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4 델리 학살,
    권력을 위해 지옥문을 열다
    [인도 수구보수파들의 생얼-7] '국가'란 무엇인가
        2014년 08월 05일 01:06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 <인도 수구보수파들의 생얼> 앞 회의 글 링크

    1984년 10월 31일 오전 9시 20분, 인디라 간디 수상은 자신의 관저를 지키던 두 명의 시크교도 초병으로부터 총격을 입고 사망하였다.

    사망 소식이 곧 알려졌으나 델리 시내는 별 소동이 일어나지 않고 잠잠했다. 델리에는 첫날이 다 가도록 별다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다음날이 되면서 사태는 급변하였다.

    아침 9시부터 시크교도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부 델리를 시작으로 시내 곳곳에서 시크교도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회의당 지지자들과 정치 깡패들은 각목, 쇠몽둥이, 칼 등으로 무장을 하고 ‘피에는 피’라는 구호 아래 눈에 보이는 시크교도들을 무차별 살상하였다.

    왜 사고가 난 첫날에는 잠잠하던 민심이 다음날 갑자기 동요하여 학살극의 난동으로 바뀌었을까?

    문제의 열쇠는 집권당인 회의당의 수구 세력들에게 있다. 나중에 조사를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 날 밤 회의당의 간부들과 노조 간부는 모처에서 모여 이 사태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해 구수회의를 하였다.

    그들은 구체적으로 작전 모의를 하고 산하 조직의 행동대원들에게 돈과 무기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수사를 통해 밝혀졌다. 군이나 경찰은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았다. 학살극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군이 투입되면서 사태가 진정되었으니 딱 사흘 만에 사망한 시크교도는 공식적으로 2,733명에 달한다.

    실종자와 행방불명자로 추정되는 수까지 합하면 전국적으로 적게는 4,000명 많게는 8,000명에 달하였다.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여성은 1,300 여 명,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된 아이의 수는 4,000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 학살극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음에도 재판만 하릴 없이 진행되고 있고, 수 천 명의 목격자가 내세우는 증인이나 증거는 하나같이 묵살당한 채 세월만 가고 있다.

    힌두와 시크

    1984년 델리 학살 몇 년 뒤 시크교도들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GAMMA)

    그들의 소요는 매우 유사한 형태로 일어났다. 조직적으로 시크교도에 대한 테러가 감행되었으니 삼사십 명부터 수백 명 이 하나로 몰려다니면서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각목과 쇠몽둥이로 피해자들을 폭행하였고, 심지어는 석유를 끼얹어 태워 죽이기까지 했다.

    길거리에서 발견한 시크는 현장에서 잔인하게 구타 살해하거나 불에 태워 죽였고, 집 안에 있는 시크는 집을 파손하고 들어가 잡아 죽이거나 집에 불을 질러 태워 죽였다. 그들에게 저항하는 여성은 집단 강간을 하고 반항하는 아이들도 짓이겨 죽였다. 시크교도가 운영하는 시내 곳곳의 상점은 대부분 약탈당했고 불에 탔다.

    그 사이 국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경찰은 아무런 저지도 하지 않았고, 군대도 투입되지 않았다. 사흘 동안 델리는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자 지옥이었다. 11월 3일 소요 시작 4일째 되는 날 치안 유지를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고,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었다. 그제야 소요는 바로 진정되었다.

    시크는 힌두와는 달리 상투를 치고 그 위에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르기 때문에 남성의 경우 누가 봐도 겉모습으로 쉽게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래서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인도에서는 10년마다 센서스를 조사하는데, 1981년 센서스에 의하면 델리 거주 시크는 40만 명가량이었고, 학살 사건이 발생한 1984년 추정치로는 약 50만 명 정도 되었는데 델리 인구 전체의 7.5% 정도였다.

    그들 대부분은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단 당시 나중에 파키스탄이 되는 인도아대륙의 서북부 지역에서 고향을 등지고 힌두를 따라 인도로 들어온 실향민이었다. 그들은 빈손으로 들어온 델리에서 경제적으로 매우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였고, 그 영향력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대하였다.

