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향한 탐욕,
    인류의 끝없는 살상 일으켜
    [책소개] 『예루살럼의 광기』(제임스 캐럴/ 동녘)
        2014년 08월 09일 10:10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최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이 10대 유대인 소년 3명을 보복성 납치, 살해한 사건을 두고 가자지구를 무참히 공격했다. 현재 가자지구 사망자는 1400명을 넘어섰으며 이 광기 어린 살육은 전 세계에 끔찍한 충격을 주고 있다.

    2차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운동)가 일어난 2000년부터 지금까지 3일에 1명꼴로 팔레스타인 어린이가 이스라엘 점령군에 의해 살해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제오늘의 일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군과 유대 정착민의 잔인한 공격성은 무엇에서 비롯되는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아랍인(무슬림)과 유대인 간의 전쟁으로 축소되지만, 이는 종파에 치우친 부정확한 정의다.

    지금의 상황을 정확한 시각으로 보기 위해선 먼저 예루살렘에 얽힌 수많은 요소를 파악해야 한다. 왜 성스러운 순례지가 존재하는 예루살렘이 폭력으로 점철되었는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가 먼저 필요하다.

    한때 가톨릭 사제였던 저자가 밝히는 예루살렘의 허상

    펜타곤과 미국 패권의 비극을 다룬 《전쟁의 집》 저자 제임스 캐럴이 이번에는 인간의 광기로 얼룩진 폭력의 장소, 예루살렘을 고발한다.

    1969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사제로 지내면서 외려 이분법적인 종교적 사고에 물음을 던지며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던 때에 그의 마음이 동한 곳은 예루살렘으로, 1973년 초여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지순례를 시작한 그는 그곳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신앙에 대한 확신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예루살렘 성지에 있는 모든 교회에 있는 복제화 수점과, 예수가 처형을 선고받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고난의 길로 알려진 ‘십자가의 길’ 14지점이 중세 후기 그리스정교회의 관광 독점에 대응하고자 프란체스코회에서 만들어 낸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곳과 연관된 서사들이 허구였음을 깨닫고, 그는 사제직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신이란 지금 내가 있는 현재의 삶 속에 존재함을 믿는다고 캐럴은 말한다.

    수 세기 동안 신앙을 들먹이며 예루살렘을 성지로 만든 이는 바로 수많은 인간들이었으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신앙에 도취되어 예루살렘이라는 땅이 메시아의 재림과 계시라 이루어질 곳이라 여기며 병적인 열광과 집착을 한다는 것이 캐럴의 시각이다.

    그 열병은 곧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배타적인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그 적대감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 무자비한 살육을 가능케 했다. 인간의 허상이 만들어 낸 예루살렘이라는 땅에 대한 환상은 수차례 지배 세력이 바뀌고 탈환을 반복하는 역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땅에 대한 무서운 광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라는 한 획으로 연결된 것이다.

    예루살렘

    캐럴은 이 모든 것의 바탕이 된 종교의 역사적 기원으로 거슬러 이야기를 전개한다. 종교는 살육을 통해 황홀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폭력을 제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희생제의가 만들어졌고 그 희생제의가 종교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폭력과 전쟁의 역사는 종교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행해졌지만 실상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인간이 의식적으로 지키는 종교가 인간에 의해 왜곡되어 전통으로 굳어졌다고 캐럴은 말한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한 인간의 선택일 뿐이라고 저자는 이 책에서 분명히 말한다.

    예루살렘에 대한 다소 충격적이면서도 생소하게 느껴지는 그의 시각은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반성을 넘어서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세계에 점철된 폭력의 역사를 정확하게 응시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게다가 이 책은 예루살렘에 대한 정보가 빈약한 국내 독자들에게 고대부터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둘러싼 서구 역사를 관통하는 데 더없이 훌륭한 안내서이다.

    종교와 폭력은 하나다

    캐럴은 미국과 유럽이 현대에 이르러 정교분리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특히나 새 예루살렘으로 개척되었던 미국이라는 땅에서 정치와 종교는 오랜 상관관계의 역사를 이루고 있다.

    실상 우리가 알고 있는 링컨의 노예제 반대는 북부 연합을 복구하기 위한 목적을 위해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국민들을 결속해 그 목적을 이루려는 방편으로 종교적 서사와 사명감이 바탕이 되었다. 그렇기에 폭력으로 점철된 예루살렘이라는 땅을 그저 미개한 인식에 사로잡힌 종파 간 대립으로만 치부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 캐럴의 시각이다.

