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대구지하철 참사
    '비용절감'에 뒷전이 된 '안전'
    150년 지하철 역사에서 100명 이상 대형참사 2번 일어난 나라
        2014년 08월 18일 10: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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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재난사고가 유난히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사건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지 않는다. 시장과 이윤이 인간의 생명과 존엄보다 더 중요한 가치와 기준이 되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 또다른 대형사고를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호 특별법과 철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이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다. 이번에 세월호 참사 이전 벌어졌던 한국과 해외 대형 재난사고의 발생 원인과 사회적 배경을 몇 개 사건을 통해 돌아보는 글을 게재한다. 사회진보연대에서 펴낸 소책자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에 담긴 내용이다. 사회진보연대의 양해를 얻어 그 중 한국과 해외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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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2 링크

    대구에서는 유독 지하철과 관련한 사고가 많았다. 지하철 공사 도중에 일어난 가스폭발사고(1995), 지반붕괴사고(2000)에 이어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까지, 총 세 차례나 대형 사고를 경험했다. 특히 이 중 1995년 폭발사고와 2003년 화재사고는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사고다.

    1863년 영국에서 지하철이 처음 개통된 이후, 전 세계 지하철 사고 중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대형 참사는 총 세 건인데, 그 중 2건이 한국, 대구에서 일어났다.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라면, 지하철의 안전에 대해서 좀 더 민감하고, 제대로 된 대책이 세워질 법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 이후의 변화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모든 책임은 기관사가 졌다

    대구지하철 사고는 기관사들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기관사 및 관제사는 업무상 과실치사죄를 적용받아 4-5년의 금고형을 받았다.

    특히 초동대처가 늦어 피해자가 다수 발생한 1080호 열차의 기관사는, 사고 직후에 열차 전원을 통제하는 ‘마스콘키’를 뽑아 도망간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았을 뿐더러 법적으로도 최고형을 받았다.

    그런데 ‘마스콘키’는 본래 사고가 일어나 기관사가 자리를 벗어날 때 뽑아서 가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기관사 외의 다른 사람이 전동차를 조작하여 더 큰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함이다. 또 이미 전동차 내의 회로가 화재로 손상되었기 때문에 마스콘키가 꽂혀있었어도 전동차문을 조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사고 조사가 거의 마무리 되었을 때는, 사고를 참사로 키운 이유로 1인 승무제가 주되게 지적되었다. 전동차 맨 뒤에 차장만 타고 있었더라면 전동차 문이 잠겨 대피하지 못한 5, 6호차 승객들을 구할 수 있었을 거라는 지적 때문이었다.

    이렇게 1인승무제 아래서 기관사가 혼자 위급상황 대처, 승객대피, 사령교신 등을 모두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나 비상유도등, 피난로, 소화설비 어느 하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대피가 어려웠던 점은 대구지하철공사의 책임이라 볼 수 있지만, 결국 회사의 책임자는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은 기소가 되긴 했지만, 사고의 직접적 책임이 아니라 사고 직후 물청소를 지시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소가 되었다. 증거인멸 혐의였다. 물청소는 유류품 및 실종자 시신이 다 수습되기 전에 이루어져 유족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지만,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은 대법원까지 가는 항소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책임자 처벌에서도 드러난 힘의 차이는 향후 재발방지대책에서도 드러난다.

    대구-지하철참사

    대구지하철 참사 당시의 자료사진

    선별된 대책

    ① 전동차 내장재만 바꾸면 안전한가?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 이후 3년여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전국의 전동차 내장재가 불연재로 교체되었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당시 내장재가 모두 가연성 소재여서 화재가 삽시간에 번졌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비상유도등, 소화설비 등 방호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바탕으로, 각 역사마다 승객구호 장비함이 마련되어 방독면 등 방호도구가 비치되었다. 그러나 방호도구는 승객수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또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 중 94%가 품질보증기간이 지난 것이라고 한다. 사고가 났으니 비치는 해놓고, 관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화재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 부분은 관리소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안전에 역행했다. 특히 전동차 내구연한을 빠르게 늘렸다. 2009년 도시철도 차량 내구연한의 연장기간을 최대 25년에서 40년으로 완화하더니, 2012년에는 내구연한 규정을 아예 삭제해버렸다.

    최근 서울지하철 상왕십리역에서 일어난 사고는 신호기 오작동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런데 지하철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가 난 전동차 중 한 대라도 자동시스템에 맞는 전동차였다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수동시스템용 신호기가 고장나 자동 신호기밖에 작동하지 않았는데, 하필 두 열차 모두 수동운전 전동차였던 것이다. 서울지하철은 운전체계는 모두 자동시스템이지만 전동차는 수동운전인 경우가 50%나 되는데, 이는 오래된 전동차를 교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② 안전인력 확보는 역주행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당시 지적되었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안전인력의 부족과 1인 승무였다.