    인디라 간디가 뻔잡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서서히 종교 근본주의적 정치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혹은 그 후에도 상당수가 회의당 정권과 가까운 성향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시크교도들은 굳이 회의당 정권으로서는 적이 될 만한 이유는 없었다.

    이때까지도 시크교도들만을 위한 독립국 칼리스탄(Khalistan)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시크 테러리스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보다 인도 내에서 하나의 주로 사는 것을 지지하는 온건파 시크들이 훨씬 더 많았다. 따라서 그들은 힌두와 무슬림의 관계와 같이 공동체 간의 감정이 낀 불구대천의 원수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학살의 난동을 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회의당 수구 세력 입장에서는 그런 사실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시크교도들이 파키스탄에 남지 않고 힌두를 따라 인도로 남하하면서 맺은 의리 따위는 아무런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인디라 간디 수상이 죽었으니 그 다음 해로 다가오는 총선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희생양뿐이었다.

    인디라 간디 사후 추모 분위기는 끊이지 않았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다음 해 총선으로 이어졌다. 죽은 인디라 간디의 모습은 곳곳에 초상화로 세워졌고, 그의 ‘하나의 국가’를 주장하는 어록은 선거 내내 육성으로 들려졌다.

    선거는 죽은 인디라 간디가 진두지휘하는 풍경이었다. 아무도 죽은 인디라 간디를 이길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은 마치 조국을 위한 제단에 스스로 몸을 바치는 것인 양 예언하듯 꾸며졌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조국을 세우기 위한 희생이고, 시크는 조국을 배신하는 반국가 집단으로 낙인 찍혔다. 시크라는 이유로 국민에서 ‘우리’ 모두의 적으로 순식간에 탈바꿈하였다.

    현직 집권당 국회의원을 비롯한 집권당 간부들과 노조 간부들은 노골적으로 현장에서 진두지휘하였고 국영방송은 쉴 새 없이 인디라 간디 애도 방송을 내보내면서 국민들을 자극시켰다. 분위기는 점차 시크를 죽여 원수를 갚아야 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고,

    이 때 정치 깡패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어 난동의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연방 정부나 델리 시정부나 랄 것 없이 권력은 난동을 저지하기는커녕 방관을 넘어 더욱 자극하였다. 분명한 국가 폭력이다.

    이 거대한 학살 난동극의 시대적 배경은 다음 해 총선이고, 주인공은 집권 여당 정치인이며, 주제는 권력 쟁취다. 결국 죄 없는 시크교도들은 몰살당하고, 그 정치인들은 1985년 7월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인도 역사상 가장 높은 득표율과 최다 의원을 배출한 압도적 승리였다. 쾌거였다.

    학살극이 일단락 되고나서, 정부는 이 사건을 힌두와 시크 사이에 벌어진 종교 공동체 갈등이라 규정했다. 집권 여당은 시크교도들이 많이 사는 뻔잡 주에서 일부 시크 테러리스트들이 힌두를 공격하여 그 동안 시크들에 대한 반감이 커져 있었는데, 인디라 간디 수상이 살해당하자 그 감정이 폭발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그나마 공권력이 신속히 대처하여 사태가 단 5일 만에 종료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인도에서나 한국에서나 수구 세력이 사용하는 언어는 항상 동일하다. ‘우발적 사건’과 ‘공권력의 신속한 대처 덕분’은 그 어떤 난동에도 통하는 만사형통의 언어다.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에도 그들의 언어는 전혀 변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그 언어는 지지자로 하여금 든든함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심리적 기제다.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언어가 아니고, ‘우리’를 결집하는 무기이자 ‘남’을 섬멸하는 작전의 신호탄이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의 극치는 선거용 멘트에서 찾을 수 있다. 인디라 간디는 자신이 사주하여 뻔잡 근본주의자들의 세력을 키워 테러와 분열의 씨를 손수 뿌렸음에도 언어를 달리 하였다. Don’t shed blood, shed hatred ! 우리가 떨어뜨려야 할 것은 피가 아니고 미움입니다!

