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에 부쳐
    우리의 우물에서 길어 마셔야 한다
        2014년 08월 15일 12: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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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했다. 대단한 열풍이다. 환영 일색이다. 종교지도자 중에서 이런 신드롬은 달라이라마 이래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같은 현상이 왜 일어난 것일까? 아마도 전 지구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기득권의 편이 아니라 약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들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의 권위가 상징적인 것에 머문다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열망이 투사돼 만들어진 측면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즉위 직후 최초의 남미 출신 교황이라는 점에서 더욱 환영받기는 했지만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가톨릭 내에서는 최대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계 이민의 후손인데다, 1970년 대 말에서 80년대 초까지 집권했던 아르헨티나 군부세력에 협조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빈곤의 세계화>저자로 유명한 캐나다 경제학자 미셸 초스도프스키(Michel Chossudovsky)가 쓴 칼럼을 보면 된다. “프란치스코 1세는 워싱턴의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군부세력에 침묵 또는 방조했던 시기, 인근 남미 국가에서는 그와는 다른 행보를 했던 신부들이 있었다.

    피노체트의 학정에 시달리던 칠레에서는 라울 실바 엔리케스 추기경이 ‘빨갱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가톨릭교회는 물론이고 정교회와 개신교, 유대교까지 포괄하는 ‘정의평화위원회’를 구성해 군부통치에 저항했다.

    추기경의 영향으로 당시 칠레의 사제들은 거리에 나가 행방불명된 가족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평신도 옆에서 함께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제들이 체포되거나 고문당했고, 그 중 7명이 살해됐다.

    이런 희생 속에 1990년 피노체트가 권좌에서 물러나자 칠레 국민들은 “만약 라울 실바 추기경을 비롯한 사제들이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교회 안에서 거룩한 미사만 드렸다면, 칠레 국민이 간절히 원하던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1968년부터 1986년까지 군부가 통치했던 브라질에서는 돔 헬더 까마라 대주교가 반독재 운동의 중심이 됐다. 까마라 대주교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을 가졌던 인물로 공단과 빈민지역을 중심으로 풀뿌리 조직인 기초공동체(Christian basic communities)를 조직해 정권에 저항을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신자들과 사제들이 희생당했지만 기초공동체 운동은 진보세력의 모세혈관 역할을 하면서 2002년 노동자당(PT)이 집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남미의 주축을 이루는 세 나라 중 아르헨티나 교회만이 군부통치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협조적이었고 그 중심에 현 교황이 있었다.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당시 상황을 변명하거나 방어하는 주장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동조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정도에 그쳤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또 추기경(당시 이름 베르골리오) 시절, 동성결혼 법안 반대운동을 주도하면서 국제사면위원회(엠네스티) 등 인권단체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사기도 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현 대통령)은 동성결혼과 피임확대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에게 중세 마인드를 가진 이단 심문관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에 추기경은 2012년 성명을 통해 페르난데스 대통령을 독재를 노리는 선동꾼이라고 맞받아쳤다.

    페르난데스는 페론주의자였던 데 반해 추기경은, 쿠데타를 통해 이사벨 페론 정권을 전복한 독재자 비델라를 옹호 내지 방관했기 때문에 원래부터 관계가 소원했다.

    남미에서는 별다른 평가를 받지 못했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에게 극적인 이미지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전임자인 베네딕토 16세가 사임하고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부터다. 그는 선출 직후 성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삼았다. 프란치스코는 중세 시절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 지역의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의 벗으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리고 교황은 교회를 향해 “안온한 성전 안에만 머물며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뛰쳐나가 멍들고 상처받고 더러워진 교회를 원한다”며 “잘못될 것을 걱정하는 것보다 거짓된 안정감을 심어주는 구조 안에서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기존의 평가를 뒤집고 개혁 지향적 인물로 거듭났다.

