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화의 비극
    [산하의 가전사]냉혈한 같은 한국 현대사
        2014년 08월 20일 02: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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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팝송에는 한마디로 문외한이야. 특히 팝송에 특출한 관심과 깊이가 있어 뵈는 네가 언젠가 팝송 제목을 주워 섬길 때 솔직히 열에 하나 둘 정도만 알아들었다. 멜로디조차 낯설어서 아항~~ 이거 하면서 아는체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찔렸던지.

    한창 음악을 듣던 청소년기에 나는 매우 편식을 즐겼는데 그 편식의 대상은 영화음악이었어. 특히 심야에 방송된 ‘김세원의 영화음악실’은 나의 문화적 지평을 넓히고 졸음을 쫓는 소중한 시간이었지. 그 전까지는 실컷 졸다가도 그 시간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해졌던 기억.

    그런데 영화음악실의 주인 김세원씨는 아버지를 오래 전에 잃었다. 돌아가신 게 아니라 일찌감치 생이별을 했던 거지. 그녀의 아버지는 김순남.

    이름은 순해 보이지만 한때 북한의 국가처럼 불리웠고 빨치산이나 인민군들이 즐겨 부른 좀 험악한 노래 <인민항쟁가>의 작곡가로서 월북한 음악가였거든.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 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 친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서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달라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우리의 6.25 노래를 연상케 하는 이 증오와 분노 넘치는 노래의 작사가는 누굴까? 오늘 얘기할 시인 임화다.

    임화

    임화(사진=위키피디아)

    <임화- 그들의 문학과 생애>(한길) 출판사 서평에 보면 그는 이렇게 소개돼. “현대문학사를 통틀어 헤겔적 의미에서 임화만큼 문제적인 인물은 많지 않다.”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에 촘촘히 박힌 쟁쟁한 문인들의 이름 가운데 ‘문제적’ 인물이라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한다는 얘기.

    무엇보다 그는 천재였어. ‘조선의 랭보’에 비유되기도 했거니와 시나 비평 등 문학뿐 아니라 연극이나 영화 등에까지도 발을 뻗친 팔방미인이었지. 영화 시나리오 작업 정도가 아니라 배우로도 영화에 출연하여 “조선의 루돌프 발렌티노” 소리를 들었거든.

    루돌프 발렌티노로 말씀 드릴 것 같으면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배우로서 섹시가이이자 로맨틱가이자 쿨가이이자 터프가이이자 하여간 좋은 말은 다 갖다붙여도 되는 배우야.

    그러니 임화의 외모 또한 짐작할 수 있지 않겠니. 내가 문래동 장동건을 운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지. 뭐 보성고보 시절부터 인근 숙명여고 학생들 사이에 ‘연애박사’에 ‘아이노꼬’ (백인 혼혈)로 불리웠다니 뭐 불을 보듯 뻔한 얘기.

    열일곱 살 때 집안이 파산하여 다니던 보성고보를 때려치운 뒤 그에게 위안이 된 건 책이었다고 해. 충무로 일대의 일본인 거리에서 그는 게걸스럽게 책을 읽어 치우는 한편 다다이즘에 매료돼 ‘임다다’로 스스로를 일컫기도 했다지.

    또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문학적 재질을 통해 문학 동료들과 교우 관계를 갖게 되고 <빼앗긴 글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 우리가 국어 시간에 그의 작품보다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이라는 통탄으로만 배웠던 박영희 등등과 교류하면서 KAPF 동인으로 활동하고 나이 스물 넷에 그 쟁쟁한 이름들 사이에서 KAPF 서기장으로 떠올랐을 정도니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니.

    뭐 그의 문학적 성과에 대해서는 내가 더 할 얘기 없으니 그만하고, 그렇게 천재에 미남에 정치력까지 있는 이 남자에 어찌 사랑이 빠지지 않았겠니. 연애 사건은 일일이 짚을 수도 없으니 굵직한 두 명의 아내만 얘기해 보자.

    그의 첫 아내는 KAPF 동료였던 이북만의 여동생 이귀남이엇어. 일본 동경의 이북만 집에 얹혀 살던 그가 친구 동생과 정분이 난 거지. 이 이귀례 역시 무산자 연극반에서 활약하는 강경 사회주의자였고. “귀남이라는 이름이 촌스러우니 귀례로 바꾸시오.” 해서 이름을 바꾼 이귀례와 임화는 살림을 차린다. 결혼식도 하지 않았어.

    이귀례의 말을 들어보자. “프롤레타리아 입장에서 혼인식이란 형식적 허례를 갖출 필요가 없다는 견지에서 그만두었다.” 이런 “혁명 전사들의 동지적 결합”이라니.

    이후 KAPF에 대한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자 임화는 카프 해산계를 내는 등 굴복하는 모습을 보였고 글쟁이 임화보다 더욱 철저한 사회주의자였던 이귀례는 단호하게 임화를 내쳐 버렸다고 해.