    한국에서 공약 파기와 거짓말만 하고, 원칙이라고는 아무 것도 지킨 적이 없는 대통령이 ‘원칙을 지키는 나라’를 되뇌는 것이나, 학자적 양심을 팽개치고 수천 명의 노동자를 직위 해제한 코레일 사장이 ‘자식을 혼내는 어미의 심정’ 운운한 것이나 부정선거 수사를 방해하는 뻔뻔함의 극치를 행동으로 보여준 전 서울경찰청장이 ‘제가 철면피한 역사의 죄인이냐’고 묻는 것 따위가 바로 이 무기가 된 언어의 좋은 예이다.

    죽기 전 인디라 간디는 가리브 하타오 (garib hatao 가난 추방)를 외쳤지만 결국 그는 가리비 하타오(garibi hatao 즉 가난한 자 추방)를 한 것이나 박근혜가 경제 성장을 외쳤지만 자본 탐욕만 성장시키는 정책을 쓰는 것이 동일한 것은 그들의 행위는 동서를 막론하고 항상 같은 구조 아래에서 돌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 보수는 언어에 능수능란하고, 사람들은 그 레토릭의 현란함에 쉽게 넘어간다.

    인류학자 굽따(D. Gupta)는 집단 폭력에 참여하는 폭도들은 국가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하는 경우 행동에 옮기는 법이라고 확신한다. 그 국가 운영의 주체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즉 정권 교체라는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설 때 난동에 적극 참여하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1984년 델리에서 벌어진 시크 대학살이라는 난동은 치밀한 각본이 폭도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세가 불어남을 직접 목격하면서 자기들끼리 더욱 자신감을 가제 돼 더욱 난동이 커져간 것이다. 정부가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국가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하라는 난동 허가증인 셈이다.

    자신의 난동을 무한 리필해주는 그 구조 안에서 그들은 잔혹함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경기는 내가 죽지 않는 전쟁이라는 말을 상기해보면 그 폭력은 쉽게 맛볼 수 없는 매력 만점의 스릴이다. 그들은 그 엄청난 매력을 쉽게 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래서 항상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의 인도가 또 다른 학살과 테러를 잉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대중은 이성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은 그렇게 하도록 배우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적 열정인데, 종교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 들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종교공동체주의의 요구가 각각의 종교공동체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소수의 보수 반동적 상층 계급의 요구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수구 정치 세력의 음모와 야욕의 산물이라는 것을 드러낼 지라도 자신들의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옳고 그름이나 이성적 판단이 아니다. 부를 갖고, 정치 권력을 갖고, 세를 가진 자들이 뒤를 봐준다는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세상은 살벌한 정글이며, 사각의 링이라는 것을 삶의 궤적을 통해 배운다. 그런 현실적인 사람들에게 꿈과 이상만을 이야기 하는 진보 세력은 무능함에 틀림없다. 이상은 꿈일 뿐이고 적과 아군 그리고 적개심 키우기는 현실이다.

    이는 인도의 역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한국에도 있었고 다가올 한국에도 있을 가능성이 크다. 해방 공간에서 벌인 제주를 비롯한 여러 곳의 양민 학살이나 5.18 광주학살은 그 권력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이 조금만 보였으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탄탄한 배경이 있다는 사실은 그 난동의 기획자에게 자신감을 주고 그 자신감은 그 아래 군인과 경찰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세상은 바뀌지 않고 권력은 영원하니 알아서 행동하라는 그 메시지보다 힘 있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여전하다. 가스통 할배들은 그런 역사에 항상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권력이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진리를 서북청년단 시절부터 지금까지 두 눈을 뜨고 지켜보았다. 그들, 수구 난동 세력들을 약화시키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권력이 바뀐다는 사실, 그 사실만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적어도 국가 폭력은 미리 예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5.18을 맞이할 지도 모른다.

    1984년 델리에서 벌어진 시크교도 학살극은 선거를 앞 둔 집권 여당과 정부가 꾸민 국가 폭력이다. 국민이 죽어가는 동안 국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가만히 그 자리에 있으라를 지켰다.

    2014년 6월 4일 한국에서 벌어진 세월호 참사도 이와 다르지 않다. 300 여 명이 죽어간 그 자리에는 가만히 있으라만 있었고, 국가는 없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 한다면 그것은 국가가 아니다.”는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가 한 말이다. 인도와 한국에서 국민을 학살하는 수구 세력의 언어는 항상 똑같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