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유럽 혁명 역사기록의 보고
    [책소개] 『크로포트킨 자서전』(표트르 크로포트킨/ 우물이 있는 집)
        2014년 08월 17일 12: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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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다. 근대 유럽 혁명기를 실감할 수 있는 역사 기록의 보고(寶庫)이다. 농노들의 삶에서부터 귀족의 생활모습까지 모든 계층의 생활상이 망라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당시 각 유럽국가들의 정치 상황과 혁명가들의 실상이 눈 앞에 사실적으로 펼쳐진다.

    그러한 상황이 어떤 커다란 그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디테일한 자그마한 그림들도 이루어져 있다. 그 디테일한 자그마한 그림들이 모여서 근대 유럽 혁명기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크로포트킨의 객관적인 시각과 탁월한 묘사능력은 이 책 곳곳에서 빛나고 있다.

    다음의 한 예를 보자.

    파리코뮌 민중봉기 때의 일이다. 한 소년전사가 베르사유 군(軍) 장교에게 붙잡혔다. 소년은 총살당하기 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은시계를 가까이에 살고 있는 가난한 어머니에게 갖다 주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순간 불쌍한 생각이 든 장교는 속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소년을 풀어주었다. 그런데 30분이 지난 후 되돌아온 소년은 돌담 밑에 이미 총살당해 쓰러져 있는 시체들 사이에 서서 “자, 이제 죽을 수 있어요.” 하고 말했다. 소년은 적과의 약속일망정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12발의 탄환은 어린 소년의 온몸을 관통했다

    이 한 장면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다. 크로포트킨의 묘사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독자들에게 다가간다. 책 속에서는 주옥 같은 크로포트킨의 묘사를 찾아내서 읽는 것 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만한 가치를 느끼게 만든다.

    크로포트킨

    세계 5대 자서전 중의 하나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와 더불어 세계 5대 자서전 중의 하나이다.

    위인들의 자서전은 대체로 세 가지 중 하나다. “이제까지 나는 길을 잃고 헤매었다. 그러다 마침내 참다운 길을 발견했다.”(아우구스티누스)이거나, “나는 정말로 나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나보다 낫다고 감히 나설 수 있는 자가 누구냐.”(루소)이거나, “천재는 바로 이런 좋은 환경에서 내면으로부터 서서히 발전해왔다.”(괴테)이다.

    그러나 이들과 달리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지 않고, 남의 인정을 받아 보겠다고 고군분투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자신보다는 동시대인를 차분하게 묘사하고, 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묘사한다.

    19세기의 대표적 아나키스트이자 혁명가인 크로포트킨

    크로포트킨은 19세기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지리학자이다. 아나키스트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로 분류되는데 그는 푸르동, 바쿠닌과 함께 후자에 속한다.

    그는 주옥같은 문헌들을 집필하여 유럽의 혁명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에서 활동하며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주의자들의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운동방식을 비판했다. 바쿠닌과 함께, 탈옥에 성공한 국제적인 혁명가로도 유명하다.

    지리학자로서의 면모도 출중해서 훔볼트의 북아시아에 대한 지리적 오류를 교정하고 북극해 군도의 존재를 예측하는 등 많은 연구성과를 거두었다.

     크로포트킨의 사상

    크로포트킨은 마르크스와 레닌의 ‘혁명적 독재론’을 비판했다. ‘독재권력’을 세우는 것은 그것이 혁명적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보았다. 한마디로 앞문으로 호랑이를 내쫓고, 뒷문으로는 늑대를 끌어들인 꼴이 된다는 것이다. 혁명이란 인간성의 발전을 오랫동안 저해한 모든 폭력의 폐지이다.

    그의 사상에는 봉기와 테러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다. 같은 아나키스트지만 바쿠닌 식의 테러리즘에 반대했다. 그는 혁명은 의식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이 못되며, 그런 혁명은 성공하더라도 정치혁명, 즉 권력자의 교체로 끝나고 만다는 것이었다.

    크로포트킨의 혁명이론은 경제발전이 공산주의의 토대가 된다는 마르크시즘과 다르다. 그는 ‘최소한의 에너지 소비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것’을 제창했다.

    그는 애덤 스미스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지금까지의 경제학이 부의 생산을 목표로 하는 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경제학은 인간의 욕망을 최소한의 노동으로 충족시키는 방법을 탐구하는 과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주장은 이전까지의 경제학의 약점을 찌른 것으로 지금보아도 매우 선진적이다.

    뜻밖의 ‘인터내셔널’의 역사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했던가? 근대 유럽 혁명사에서도 이러한 법칙은 관통된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의 본거지는 잘 알다시피 ‘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이었다. 초기 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를 중심으로 한 국가사회주의자들과 푸르동을 중심으로 한 비국가사회주의자들(아나키스트)이 섞여있었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국가’의 틀을 유지한 채로 노동자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자는 입장이었고 푸르동과 바쿠닌은 노동자들이 억압받는 것은 ‘국가’의 존재 때문이므로 ‘국가의 틀을 해체’하는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국가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 사이에는 혁명이론의 차이 뿐 아니라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이며 중앙집중적이었고 아나키즘은 노동자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반권위, 반교조를 주장했다.

    초기 인터내셔널에서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아나키즘을 지지했다. 이러한 사실은 인터내셔널하면 ‘마르크스’가 절대적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금의 상식과는 다른 것이다.

    마르크스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바쿠닌을 인터내셔널에서 제명한 후에도, 인터내셔널의 본부를 런던에서 미국 뉴욕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인터내셔널이 아나키스트 진영에게 장악되는 것을 염려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아나키스트 진영에 대한 지지가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회원이 거의 없는 미국으로 본부를 옮긴 것은 사실상 도피였다. 이 책에는 지금은 비주류로 여겨지는 아나키즘이 19세기 말 얼마나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를 증언한다.

    러시아 혁명이 볼세비키에 의해 성공했다고?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다. 흔히 러시아 혁명은 볼세비키에 의해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아나키스트들의 헌신적 투쟁이 있었다. 사회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혁명관이 서로 달랐으나, 아나키스트들은 혁명적 대의를 실현할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를 작은 견해 차이로 망칠 수 없다고 보고 볼세비키에 적극 협력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한마디로 러시아 혁명은 볼세비키와 아나키스트들의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세를 장악한 후 볼세비키는 자신들의 권위적 정권창출에 걸림돌이 되는 아나키스트 진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숙청을 단행했다.

    그 전부터 크로포트킨은 레닌에게 권위적 권력이 갖는 폐해에 대한 항의와 염려를 전달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러시아에서 아나키스트 진영은 볼세비키에게 궤멸되고, 크로포트킨은 사망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렴이었지만 아나키스트 진영의 비극적 말로를 전해들은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다.

    그가 죽은 지 70년 후 소련연방은 해체되었다. 크로포트킨이 염려했던 차르시대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권위주의적 중앙집중적 권력화로 인한 관료화, 창의성의 결여, 비민주주의, 자유의 결핍, 경제적 비효율성 등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권위적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을 예견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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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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