제대로 된 개념일 수 없고, 자유와 평등, 개인의 독립성과 자율성 등이 법과 제도로 구체적 틀을 갖추며 사회에 자리 잡아가는 과정, 즉 ‘근대기획’을 온전하게 만들려면 그동안 배제되었던 여성을 소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여성을 배제했던 근대기획의 잘못된 출발을 지적하고 바로잡는 ‘근대 바로 세우기’를 시도하면서, 정치사상의 보편성과 중립성이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는 토양의 형성을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남성 중심적으로 젠더화되지 않은 정치사상, 즉 탈젠더화된 정치사상을 정립해야만 보편적이고 중립적이며, 개별적이고 구체적이기도 한 모든 이의 정치사상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열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본다.

    여성의 정치사상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기존의 권위에 반대하며 나타난 계몽사상은 이성에 의한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의식을 고취하며 17, 18세기에 영국 명예혁명, 프랑스 혁명, 미국 독립혁명 등의 시민혁명을 낳았다. 이를 계기로 민주주의 체제가 제도적인 틀을 갖추며 성립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시민혁명의 문서들, 곧 영국의 권리청원과 권리장전, 프랑스의〈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미국의 독립 선언서는 하나같이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전제했지만 ‘모든 인간’에 여성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을 지닌 인간이자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이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계몽사상가들조차 여성이 남성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오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에서 보듯이, 사회는 여성의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여성을 인간에 포함시켜 세력화를 부추겼으나, 혁명이 일단 궤도에 올라서자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에게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1793년 정치 영역에서 여성을 퇴출하고자 한 국민공회는, 여성의 투표권과 대표권을 요구하며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수 있다면, 의정 단상에도 오를 수 있다”고 주장한 올랭프 드 구주를 처형하고 여성 정치 클럽을 강제 해산시킨 데다, 여성이 밤에 돌아다니는 것마저 금지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이루고자 한 인간 해방에서 여성을 철저히 소외시킨 셈이다.

    여성이 결코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다며 평등한 권리를 누리게 해달라고 요구한 여성들은 구주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15세기 프랑스의 크리스틴 드 피장은 기독교계의 여성 폄하를 비난하며 여성이 인간임을 주장했고 17세기 영국의 메리 애스텔은 여성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성찰의 시간과 교육 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이 기울인 노력은 18, 19세기에 울스턴크래프트와 밀에게 이어져 여성해방의 이론적 토대를 형성하게 된다.

    19세기에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각국에 자리 잡아가면서 정치의 주체가 ‘시민’이라는 사고가 확산되었지만 시민으로 사회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여성은 시민에 포함되지 못한 채 선거권을 얻기까지 20세기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인간’이자 ‘시민’으로 바로 서기까지 오랜 세월을 인내해야 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통해 근대정치사상의 남성 중심성, 비중립성, 성맹목성을 지적하는《여성의 정치사상》은 여성이 배제되면서 길을 잃어버린 근대기획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방법을 이상과 현실, 사상과 구체적 역사를 오가면서 탐색해나간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루소에 맞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다

    이 책의 제3부에서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시민혁명 정신을 추구하여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이성적 존재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사상을 살펴본다.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장을 펼친 그녀가 저서《여성의 권리 옹호》,《마리아 또는 여성의 오류》,《메리, 하나의 픽션》에서 들려준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항거의 목소리를 되새기고, 이를 당시의 주류 사상가 장 자크 루소가《에밀》에서 펼친 주장들과 비교하여 분석한다.

    사회계약론자로서 민주주의의 초석을 사상적으로 다진 루소는 여성에 대해서만은 모순적 잣대를 적용하여 여성은 수줍음, 순결함과 정숙함이라는 덕목을 체득해야 하고, 사회적 이익과 정치질서를 위해 통제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루소는 근대 교육론의 효시가 된《에밀》에서 여성 소피를 자유로운 인간 에밀을 완성시키기 위한 보조적 인간으로 설정하여, 복종을 미덕으로 체득시키는 교육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울스턴크래프트는《여성의 권리 옹호》에서 여성이 수동적·의존적인 것은 여성의 본성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화 과정과 교육 때문이라고 하면서 루소의 일방적인 시각을 비판했다. 그리고 여성에게 이성으로 감성을 절제하고 질서 의식을 키울 수 있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교육과 정치 참여의 기회를 남성과 동등하게 누리는 시민 여성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한편,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 사회를, 나아가 인류 전체의 역사를 보다 발전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 책은 소설《마리아 또는 여성의 오류》,《메리, 하나의 픽션》의 내용 전개와 등장인물의 특징을 분석함으로써 억압당하는 여성이 시민으로 바로 서면 더 나은 사회가 형성되리라고 확신하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보여주고자 한 울스턴크래프트의 의도를 읽어낸다.

    양성 평등을 사유하고 실천한 존 스튜어트 밀

    제4부에서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존 스튜어트 밀이《여성의 종속》,《자유론》,《대의 정부론》 등 주요 저서에서 설명한 자유와 종속, 젠더, 대의 민주주의 개념을 분석한다.

    밀은 자유와 종속의 사회적 의미를 궁구하고 대의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존재들을 인식하고, 이들을 위한 제도적 장치에 초점을 맞춘다. 근대의 핵심 개념인 자유가 중립적이지 않고 이미 젠더화되었음을 인식한 밀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지 않으며, 남녀평등은 남성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밀이 이처럼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고를 하게 된 데는 아내이자 사상적 동반자로서 집필 활동도 함께했던 해리엇 테일러의 영향이 지대했다. 감성과 직관이 풍부한 테일러는 사회주의에 긍정적이어서 밀이《정치경제학 원리》의 제1장〈노동 계급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여성이 자율적인 행위자임을 인식케 하여 밀의 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확장시키는 데 공헌했다.

    밀은 노년에 하원의원으로 정치 일선에서 활약하며 여성 참정권 도입을 제의하는 등 자신이 주장한 남녀평등을 실천에 옮기고자 노력하기도 했다.《자유론》에서 만인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원칙을 찾아내고《여성의 종속》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고 억압받는다는 문제를 인식한 밀은《대의 정부론》에서 개인의 자유를 확보하고, 지속적으로 그 정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대의 정부의 필요성과 적실성을 발견한 셈이다.

    남녀 차별이 뿌리 깊게 존재하던 사회에서 여성에게도 평등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자유주의 사상을 동원해서 설명한 울스턴크래프트, 여성이 보편적 자유에서 배제되어서는 자유주의 사회라는 전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밀은 근대 여성정치사상의 토대를 형성하여, 온전한 정치사상이 미래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이 두 사상가의 업적을 토대로 이 책은 미래적 자유주의를 구상하며 탈젠더화된 정치사상의 당위성과 가능성을 통해 열린사회를 향한 미래 전략을 모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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