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 기억되는
미국 최악의 산업재해 참사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2] 1911년 트라이앵글 화재
    2014년 08월 13일 10:5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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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등 대형 재난사고가 유난히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사건이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지 않는다. 시장과 이윤이 인간의 생명과 존엄보다 더 중요한 가치와 기준이 되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 또다른 대형사고를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호 특별법과 철저한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이 중요하고 절실한 것이다. 이번에 세월호 참사 이전 벌어졌던 한국과 해외 대형 재난사고의 발생 원인과 사회적 배경을 몇 개 사건을 통해 돌아보는 글을 게재한다. 사회진보연대에서 펴낸 소책자 <대형사고는 어떻게 반복되는가>에 담긴 내용이다. 사회진보연대의 양해를 얻어 그 중 한국과 해외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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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삼풍백화점 참사 관련 글 링크 

1911년 3월 25일 토요일이었다. 화재는 4시 40분, 퇴근시간 20분 전에 발생했다. 불은 8층의 옷감을 재단하는 기계 밑에 있는, 잘라낸 천의 남은 부분을 담는 통에서 시작되었다.

의류공장은 좁은 공간에 많은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고 가연성물질이 많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화재의 위험이 큰 공간이다. 그러나 건물에는 아무런 방화장치가 없었다. 또한 당시 일부 출구의 문은 노동자들이 옷가지를 훔쳐가거나 몰래 그곳에서 휴식 시간을 갖는 것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잠겨있었다.

공장주는 화재소식을 듣자 열쇠를 들고 먼저 탈출해버린다. 탈출구는 옥상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과 화물 엘리베이터뿐이었는데 비상계단은 부실하게 지어져 붕괴하였고 엘리베이터도 열기 때문에 중간에 작동을 멈춰버렸다.

공장은 빌딩의 8~10층에 있었는데 9층에는 화재사실이 전달되지 않았다. 소방사다리와 소방호스는 건물의 6층까지밖에 닿지 않아 화재를 진압하지 못했다. 화재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9층에서 대부분의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많은 노동자들이 불길을 피하기 위해 뛰어내려 추락사했다.

불과 15분 만에 146명이 사망한 트라이앵글 화재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산업재해로, 9·11 테러 전까지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트라이앵글1

트라이앵글 셔츠웨이스트 화재 참사(사진=위키피디아)

사고 이후의 대응

① 대중 집회

토요일 오후를 즐기고 있던 뉴욕 시민들은 소방대가 출동했음에도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했다. 비상계단이 무너지고 창문에 사람이 몰리면서 상당수 노동자들이 9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간신히 탈출한 생존자는 1층에 내려와서도 공포에 휩싸여 움직일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사람들이 위에서 계속 떨어지고, 그렇게 추락사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시민들은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사고 발생 약 열흘 뒤인 4월 5일에는 10만 명이 넘는 이들이 장례행렬에 합류했고, 건물 안에서 행렬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4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중집회는 사고에 대응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4월 5일 집회 이전에 이미 시민들과 종교 지도자, 개혁가, 그리고 교사 등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대중 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화재 안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장이 되었다. 또 이 집회를 통해 ‘공공 안전에 대한 시민위원회’(시민안전위원회)가 등장했고, 이는 뉴욕 공장조사위원회 결성에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하게 된다.

② 뉴욕 공장조사위원회의 결성과 활동

시민안전위원회는 뉴욕 주의회가 화재 예방 등 안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의회에서 공장조사위원회 구성을 위한 법률이 발의되었다. 공장조사위원회는 의회로부터 증인 소환과 공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초기 조사 범위는 9개 도시로 한정되었으나, 이후에 주 전역으로 조사범위가 확장되었고, 위원회의 활동기한 역시 1년에서 3년으로 연장된다.

공장조사위원회는 9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의원인 로버트 와그너와 알 스미스, 미국노동총연맹(AFL) 대표인 사무엘 곰퍼스, 수석 고문 변호사인 아브람 엘커스, 사회운동가이자 노동안전 전문가인 프랜시스 퍼킨스 등이 그 성원이었다. 이들은 각각 입법, 노동자 집회 조직, 공장 조사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위원회의 조사는 1911년과 1912년 사이 모두 완료되었는데, 조사의 구체성과 범위는 이전의 조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들은 주 전역에서 59차례에 걸친 공청회를 개최하고, 고용주, 노동자, 노조 전임자 및 전문가를 포함하여 472명으로부터 증언을 받았다. 또한 위원회는 의류산업 분야뿐만 아니라 고기포장 공장, 제과점, 화학 산업, 납 거래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산업 분야 3,385개의 작업장을 조사했다.

