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가능성 탐색한
성실한 실천과 변화의 기록
[책소개] 『인문학은 자유다』(얼 쇼리스/ 현암사)
    2014년 08월 09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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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힘겨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질적인 풍요? 전문적인 기술 교육? 안정적인 공동체? 수많은 사람들이 던졌을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인문학’에서 찾으며 행동으로 옮겼던 사람이 있다.

바로 사회의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인 도움보다 인문학 교육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인문학 전도사’, 얼 쇼리스다. 그는 원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나갔던 사회비평가이자 언론인이었다.

수년 간 수백 명의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돈이나 음식만으로는 가난을 구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엄청난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런 상황 때문에 가족, 이웃, 더 넓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활동인 ‘정치’에서도 소외되면서 가난 속으로 침잠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무지와 절망의 상태에서 깨어나는 게 절실했다. 쇼리스는 한 여성 재소자와의 만남을 통해 인문학 교육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전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당장 먹을 음식이 없고,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플라톤과 홉스의 책을 읽히는 게 가능할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할까?

그는 주변의 의심과 걱정 속에서도 자신이 믿던 길을 꿋꿋하게 걸어 나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 과정인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꾸준한 외침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인문정신을 바탕에 둔 노숙인들을 위한 인문학 교육 과정인 성프란시스대학이 설립됐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 144명의 졸업생을 꾸준히 배출했다. 2008년에는 쇼리스가 한국을 방문해 노숙인들과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으며, 그의 수업 모습을 담은 첫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방영하기도 했다.(이 내용은 본문 15장, 한국편에 소개되어 있다.)

‘얼 쇼리스 효과’가 어느 정도 입증되자, 정부의 지원 아래 지역 곳곳으로 프로그램이 확장됐다. 여러 대학과 사회단체에서 현장인문학, 실천인문학, 거리의 인문학 등의 이름으로 개설되는 강좌들도 이에 대한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클레멘트 코스 개설 20년,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을 줬을까? 쇼리스가 보여준 인문학과 삶의 만남은 여전히 유효할까?

2006년에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 <희망의 인문학>이 클레멘트 코스의 이론적인 체계와 방법을 소개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에 출간된 <인문학은 자유다The Art of Freedom>에는 전 세계에 코스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다양하고 생생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각 코스를 개설하기 위해 애썼던 관계자, 상황과 환경에 맞춰 수업을 진행했던 교사, 그리고 수업에 참여했던 학생 들은 함께 공부하고 변화하며 각자 자신만의 자유를 찾아나갔다. 쇼리스는 말기 암으로 투병을 하는 중에도 코스가 개설되는 곳이라면 전 세계 어디든 찾아가 조언과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경험들을 <인문학은 자유다>에 고스란히 정리했다.

삶의 가장자리에 놓인 사람들에게 인문학이 희망의 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득한 이 책은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날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대안을 모색한 치열한 실천의 기록이자, 인문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하는 성실한 인문비평서다.

인문학은 자유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 20년간 함께 걸어온 희망의 순례 길

이 책은 저자 얼 쇼리스가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게 된 ‘우연하고도 놀라운’ 이야기로 시작한다. 1995년,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던 쇼리스는 중범죄자 교도소에서 비니스 워커라는 한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대화 도중 거친 말투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는 인문학 교육 여부에 있다는 말을 남긴다. 이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해 추잡함, 폭력, 굶주림, 학대, 열악한 주거 환경 등에 노출된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인 클레멘트 코스를 개설한다.

르네상스 인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도덕철학, 역사, 문학, 예술, 논리학을 교육과정의 기본 틀로 삼아 하버드나 예일, 옥스퍼드 대학의 1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수준으로 가르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서들을 읽고 미술관과 음악회에 가기도 했다. 또한 일방적인 강의가 아닌 대화를 통해 사유를 확장하는 방식인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활용해 스스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학생들을 선별하는 데 있어서 끝까지 가보겠다는 ‘의지’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생전 인문학을 접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세상 앞에 당당히 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코스는 17년간 캐나다, 멕시코, 알래스카, 호주, 한국 등 전 세계로 퍼져 나가 ‘오디세이 코스’, ‘벤처 코스’, ‘야아베스카니랴라크’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각 공간에 맞게 확장됐다.

때로는 교도소, 노숙인 센터에서 때로는 오지, 시위 현장, 이주민 밀집 지역에서, 사회 곳곳의 어두운 곳을 찾아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을 이 책 곳곳에 담았다.