    대부분의 희생자가 발생한 1080호 기관차는 이미 화재가 발생한 후 연기가 꽉 찬 승강장에 들어왔는데, 기관사는 차량 뒤쪽의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전기가 계속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전동차를 출발시키려 노력하다 승객들을 대피시킬 타이밍을 놓쳤다.

    ‘만약 열차 뒤쪽에 차장이 타고 있었다면, 만약 승강장에 안전요원이 있었다면…’ 이란 후회와 지적이 빗발쳤다. 정부 역시 1인 승무가 사고를 참사로 키운 원인 중 하나라고 분석했지만, 사고 이후 조치는 정반대였다.

    승객의 교통카드와 자동화기기 이용을 유도하고, 매표소를 없애서 남은 인력으로 승강장 안전요원과 역사 안의 안전관리인력을 확보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안전인력의 확보가 아니라 근무인원의 대거 감축으로 귀결되었다.

    이제 지하철에서는 안전인력의 추가확보는커녕, 무인역사·무인운전시스템이 확산되는 추세다. 현재 신분당선·김해 경전철·용인 경전철·대전 3호선 등이 무인운전시스템으로 운행 중이다. 올 10월 개통하는 대구지하철 3호선에도 무인역사·무인운전시스템이 도입될 예정이며, 2016년 개통 예정인 인천지하철 2호선도 마찬가지다.

    열차에는 기관사가 없고, 역무원은 역 3-4개 당 1명씩 배치된다. 위급상황 발생 시 대처할 인력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승객들 스스로 사고에 대처하고 탈출해야 하는 것이다.

    ③ 노조 통제 위한 철도안전법?

    참사 이듬해인 2004년, 철도안전법이 새롭게 제정된다. 이 법에서는 철도종사자의 면허관리와 시설검사에 대한 기준이 정해져있는데, 안전관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내용이 없고 기관사 면허제만을 새롭게 도입한 법이라고 비판받았다.

    실제 철도안전법에 규정된 안전관리 조항들은 폐지되거나 완화되고 있다. 내구연한도, 철도용품의 품질유효기간도 폐지되었다. 또한 내구연한이 폐지되면서 정밀검사 내용도 함께 폐지되어 버렸다. 모두 이명박 정부 하에서 ‘규제완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새롭게 추가된 기관사 면허제는 노조 통제를 위한 법이다. 본래 자체 양성해왔던 기관사를 면허제를 통해 국가가 관리한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파업 시 대체인력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관사를 양성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국가 양성 기관사가 더 교육을 철저히 받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2010년 철도안전법은 일반인들의 철도면허 취득을 위해 필요했던 ‘이론교육’ 430시간과 ‘기능교육’ 410시간 중 이론교육 430시간을 아예 없애버려 면허 취득을 점점 쉽게 하고 있다(뉴시스, 2013년 10월 25일자).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의 대응

    사고 이후의 대책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들로 가득했지만,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는 한국에서 노동조합과 시민대책위, 유가족들이 공동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한 거의 유일한 사례이다.

    우선 힘이 있는 노동조합이 있었고, 이미 몇 차례 사고를 겪은 대구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의 문제의식이 있었다.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이 대형 사고를 맞닥뜨린 뒤 자신들의 역할이 필요함을 깨닫고 첫걸음을 디딘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용절감을 위해 안전을 희생시키는 흐름 자체를 바꿀 수는 없었지만, 이들의 대응과 싸움은 얼마간의 성과를 낳았다.

    별 문제 없이 이루어진 것 같은 전동차 내장재 교체도 약속한 시기를 지키지 않는 지하철공사에 대한 수없는 항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고가 일어났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바뀐 것은 없었다. 이들의 노력으로 우리는 약간의 변화라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대응

    사고 이후 지하철과 철도노동자들은 1인승무제, 역 민간위탁, 기술·차량의 외주용역 등을 중단하고, 안전 보장을 목표로 공공정책을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대구지하철 참사의 진상규명과 안전대책마련을 위해 안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할 것, 전동차 불연 내장재로 전면교체, 역사와 전동차의 방재 설비에 대한 전면 개선 등도 노동조합의 요구사안이었다.

    보통 노동조합은 임금 외의 여러 노동조건은 단체협약을 통해 보장받는데, 지하철노동조합은 사고 이후 안전문제에 대해서 특별히 다시 단체협약을 체결해달라고 요구했다.

    요구사항은 계속 묵살당하다, 결국 2003년 6월 대구·부산·인천지하철 노동조합의 파업을 거치고 나서야 일부가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핵심요구였던 2인 승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원대비 부족인력 77명을 채용하는 데 그쳤다.

    이외에 노동조합은 △대구지하철공사 안전위원회 설치·운영 △전동차 내장재 2005년 말까지 불연재로 교체 △역사·사령·기관사간의 무선교신장비, 경보장치 등 안전에 필요한 사항 시행과 예산확보 △장애인 대비용 방연마스크 및 청각, 시각, 경보장치 설치 등을 약속받는다.