이들은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1912~1913년 새로운 노동법을 입법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곧 고용주들은 새로운 노동법이 불공정하고 효과는 없는 반면 비용만 많이 든다며 새로운 노동법을 무력화할 수정법안을 발의한다.

이에 맞서 위원회는 1915년 수정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었다. 비록 의회에서 많은 수정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주지사는 모두 거부권을 행사했다. 결과적으로 하나를 제외하고는 본래의 노동법이 지켜지게 되었다.

공장조사위원회의 작업은 1919년 뉴욕주에 안전과 건강에 대한 규칙을 다루는 행정위원회 설치까지도 이어졌다. 이러한 시도는 뉴욕주를 노동개혁 측면에서 가장 진보적인 주의 하나로 만들었고, 노동법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③ 노동조합 활동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대부분은 여성 이민노동자로,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도 작업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화재 발생 2년 전인 1909년 뉴욕 여성의류노조 파업이 벌어졌는데, 트라이앵글 공장은 이 파업의 진원지였다.

이들은 노동조건 개선,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을 요구하며 13주간 총파업을 했지만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작업장으로 복귀했다가, 2년 뒤 비극적인 사고에 희생된 것이다.

화재로 희생된 노동자들은 국제여성의류노동자연맹(ILGWU)과 전국여성노조연맹(NWTUL)의 일원이었는데, 이 두 노동조합은 화재 이후 조직화와 입법운동을 동시에 진행했으며 큰 성과를 냈다.

국제여성의류노동자연맹(ILGWU)은 노동자 스스로가 노동운동을 통해 고용주에 대한 요구사항에 안전 문제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 단체협약에 안전대책을 통합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전국여성노조연맹(NWTUL)은 뉴욕 공장조사위원회를 만들어낸 시민안전위원회를 조직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화재 직후 지역 신문을 통해 공장의 노동조건에 대한 설문지를 발송하고, 노동자들이 보낸 수백 개의 답변을 종합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안전하지 않은 노동조건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생생하게 정리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시민안전위원회가 결성될 수 있었다.

트라이앵글 화재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으로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집단적이고 상징적인 기억이 되었다는 점에서 미국 노동운동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도의 변화

공장조사위원회의 제안은 소위 “공장법의 황금시대”를 낳았다. 뉴욕주에서는 60여 개의 산업안전 관련 법안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여기에 식사 개선, 세탁소 설치, 화장실 증설, 비상구 증설, 방화벽 설치, 비상구 및 소화기에 대한 접근성 제고, 경보 시스템과 자동 스프링쿨러 설치 등 기본적인 노동조건과 화재안전 개선조치가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제도 변화는 이에 그치지 않고 아동노동 규제, 야간작업 금지 및 최저임금 제도의 도입으로까지 나아간다.

1915년 뉴욕주에서 노동자재해보상법이 통과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1920년까지 미국의 5개 주정부가 같은 취지의 법안을 통과시킨다. 그 내용은 재해로 부상을 입은 노동자와 사망한 노동자 가족에게 치료비나 장례비를 지원하고 고용주가 손실 임금을 보상토록 하는 것이다.

이 법안들은 노동자가 고용주의 책임을 입증할 것을 요구했던 이전의 관습법과는 다른 원리, 즉 무과실(no fault) 책임주의를 채택한다.

무과실 책임주의란 사회적 위험을 일으킨 고용주는 그로 인하여 생기는 손해에 대하여 배상책임을 지며,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노동자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그 이익 중에서 배상을 한다는 원리이다. 노동자 재해 보상에서 고용주의 책임을 대폭 강화시킨 것이다. 무과실 책임주의는 이후 세계 각국이 도입한 산업재해보상법과 사회보장법의 토대가 되었다.

100년 넘게 기억되는 사고

트라이앵글 화재는 미국의 노동법과 산업안전법을 현대화하고, 무과실 책임주의와 같은 산업재해 보상법과 사회보장법의 토대가 되는 원칙을 확립했다. 또 미국 노동운동의 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때문에 1911년의 트라이앵글 화재 사고는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미국 사회에서 기억되고 있다.

2003년 뉴욕시는 트라이앵글 공장 건물을 역사적 건조물로 지정하였다. 뉴욕시의 유적지보존위원회 위원장 티어니는 “국가적 의식고취에 영향을 끼치게 된 사건 발생지점을 역사적 건조물로 지정하는 것은 과거의 희생자들은 물론, 노동법과 화재안전 규정, 그리고 건물안전 규칙의 개혁을 실현시킨 과거사의 의미를 길이 일깨워 주는 감동적인 기념비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2008년에는 200여 개의 단체들이 모여 “트라이앵글 화재를 기억하라”는 조직을 결성했으며, 2011년에는 화재 100주년을 추념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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