코스를 개설하는 과정은 늘 난관에 봉착했다. 무엇보다 학생 한 명이 클레멘트 코스에 다니는 데 드는 비용인 약 2,000달러(약 210만 원)를 후원받아야 시작할 수 있었다. 자금을 마련했다고 해도 적합한 교사를 채용하고, 학생들을 모집해 교과 과정을 만드는 일까지 설득과 합의의 과정이 요구됐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투옥, 고문, 살해되는 아프리카 가나에서는 클레멘트 코스를 체제 전복 활동이라고 여기기도 했고(5장 <하나의 대륙, 다른 세계>), 뉴욕에서는 입학 거부를 받은 학생이 불을 지르기도 했다(1장 <시작, 그리고 10년 후 도착한 편지>).

회의와 논쟁과 타협과 수습이 연일 반복됐다. 그러나 쇼리스는 서로의 생각을 조율하고 상황을 생각을 맞춰가는 이 과정이야말로 ‘희망’이라고 봤다.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고 변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던 기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변화는 쇼리스 자신에게도 일어났다. 그는 캐나다의 핼리팩스 코스에서 부자간의 사랑을 보며, ‘지혜’를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느라 사람들 간에 느낄 수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간과했던 자신의 지난 시간을 반성한다.(7장 <아가페, 혹은 인문학의 힘>) 그리고 계획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만큼이나 인문학의 정수인 불완전함을 배우는 것도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이를 계기로 수업은 조금씩 유동적으로 변했지만 덕분에 전 세계의 클레멘트 코스의 수업은 더 풍부해졌으며, 더 다채로운 경험이 가능해졌다.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고 만든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16개의 각기 다른 클레멘트 코스는 저마다 오른 정상에서 자신만의 자유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클레멘트 코스는 어떤 성과를 얻었을까? 이것은 코스를 만들던 때부터 쇼리스가 증명해내야 하는 과제이기도 했다. 1995년 클레멘트 코스에 참여한 다른 여성 재소자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출소했으며, 다시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학에 진학해 전문적인 직업을 갖은 사람들도 있고,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공부를 계속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쇼리스는 이런 가시적인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성찰’과 ‘자유’의 획득이라고 이야기했다. 이것은 수동적으로 반응하던 삶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클레멘트 코스에서는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예술을 향유하는 삶의 추구, 공동체의 행사 참여, 인문학 교육에 대한 의지, 의견 충돌이 생겼을 때 폭력 대신 대화로 풀기 등 일일이 나열할 수 없는 작지만 강한 일상적인 변화들이 가득 일어났다. 소외된 채 살아가던 빈민이 ‘위험한 시민’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쇼리스는 이 책에서 인문학 교육의 목적이 자신이 처한 억압적인 상황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데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무엇보다 인문학 교육을 지식 습득이 아닌 지금 자신이 갇힌 ‘동굴’에서 나와 나만의 ‘자유’를 찾아나가며 가족,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정치’를 배우는 과정으로 여긴다.

실제로 책에서는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자유다”(39쪽), “자유에 대한 사랑, 이것이 교육의 목표이자 민주주의 희망이다”(131쪽)와 같이 자유를 강조하는 문장을 쉽게 찾을 수 있다.(이 책의 원제는 바로 ‘자유의 기술The Art of Freedom’이기도 하다.)

그러니 클레멘트 코스는 꼭 열악한 물리적 환경에 놓인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삶의 기반을 잃고 목표 없이 휘청거리는 사람들, 관계 맺기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 정신적으로 고립되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인문학과의 만남은 자신만의 자유를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국에서 클레멘트 코스가 성공을 거두자, 이 교육 시스템을 공교육에 적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인문 교육은 쇼리스의 인문 정신에 비춰봤을 때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 곳곳에는 이미 쇼리스가 보여준 생각이 어느 정도 발현되고 있다. 학문 중심의 인문학에서 벗어나자는 목소리는 이미 진부해져 버렸고, 노숙인이나 제소자를 위한 인문학 교육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그러나 인문학을 둘러싼 이중성도 존재한다. 각 대학의 인문학과는 점점 사라지지만 학교 밖의 인문학 강연장에는 늘 사람들이 가득하다.(이 책의 뒷부분에 인문학 강연과 세미나에 참여할 수 있는 국내의 연구공간을 정리해서 수록했다.) 삶을 위한 인문학, 대중을 위한 인문학과 같은 모토를 쉽게 볼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좋아하고 있으며 인기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겠지만, 그 방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고민이 부족하다.

이 책의 유의미한 지점 중 하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수업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우리의 인문학 현장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 삶과 인문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인문학 교육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인문학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듯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는 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인문학이 지닌 힘과 희망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무엇이며, 자신이 지키고 싶은 자유가 무엇인지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것이 인문학에 대한 믿음을 고집스럽게 지켜나갔던 쇼리스의 긴 여정을 계속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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