    곧이어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자유주의에도 화살을 날려 “늙은 노숙인이 거리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건 뉴스가 안 되지만, 주식시장이 단 2포인트라도 떨어지면 뉴스가 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또 신자유주의자들과 부유층이 주장하는 이른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에 대해서는 “과거에는 유리컵에 물이 가득 차면 흘러넘쳐 가난한 사람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간다는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컵이 가득 차자 그것은 마술처럼 더 커져버렸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며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그의 행보에 미국의 극우 성향의 방송인 러시 림보는 “규제 없는 자본주의를 새로운 독재”로 정의한 교황의 권고는 마르크스주의와 같다고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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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의 프란치스코 교황

    그렇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 같은 개혁 지향적 변화는 무조건 과거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정황들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여성사제 임명이나 동성애, 낙태 같은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킬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수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신자유주의 비판도 반자본, 친노동의 측면에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종교개혁 과정에서 보였듯이 개신교에 비해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와는 이질적인 교회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역대 교황들도 자본주의가 파생시키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비판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의 현재 행보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교황의 발언과 행동이 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교황의 인기는 전임자들과 다른 특유의 소박함과 친화력에다 교황청의 치밀한 홍보 전략, 전 지구적 스타가 필요했던 언론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지구촌의 화제를 모으고 있는 프란치시코 교황의 방한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어떠할까.

    박근혜 정부는 교황 방한에 지대한 공을 들였다. 인기 절정의 전지구적인 종교계 수장을 맞이한다는 것 자체가 큰 치적인데다, 방한기간 동안 정쟁에서 벗어날 수 있고 방한 이후에도 일정기간 정국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정원 대선개입과 관련해 정의구현사제단은 물론 주교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시국선언으로 궁지에 몰렸던 상황에서 가톨릭교회와도 관계를 재정립할 수 있게 됐다. 여러 고려 끝에 광화문 광장을 내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인사난맥상으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집권 1년 반 만에 당권도 비주류에게 내준 상황에서 교황의 방문은 박근혜 대통령 개인에게 호재임에는 틀림없다.

    교황의 방한은 종교영역에 많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한국 가톨릭은 불교, 개신교에 이어 교세가 세 번째에 머물러 있지만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이후 신도가 급격히 늘어난 전례가 있다.

    실제로 1984년 문공부의 발표에서 천주교 인구는 159만여 명을 기록했으나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한 다음해인 85년 28만 명이 늘어 186만 5천명에 달했다. 1969년에서 1984년까지 매년 천주교 신도가 증가하기는 했지만 1년 사이에 이렇듯 크게 늘어난 적은 없었다. 1973년에서 1975년 사이에 22만, 80년에서 83년 사이에 40만 정도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큰 폭인 셈이다.

    이후 1985년에서 1995년까지 10년간 58.2%, 1995년에서 2005년까지는 무려 74.4%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불교포커스 2014년 8월 13일 김관태 ‘한국불교에 어떤 영향을 줄까?’ 참고)

    물론 이러한 증가는 군부독재시절 김수환 추기경과 사제단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 상대적으로 합리적이고 깨끗한 재정구조와 교회운영, 개신교와 달리 제사나 타종교에 대한 열린 자세 등도 작용했을 것이다. 현재 한국가톨릭 인구는 2012년 현재 530만을 넘었고(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발표) 2020년에는 국내 최대 종파가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 나오고 있다.

    가톨릭교회가 교황 방문을 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는 것에 대해 불교계나 개신교는 온도차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부정적이다. 우선 불교계는 공개적으로는 환영하는 듯하지만 내심으로는 “광화문은 교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으로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관련 글 링크)

    개신교의 경우 보수 쪽에서는 직접 행동을 통해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가톨릭 반대 집회에 1만여 명 운집….가톨릭은 혼합 종교이자 적그리스도”

    진보 쪽에서는 교황이 그간에 보여준 행보에 비해서는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교황의 방한이 결정되자 교황 취임 직후 보인 파격적 행보에 걸맞게 강정, 밀양, 쌍용자동차 등을 방문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는 미사에 당사자들을 초청하는 것으로 수렴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또한 장애인운동 단체와 가톨릭진보운동단체를 중심으로 꽃동네 방문 저지를 목적으로 바티칸 원정시위까지 했으나 이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장애인단체들은 꽃동네야말로 (오웅진 신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복지 자본이자 사유화된 형태의 거대 종교시설이라고 비판하면서 만약 교황이 꽃동네를 방문한다면 “종교 내 부패 스캔들을 사면하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더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에게 오랜 억압과 학대, 차별에 대한 도덕적 정당화를 부여할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 오웅진 신부는 부동산실명제 위반과 국고보조금 횡령 혐의로 검찰에 고발당한 상태다.

