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을 좋아한 두 작곡가
    [클래식 음악 이야기] 클로드 드뷔시와 모리스 라벨
        2014년 08월 22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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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말. 말.

     “음악은 바람, 하늘, 바다처럼 무한한 것들이 용솟음쳐 나오는 자유로운 예술이다. 그것을 학문적인 틀 속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드뷔시)

    “예술작품은 규칙을 만들지 않는다. 그 규칙들은 예술작품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드뷔시)

    “나는 늘 물 위에 떠 있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이다. 그는 “수련”(Water Lilies)과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1873)이로 유명하다.

    이들 작품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아침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강렬한 태양, 아련히 보이는 항구의 풍경,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 바다 위의 잔물결에 비치는 태양. 모네는 고정된 물체보다는 빛에 따라 민감하게 변화되는 자연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시간마다 바뀌는 빛의 변화가 다양하고 황홀한 색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림의 형태가 희미한 경계선과 복잡하게 얽힌 색조를 강조한다. 여기서 그의 “인상”이란 “순간”을 말한다. “첫 인상,” “첫 느낌,” 즉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중시하였기에 그 어떤 형식과 규칙에 따르지 않고 있다. 빛에 비춰진 물을 본 “순간”적인 느낌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인상주의 작품은 탄생된다.

    화폭에서의 희미한 경계선, 복잡한 색감과 색조가 과연 음악(소리)에서도 표현될 수 있을까. 드뷔시(Claude Debussy, 1862-1918)는 음악이 회화보다 더 생생한 표현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음악은 모든 종류의 “색깔”과 “빛”을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움직임”까지도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형적인 음악형식과 규칙에 구애받지 않은 드뷔시의 행태는 몇몇 그의 일화에서도 나타난다.

    하루는 그가 강단에 올라가 피아노에서 각종 다양한 화음 덩어리와 분출하는 아르페지오Arpeggio(화음을 구성하는 음들이 분산되어 배열되는 분산화음의 일종)와 일반적으로 두음을 빠르게 반복하여 연주 하는 트릴Trill을 양손으로 동시에 연주하는 3음 트릴 등으로 과감하고 격렬한 화음들을 만들어냈다. 이때 교장선생이 들이닥쳐서 중단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뒤랑Emile Durand 선생이 화성법의 규칙을 어긴 채 풀어간 드뷔시의 문제를 보며 물었다. “이 불협화음이 해결이 안 돼? 넌 도대체 어떤 법칙에 의거해서 이렇게 풀어온 거야?” 드뷔시는 “제 맘이지요!”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나는 열려진 창공의 세계를 위하여 특별히 작곡한, 그런 종류의 음악을 상상할 수 있다. … 어떤 화성 진행은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음악회 장에서는 비정상적인 소리로 들리겠지만 열려진 창공의 세계에서는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그동안 음악을 방해했던 것들, 즉 감정의 메마름, 지나치게 기계적인 형식과 조성개념, 이러한 것들을 추방해 버릴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작곡기법이 여실이 드러난 작품이 바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Prelude a l’après-midi d’un faune for orchestra>(1894)이다. 이 작품은 드뷔시가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시 <목신의 오후L,’Apres-midi d’un faune>를 보고 작곡했다. 덥고 나른한 여름 날 오후 나무 그늘에서 졸린 목신Faune은 잠에서 깨어나 깊은 생각에 잠긴다.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지나간 사랑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드뷔시는 다양한 음색을 자아내는 대규모 오케스트라를 사용했다. 플룻으로 연주되는 주제는 반음계적으로 자유롭게 오르내리면서 중세시대의 교회선법, 온음음계, 동양의 5음계(베트남, 캄보디아, 자바음악), 3화음뿐 아니라 7화음, 9화음, 11화음 등으로 쌓아올려 애매한 조성을 형성하였다. 그는 화음 뿐 아니라 불규칙한 리듬, 유동적 템포, 불분명한 형식으로 진행시켜 <목신의 오후>의 시내용에 적절한 몽롱하고 나른 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드뷔시가 음악이 여러 종류의 ‘색깔’과 ‘빛’을 표현하려 했다면,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물의 유희Jeux d’Eau>(1901)에서 ‘움직임’을 표현했다. 라벨은 하늘로 뿜어내는 분수가 햇빛을 받아 사라져가는 물방울의 모습을 그려냈다.

    리스트의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1830-1877) 중 ‘에스테장의 분수Les Jeux d’eaux à la Villa d’Este’는 라벨에게 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직접적인 작곡 동기는 앙리 드 레니에Henri de Regnier(1864-1936)의 시 모음집에서 발췌한 “물의 신이 그를 간질이는 물방울을 보며 웃는다”라는 구절이었다.

    <물의 유희>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아르페지오Arpeggio, 레가토Legato(부드럽게 연결하는 방식), 스타카토Staccato(끊어서 연주하는 방식), 트릴Trill, 글리산도Glissando(피아노를 손으로 쭉 내려 긋는 것) 등을 이용하여 다양한 물방울을 표현한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단순히 비슷한 소리만 만든 것이 아니라, 물방울의 움직임을 악보에서 시각적. 청각적으로 구성했다는 점이 놀랍다.

    이러한 악보의 시각화는 14세기 세속음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악보는 단순히 듣기 위한, 청각음악의 수단으로서의 역할 그 이상이었다.

