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없는 세상의 단초"라고?
    1500여명 집단소송 선고의 연기 빌미가 된 불법파견 합의서
        2014년 08월 22일 04:15 오후

    Print Friendly

    20일, 저녁 늦은 시간에 중앙지 기자가 문자를 보내 왔는데, “당초 내일(21일)과 22일로 예정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에 대한 선고 일정이 재판을 하루 앞둔 이시간에 9월 18일, 19일로 연기가 결정되었습니다.”라고 한다.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자동차 울산 1공장에서 근무했던 최병승에 대해서 “불법파견이 맞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해 11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스스로가 불법파견된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현대자동차 정규직 근로자가 맞다”며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을 집단적으로 접수했다.

    그러나 법원은 무려 4년이 다되어 가도록 이 재판을 질질 끌면서 판결을 미뤄왔다.

    이미 결정된 선고마저 두 번이나 미루다가 더이상 미룰 명분(?)이 없어서 8월 21일과 22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부장판사 정창근)에서 1,287명,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2부(부장판사 마용주)에서 282명에 대해 각각 선고를 하기로 결정 했었다.

    이에 따라서 울산과 전주, 아산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주부터 서울중앙지법 정문에서 법원의 ‘현명한 판결’을 촉구하는 1인 시위와 노숙농성에 돌입해 있었다.

    그런데, 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간절한 바람을 철저히 외면하고, 재판을 하루 앞둔 20일 오후 9시, 재판부는 “근로자들 중 일부가 선고에 임박해 소 취하서를 제출했다”며 “민사소송법상 송달 후 2주 동안 사측의 동의 여부를 기다려야 한다”며 재판을 한달 가량 미룬다고 발표를 해버렸다.

    재판부의 판결 연기 결정을 보면서 현대자동차 회사측이 왜 지난 18일, 수백 명의 용역경비까지 동원해서 불법파견 특별교섭 합의서를 만들려고 했는지? 그들의 저의가 분명히 밝혀진 것이다.

    결국 그들은 특별교섭 합의서에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취하’를 특별고용(채용)의 전제조건으로 합의했고, 그 합의에 따라 소송 당사자 중 일부가 재판부에 소 취하서를 제출했고, 이걸 빌미로 재판부는 선고 일정을 또 한달 뒤로 미뤄버린 것이다.

    18일, 회사측은 수백 명의 용역경비대를 동원하고, 비정규직 울산지회가 빠진 상태, 금속노조조차 빠진 상태에서, 현대자동차지부와 비정규직 전주지회, 아산지회만 붙잡고 악착같이 특별교섭 잠정합의를 만들어 낸 것은 1차적으로 8월 21일과 22일 1,569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4년이나 기다려온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의 판결을 뒤로 미룰려는 수작이었던 것이다.

    현자신문

    현대자동차지부 노조 소식지

    ​그런데, 20일 현대자동차 전 공장 식당에 배포된 현대자동차지부의 유인물을 보면 18일 특별교섭 합의와 관련하여 “비정규직 없는 세상, 단초를 만들었다”라고 대문짝만하게 제목을 달았다.

    현대자동차 내에는 아직도 2천명에 이르는 ‘촉탁계약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고, 청소, 식당, 경비, 운전 등 수천 명의 진성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고, 이번 합의서에 따라서 ‘전환배치 실시’가 이뤄지면 공정분리가 가능해지고, 이 경우 또다른 합법도급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넘쳐나게 되어있다.

    그런데, 그런데… 비정규직없는 세상의 단초를 만들었다니???

    18일, 비정규직 울산지회와 금속노조마저 빠진 상태에서 졸속으로 만들어진 ‘특별교섭 잠정합의’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의 단초를 만든 것이 아니라, 10년간 현대자동차 자본과 정권으로부터 모진 탄압을 견디며 투쟁해 왔던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의 판결을 또다시 한달 뒤로 미뤄버린 원인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현대자동차지부와 전주-아산 비정규직지회가 현대자동차 회사측과 서명한 합의서는 회사측이 그토록 열망하던 “불법파견 판결 연기”에 먹잇감으로 이용된 것이다.

    ​2010년 11월, 근로자지위 확인소송을 접수하고 4년동안 판결을 기다려 온 1,500명이 넘는 소송 당사자와 이 판결에 모든 관심을 집중하며 지켜봤을 제조업 생산공정에 투입된 수만, 수천 명의 ‘불법파견 의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1일 잡혀 있던 재판이 갑자기 연기된 사유가 8월 18일 현대자동차지부와 전주-아산비정규직 지회가 회사측과 합의한 ‘특별교섭 잠정합의’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리고나서 그분들이 “비정규직 없는 세상, 단초를 만들었다”라는 현대자동차지부의 이 유인물을 읽어 봤다면, 과연 저 제목에 동의를 할까? 아니면 찢어 버리고 싶을까?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비정규직지회는 22일 오전,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18일 합의서에 대해서 반쪽짜리 쓰레기 합의서로 규정하고, “노사담합 날치기 합의에도 현대차 비정규직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아산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들도 일부 참여했는데, 이들은 “헌법이 정한 스스로의 권리를 노사합의라는 명분으로 권리 포기를 강요하는 <사내하도급 관련 합의서>를 소송 연기를 위한 노사 담합의 합작품으로 규정한다.”면서 현대자동차에 대해서 “진정 노사합의로 불법파견을 해결하고 싶다면, 우선 현대차가 10년 동안 자행한 불법파견부터 인정하라. 불법파견 피해 당사자인 현대차비정규직노동자에게 진정어린 사과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내게 전해진 소식 중 또 하나는 “회사측이 내일(21일)쯤 400명 특별채용 모집공고를 낸다고 합니다”라는 것이다. 이 한장의 공고문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얼마나 뒤흔들어 놓을지? 비정규직에 대한 모든 주도권을 회사의 손아귀에 쥐어준 느낌. 이건 느낌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러나 울산 비정규직 지회와 아산, 전주에서 끝까지 반대의사를 밝히고 나선 비정규직동지들을 조직적으로 지켜 내면서 다음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참, 어떻게 나의 불길한 예측은 이렇게 단 한번도 비켜가지않고 딱딱 맞아 떨어지는지…

    필자소개
    박유기
    전 현대자동차노조 위원장, 전 민주노총 금속노조 위원장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