    소설가 김성동씨의 표현에 따르면 이귀례는 임화를 “카트쳐” 버렸지. 후일 인민군 소장 계급장을 달고 남한에 내려왔던 임화가 딸을 찾았지만 옛 아내와 딸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지.

    그 슬픔을 드러낸 시가 “너 어디에 있느냐”야. 나는 임화의 시 몇 편 중에선 이게 제일 느낌이 좋더라.

    “한밤중 어느 먼 하늘에 바람이 울어 / 새도록 잦지 않거든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와 /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 항상 마음 아프던 너의 엄마와 어린 동생이/ 너를 생각하여 / 잠 못 이루는 줄 알어라. 사랑하는 나의 아이야 / 너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느냐.”

    여기서 나오는 ‘엄마’는 이귀례인지 아니면 임화가 재혼한 상대 소설가 지하련인지는 몰라도 ‘어린 동생’은 지하련과 임화 사이에 태어난 아들 원배일 거야.

    임화는 폐결핵으로 마산에 내려가 요양했는데 여기서 지하련(필명이고 본명은 이현욱)을 만나게 돼. 지하련은 임화를 헌신적으로 간호하며 임화의 마음을 끌어냈고 둘은 결혼에 골인하지.

    물론 아이 딸린 이혼남과 결혼하겠다는 소리에 큰오빠한테 뺨을 맞는 등 집안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서. 그리고 혼인신고 4일만에 아들을 낳는 등 속도위반을 곁들이고서. 1938년 임화가 쓴 ‘내 애인의 면영(面影)’의 애인은 이 지하련이었지.

    “나의 애인은 역시 아름답습니다. 옷에 까만 외투를 입고 조그만 발에는 아담한 구두를 신었습니다. 이따금 버선 위에 고무신을 바꿔 신으면 짧은 발에 흰 발등이 살찐 비둘기 가슴처럼 포동포동합니다. 나는 그의 귀여운 발이 멀리 갔다가 나의 집 처마 아래 참새처럼 찾아드는 고운 걸음걸이를 한량없이 사랑합니다……. 사실 그의 입은 모든 사람의 그것처럼 먹기 위한 기관의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입뿐 아니라 그의 얼굴의 모든 기관이 그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다지 크지 않은 동체(胴體) 위에 완연 아름다운 조각의 콤플렉스처럼 희고 동근 목 위에 받쳐 있는 갸름한 얼굴은 생물 유기체의 한 부분이라기엔 너무도 아름답고 지혜롭습니다. ” 콩깍지가 임화의 눈 주변에 아주 두텁게 씌인 것을 알 수 있지.

    임화는 그가 열렬히 추종하던, 거의 동성애적 감정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숭배하던 박헌영을 따라 월북해. 남쪽 바닷가 마산 출신의 지하련도 남편을 따라 38선을 넘는다.

    임화는 전쟁이 난 뒤 서울 땅을 밟았고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북한에서 그의 운명은 길지 못했어. 박헌영 등 남로당 출신들이 싹쓸이되면서 임화 역시 ‘미제의 고용 간첩’으로 낙인찍혔고 (하여간 남이나 북이나 상대방 간첩으로 몰아 죽이는 이 더러운 역사) 그가 슬픔 속에 지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인민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염세적인 시로 매도됐고 한설야, 이기영 등 김일성의 총애를 받은 동료 작가들에게 철저하게 비판받는다.

    나이 마흔 다섯. 딱 내 나이 때 이 천재는 쓰고 있던 안경알을 깨 동맥을 그어 자살을 기도했다가 그나마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53년 8월 6일 총살당했다고 해.

    안된 건 지하련이었지. 만주로 피난가 있던 지하련은 남편의 처형 소식을 듣고 정신이 나가버린 채 평양으로 들어왔지만 시신조차 제대로 거둘 수가 없었다고 해. 한때 “우리가 정을 속삭일 때 나를 사랑스럽다 불렀”고 “멀리 떨어졌을 때엔 반드시 ‘미더운 이’라 불렀던”, “서로 사랑함을 축복했고 서로 제 의무에 충성됨을 감사”했으며, 그런 때문에 “항상 우리가 비둘기처럼 사랑함을 경계”했던 (임화, 윗글 중) 남편의 죽음은 고향도 가족도 버리고 월북한 지하련의 정신을 무너뜨렸지.

    지하련은 치마끈도 제대로 묶지 않은 채 평양 이곳 저곳을 헤매며 남편의 행방을 묻다가 평안북도 희천의 수용소로 끌려가서 거기서 병사했다고 해.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임화와 지하련의 이름은 남과 북 모두에서 완벽하게 묻혔다. 우리나라 현대사만큼 지독한 냉혈한이 또 있을지 몰라.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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