    예루살렘에 얽힌 세계사의 진실을 파헤쳐야만 아직까지 현재진행형인 극악무도한 살상을 바라보는 편향된 시각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예루살렘의 기원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곳을 신성한 도시로 형성한 종교의 기원, 그리고 종교와 폭력의 상관관계부터 짚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캐럴은 인간이 생존 과정에서 경험한 살해를 통해 일종의 정신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었는데, 인간의 의식 내에 본능적으로 존재하는 폭력과 욕망의 적절한 발산과 통제를 위해 희생제의라는 의식과 종교가 생겨났다고 고고학계와 인류학계의 근거를 들어 말한다. 즉, 종교는 폭력의 어두운 그늘과 지적, 도덕적 고민에서 생겨났다는 결론이다.

    종교와 폭력의 관계의 희생제의에 기원을 둔 각종 의식 속에 상징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간 본성의 근원적 사실이다. 즉, 인간은 타자를 죽임으로써 산다는 것이다.

    21세기 들어, 분노로 가득 찬 팔레스타인인들, 그리고 좀 더 광범위하게는, 이슬람 세계 내부의 부정부패와 불신자들에 맞서 전쟁을 벌이는 이슬람 지하디스트들에 의해 급속히 확산된 자살 폭격은 가장 악의적인 돌연변이이자 신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의 바이러스이다.

    군사적 측면에서 볼 때, 자살 폭탄 테러범은 그 어떤 미사일보다도 치명적이다.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수천 명이 자기 자신을 군수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의 물리적 자아를 무차별적 살상 무기로, 즉 육체를 ‘급조 폭발물’로 기꺼이 삼는 행위에 의식적 동기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종교이다.

    갈등과 반목의 도시가 서구의 역사를 만들다

    끊임없이 주인이 바뀌어 온, 지상 최고의 도시. 적의 집중포화에 대비하거나 반격할 수 있는 최적의 산등성이로 여겨진 그곳은 동서의 계곡들로 인해 완벽히 보호되는 곳이었다.

    남쪽에서 보면 양쪽의 계곡이 마치 쟁기 날처럼 합해지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고고학자들은 요새 형태의 이 도시 국가에 최초로 정착이 이루어진 시기를 기원전 3000년경 기마민족이 처음 등장했던 당시로 본다. 이는 역사 기록의 시초에 해당하는 수메르인들이 재고를 기록한 점토판이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이 도시는 살렘, 에부스, 모리아,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예루살렘은 신세계 순례자, 유럽 코뮌주의자, 공산주의자 들이 말하는 사회적 이상향을 통해 천년왕국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암시적인 배경으로 머무르게 된다. 결국 20세기와 21세기 동안 계속된 악(惡)과의 전쟁 중심에 놀랍게도 예루살렘이 있었던 것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된 여러 형태의 냉전 및 테러와의 전쟁 모두의 구심점이었던 바로 그 예루살렘 말이다.

    본래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고대 도시였던 예루살렘은 서구 역사의 자극이 되어 오늘날의 세계를 조성하는 데 그 어떤 도시보다도 큰 역할을 했다. 이곳은 지구상의 그 어떤 곳과도 다르게, 종교적인 열정이 불붙은 곳이다. 바로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이 세 종교의 탄생지이자 끝없는 종교분열의 핵이 바로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을 향한 인류의 지독한 광기는 폭력을 조장하고 세계의 전쟁을 초래했다.

    ‘지금, 여기’를 살기 위한 종교를 제시하다

    캐럴은 오늘날 우리가 맹목적으로 믿고 헌신하는 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진정한 종교가 무엇인지, ‘지금, 여기’에서 종교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자리매김 해야 하는지 고찰한다. 그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전 세계에 만연한 ‘나쁜’ 종교를 지양하고 성서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 즉 시대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좋은’ 종교가 갖춰야 할 덕목을 제시한다.

    그는 좋은 종교란 죽음 대신 삶을 찬미한다고 말한다. 성서의 맨 마지막장 요한묵시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종말론적 환상을 그는 철저하게 비판한다. 염세적이고 허무주의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내세지향적 삶은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사랑에 관한 것이며, 좋은 종교는 불가능성에 대한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다음으로 좋은 종교는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 역시 양심의 일종으로 나타나는 행위이며, 양심은 강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시대에 좋은 종교는 역설적이게도 세속적 성격을 띨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종교가 현재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존재의 형태로서 어느 정도의 종교적 개혁은 불가피함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고착화된 온갖 종교적 형태, 범주, 상징을 비판하는 안목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종교적 관습, 교리, 제식, 신조, 전통, 예배의 쇄신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캐럴은 강한 목소리로 주장한다.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더불어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서구의 역사를 종교적 비판으로 아울렀다는 점에서 이 장대한 서사는 잘못된 환상에 여전히 사로잡인 현대인에게 필수적인 책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