    대구지하철 노동조합은 그 이듬해인 2004년에도 파업을 벌인다. 지하철 2호선 개통을 앞두고 안전 운행과 2호선 역사 민간위탁 반대를 요구한 파업이었다. 대구시가 2호선에 근무할 인력을 600여 명 줄이고, 역사 12곳과 전동차 정비를 민간업체에 넘기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구지하철 사고를 겪은 지하철공사가 진지하게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지하철공사는 노동조합과의 대화에 제대로 임할 생각이 없었고, 대구시장도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노동조합은 결국 88일이라는, 지방공기업 사상 최장파업을 했지만 성과 없이 복귀하게 된다.

    사회운동의 대응

    화재 다음날인 2월 19일 대구지역 37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시민사회단체대책위원회(이하 시민대책위)가 발족한다. 이렇게 신속하게 시민대책위가 구성될 수 있었던 것에는 1995, 2000년 두 차례나 지하철 사고 당시에도 운동단체들이 이에 대응했던 경험, 축적된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에는 성명발표 정도의 활동밖에 하지 못했던 시민대책위는 2000년 지반붕괴사고에는 구체적인 성과를 도출한다. 당시 대구시는 운동단체들이 사고원인규명을 위해 객관적인 조사기관의 선정을 요구했음에도, 시공사인 삼성물산과 임의로 결정된 한국건설기술안전협회에 사고원인규명을 위한 용역을 발주하였다.

    이 협회의 용역조사결과는 붕괴 사고를 기술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이상(異常)토압’에 의한 불가항력적인 사고라고 평가하였고, 대구시장과 대구시 도시건설국장은 이 평가 결과를 기정사실화하려 했다.

    이에 대구지역의 운동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자체적으로 확보한 자료에 의거해 다른 결과를 도출한다. 이를 가지고 대구시장의 퇴진까지 요구하며 재조사를 요구한 끝에야 대구시는 붕괴사고에 대한 조사의 재용역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사고는 인재로 밝혀졌고 책임자들을 구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2003년에도 시민대책위는 자체 진상조사단과 법률지원단을 구성했고, 사고 다음날 사고 현장 물청소를 실시하고 지하철 운행을 재개했던 대구시에 맞서 자체적인 진상조사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조사결과가 거의 그대로 사고 원인으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시민대책위는 희생자가족대책위원회와 대부분의 추모대회를 공동으로 기획하고 집행하였고, 3월 15일에 가족대책위와 함께 대구지하철 1호선 대구교대역에서 지하철 안전보장을 요구하며 전동차를 점거하고 지하철 운행을 강제로 저지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시민대책위에 참가하고 있던 몇몇 시민단체의 대표들은 개인자격으로 지하철 사고의 수습과 문제 해결을 위해 조직된 대구시 의사결정기구, ‘실종자인정사망 심사위원회’와 ‘추모공원 추진위원회’ 등에 참여했으며 실종자 사망 인정을 이끌어내는 데 나름의 기여를 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시민대책위의 공동대응은 오래가지 못했는데, 조해녕 대구시장 퇴진문제로 대책위 내부가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사고 두 달 뒤인 2003년 4월 16일 대책위 참가 65개 단체 중 15대 단체만이 참가하여 ‘조해녕시장 퇴진 및 대구시 개혁을 위한 시민운동본부’가 출범하고, 시민대책위의 활동은 흐지부지 되어버린다. 이후 유가족대책위와 일부 활동가들이 기나긴 싸움을 지속하게 되었다.

    비용절감보다 안전을 우선하는 정책전환이 절실하다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에서 노동조합과 사회운동의 대응은 유의미한 첫걸음이었지만, 목표했던 바를 모두 달성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다. 전국을 뒤흔들었던 사고였으나 사회는 이를 너무 빨리 잊었다.

    유가족들이 안전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지하철을 점거하고, 서울에 상경해 투쟁을 호소하고, 공사 사장이 무죄판결을 받았을 때 울부짖었던 사실은 논문이나 신문기사 한 구석, 몇몇 단체 활동가들의 기억 저편에만 남아있다. 기억을 둘러싼 투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먼 기억으로만 대구지하철 화재를 기억하는 사이, 지하철·철도를 둘러싼 안전대책은 후퇴했다. 10년 동안 정부와 지하철공사는 비용절감을 이유로 내구연한을 없애버리고, 인력을 줄여 검수주기를 늘리고, 역무원을 줄이다 못해 이제는 무인운전시스템과 무인역사가 도입되었다.

    지난 5월 29일, 민주노총이 진행한 토론회에 서울지하철노조 수석부위원장이 참석했다.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진상조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이다. 그는 ‘대구지하철 화재 후 비용절감을 최우선으로 하는 지하철 운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노동조합에 대해, 지하철공사는 같은 사고가 또 일어나겠냐고 답했다’고 증언했다. 아무리 그런 문제제기를 해봤자 이건 공사차원에서 거스를 수 있는 흐름이 아니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 ‘거스를 수 없는 흐름’ 때문에, 오늘도 하루 평균 이용객 800만 명인 지하철의 안전은 위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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