    예를 들어 돌림노래가 원모양의 오선에 기보되기도 하고, 오선을 하트 모양으로 그려 사랑 노래를 시각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악보의 시각적 효과는 르네상스 시대까지 계속된다. 이 시대에 유행한 ‘무지카 레세르바타Musica Reservata’라는 기법은 특히 음악과 가사의 밀접한 연관성을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이 기법은 가사의 의미를 음으로 표현하고자 한 일종의 ‘가사 그리기text painting, tone painting, word painting’였다. 그림이나 가사의 의미와 분위기를 마치 눈앞에서 보이듯이 생생하게 청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가사의 의미가 음악에 함축되어 있는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다. 라벨의 <물의 유희>는 가사가 아닌 물방울의 ‘움직임’을 악보에 시각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그 움직임을 다시 음화시켰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드비쉬와 라벨

    클로드 드비쉬(왼쪽)와 모리스 라벨

    라벨 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볼레로Bolero>(1928)이다. 이 곡의 무엇이 그렇게도 우리의 뇌리를 때리고 가슴에 와 닿을까. 그것은 작품의 반복되는 강렬한 리듬감이다. 라벨은 이 작품에서 하나의 일정한 음형을 유지하면서 악곡 전체에 걸쳐 리듬의 변화나 다른 악기의 삽입 없이 되풀이했다.

    약 15분 동안 100번 이상 계속되는 오스티나토Ostinato(짧게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리듬) 리듬과 단 한 개의 주제가 전개된다. 주제가 반복될 때마다 악기를 바꿔가며 다양한 관현악적 색채를 띤다.(1부(마디 1-75): 주제, 제 1변주; 2부(마디 75-147): 제 2-3변주; 3부(마디 147-219): 제 4-5변주; 4부(마디 219-291): 6-7변주; 5부 (마디 291-340): 8변주)

    사실 <볼레로>는 이후 다가올 미니멀리즘Minimalism(1960-1990)을 예견한 작품이기도 하다. 매우 제한된 재료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단순함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은 미국의 시각예술과 음악을 중심으로 모든 기교를 지양하고 근본적인 것을 표현하는 짧은 악구의 반복, 일관된 박자, 일정한 화성 등으로 진행되는 음악이다.

    이러한 규칙성과 단순성 때문에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을 “가장 완벽한 시계장인”이라고 비꼬아 말하기도 했다.

    드뷔시는 논리보다는 감각적 느낌을 강조하였다. 음악적 ‘인상주의’라 불리는 그의 음악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조성체계를 벗어난 불분명하고 애매한 화성, 자유로운 형식, 다양한 음악적 색채감등이 특징이다. 드뷔시는 일종의 분위기를 연출 하려는 음향이 주는 ‘표현적 효과’ 혹은 ‘색채감’에 주목하여 묘사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주선율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느낌’, ‘감각’, ‘표현’을 중요시 한 드뷔시 작품에는 협주곡이 없다.

    반면 라벨은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G major, D major)을 작곡했다. G장조 협주곡의 1악장(알레그라멘테Allegramente)은 소나타 형식으로, 2악장(아다지오 아사이Adagio Assai)은 3부 형식으로, 3악장은 화려한 프레스토로서 피아노와 타악기가 조화를 이루며 결말을 맺는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D장조)은 제1차 세계대전에 오른손을 잃은 오스트리아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Paul Wittgenstein(1887-1961, 분석철학의 대가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의 형)의 위촉으로 작곡된 작품이다.

    드뷔시와 라벨은 다 문학작품(시)에서 영감을 얻은 까닭에 낭만주의적인 성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기 서로 다른 독특한 음색을 창출해 냈다.

    드뷔시는 다양한 음색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구사했으며, 라벨은 인상주의 표현법만 차용한 과거(바로크, 고전, 낭만), 현재, 미래를 모두 넘나든 작곡가이다. 조성에 대한 라벨의 감각 또한 확고하고, 화성의 움직임도 명확한 윤곽을 보인다. 그러므로 라벨의 선율은 인지하기 쉽고 분명하다.

    하루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이 드뷔시에게 오페라를 의뢰했다. “언제까지 완성하면 되겠습니까?” “다음 시즌 개막 공연에 올리려고 하니 3개월 정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자 드뷔시는 어이없다는 듯 “3개월! 작곡 중 두 가지 화음이 생겨났을 때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 결정하는 데만도 3개월이 걸리는데.”

    드뷔시는 자신의 음악이 ‘인상주의’ 음악이라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상주의 회화를 모방할 의도가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느린 작곡 스타일로는 모네를 모방할 수도 없었다. 모네는 수시로 변화하는 빛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표현하는 데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드뷔시는 일본인 가스시카 후쿠사이가 그린 <카나가와 오키나미우라>에서 영감을 받아 ‘교향적 스케치trois esquisses symphoniques pour orchestre’라는 부제가 붙은 관현악 작품 <바다La Mer>(1903-1905)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악장: De l’aube à midi sur la mer (바다 위의 새벽부터 한낮까지: 새벽에 태양이 장엄하게 떠오르며 바다를 비추는 모습을 묘사) 2악장: Jeux de vagues (파도의 유희: 생성과 소멸과 함께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바다의 역동적인 모습을 묘사) 3악장: Dialogue du vent et de la mer (바람과 바다의 대화: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구름과 바람에 일렁이는 바다의 모습을 묘사)

    라벨은 본의 아니게 드뷔시의 아류라는 오해를 받아서 드뷔시와 그다지 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벨은 드뷔시의 <야상곡Trois Nocturnes>(1899)을 네 손을 위한 피아노곡으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편곡하였다.

    드뷔시와 라벨의 공통점을 굳이 찾자면, 둘 다 ‘물’을 좋아한 작곡가였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필자소개
    한양대 음악대학 기악과와 동대학원 졸업. 미국 이스턴일리노이대 피아노석사, 아이오와대 음악학석사, 위스콘신대 음악이론 철학박사. 한양대 음악연구소 연구원, 청담러닝 뉴미디어 콘테츠 페르소나 연구개발 연구원 역임, 현재 서울대 출강. ‘20세기 작곡가 연구’(공저),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번역),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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