    꽃동네의 경우 사회적 이슈가 될 정도로 반대운동이 거셌지만 교황 방문이 성사된 것은 우선, 교권 상층부의 입장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정진석 추기경은 일찍이 꽃동네를 관할하는 청주교구장을 맡아 모친의 유해를 꽃동네에 안장하기도 했다. 또 염수정 추기경은 2014년 1월 서임 당시 이시종 충북도지사의 축하 메시지에 대해 “교황 방한이 성사된다면 꽃동네를 방문하실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할 예정”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교황의 꽃동네 방문은 또,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 시절의 인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교구 신자가 꽃동네를 소개한 후 꽃동네 측에 아르헨티나에도 분원을 설치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다. 당시 꽃동네에서도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했지만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되면서 무산됐다. 꽃동네의 아르헨티나 진출은 무산됐지만 이러한 인연으로 지난해 8월 교황은 오웅진 신부를 바티칸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막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지 모르지만 교황의 꽃동네 방문이 불러올 파장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꽃동네 방문이나 다른 일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번 교황의 방한은 철저하게 박근혜 정부와 한국 가톨릭 보수세력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2013년 교황의 브라질 방문 때에는 한국보다 치안이 훨씬 안 좋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직접 빈민지역을 방문하는 한편 방호벽 없이 행사를 치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논란이 되는 지역(밀양, 쌍용차, 강정 등)의 방문은 철저하게 배제됐고 광화문 미사에는 방호벽까지 쳐졌다. 또한 방문하는 교구들도 서울, 대전, 청주처럼 천주교 내 수구세력들이 강력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다.

    마치 전두환 정권 시절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해 군부정권에게 이용당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당시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있었기에 정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광주를 방문해 직접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다.

    크게 보아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이 진보진영에서 기대하는 만큼의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교황청 입장에서 교황의 한국 방문은 평화나 인권 같은 명제보다는 관리 차원일 가능성이 크다.

    유럽은 이미 교회가 공동화됐고 남미도 오순절 교회를 비롯해 북미 개신교회의 공세로 교세가 줄어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아시아는 오히려 교인수가 늘어나고 있는 데에다 그 중심에 한국이 있기 때문에 교세 확장을 위한 관리 차원의 방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한국 가톨릭계의 특징은 교세와 함께 보수성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한 교황 또는 교황청의 입장을 한눈에 보여주는 일로 염수정 추기경의 임명을 들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진보진영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염수정 서울대교구장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다. 전체 16개 교구 중 교인수(전체의 약 25%)나 교황청에 보내는 예산이 압도적인 상황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 가톨릭에서 총독과 유사한 역할을 하며 인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주한 교황청 대사도 보수적인 인물이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 한국은 박근혜 정부하에서 세월호, 강정, 쌍용차, 밀양을 비롯한 수많은 현장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곤경에 빠져 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열광은 내부에서 찾지 못한 해답을 외부에 기대어 찾고자 하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교황은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 2천년이라는 유구한 역사, 그리고 전 세계에 걸친 거대한 종교조직을 책임져야 하는 수장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임 베네딕토 16세의 실책으로 위기에 빠진 가톨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투입된 구원투수같은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역할을 잘 해왔고 성품도 거기에 어울린다.

    그가 현재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남미의 다른 동료들과 자신의 국민이 고난당할 때 침묵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른 나라의 문제에 구체적으로 개입할 정도의 입장은 아니다.

    남미 해방신학의 모토는 “우리의 우물에서 스스로 물을 길어 마신다”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교황의 방한에 대한 답이다

    필자소개
    씨알재단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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