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와 보수, 인간의 두 얼굴
    By 서윤
        2014년 08월 05일 12:5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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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4 지방선거에서는 진보정당의 득표율이 매우 미약한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물론 진보정당 후보의 당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나, 선거 결과를 진보정당의 성공이라고 보는 평가를 접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원외정당인 노동당과 녹색당은 1% 전후의 정당 지지율을 얻었고, 비록 소수이지만 원내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통진당과 정의당이 이전만한 활력을 우리 사회에 불어넣는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이 거대 야당이긴 하지만 새정련을 진보적 야당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정책노선이나 야당으로서의 현재 모습을 보건대 진보적 사상을 바탕으로 의제를 설정하고 추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선거 결과만 놓고 보자면 우리나라의 진보정당은 완전한 실패와 전멸의 국면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꼭 선거가 아니더라도 진보적 사상과 의제가 지금으로서는 우리사회의 다수 시민들에게 뿌리내리기 어려운 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운동이든 정치운동이든 진보가 위기라는 인식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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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위기상황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책도 나왔습니다. <위기의 진보정당,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책입니다. 지방선거 직후에 나온 것으로, 부산지역의 진보정당 평당원 네 분이 공동으로 쓴 책입니다. 근자에 들어 나는 소단위로 열리는 진보정당운동 평가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나오는 이야기도 해당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와 큰 차이는 없습니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거나 ‘그 나물에 그 밥’이란 식의 냉소적인 의미로 쓴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문제상황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어슷비슷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진보정당의 합당과 분열, 그 과정에서 있어 온 몇몇 문제들을 짚어보는 진보 인사들의 문제의식에는 아래와 같은 공통점이 있어 보입니다.

    (1) ‘운동’에는 익숙하나 ‘정치’에는 미숙하였다.
    (2) 진보정치를 위한 주체의 설정에서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3) 내부적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민주적 절차가 부실하였다.

    (1)과 (2)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드는 예로 2008년에 있었던 촛불운동을 정치활동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일이 있습니다. 촛불운동의 시작점이야 어떠했건 그 움직임이 시민들의 자발적인 것이었음에는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 시민들의 자발적 움직임을 정치적 의제로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에서 진보정당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진보정당의 현 위기상황을 진단하는 많은 분들이 동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은 너무나 예가 많아 뭐라고 하나를 짚어내기가 어려울 정도일 겁니다. 2012년 통진당 사태에서부터 진보정당운동 내부의 문제 중 상당한 경우에 이런 일들이 벌어져 왔습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동작을 선거구의 후보통합 과정에서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나는 여기서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문제 상황이 정말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지금 드러난 위의 세 가지 공통인식은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과 소설 <머리 속의 악마>를 통해 권력을 향한 인간의 탐욕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악의 실체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권력이란 것은 어쩌면 황금비율보다도 더 본능적인 탐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문명사를 통틀어 검토한 여러 연구결과들을 살펴보면 인간의 권력지향성과 전체주의적 속성은 몸과 함께 인간에게 주어진 특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인간이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을 아울러 성찰해볼 때 진보와 보수라는 두 가치가 이항대립하는 것이기보다는 야누스의 두 얼굴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보와 보수는 정치적 입장으로서의 용어가 아닌 마음과 행동이라는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기 바랍니다. 정치적으로야 진보적 인간과 보수적 인간을 나누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집단조차도 그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념 혹은 의제를 지지할지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치적 행동이며 집단의 경우는 그것을 언명함으로써 스스로의 입장을 밝히게 되니 말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행동이라는 차원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가치를 두고 보자면 어떤 사람도 그 기준에 따라 명징하게 나눠질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진보적 의제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 영화나 문학 내지는 음악의 취향에서 비평적으로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을 선호할 수 있습니다.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지요.

    논리의 형식에만 기대어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모순이랄 수 있습니다. 모순이란 말 속에 든 평가적인 의미를 제거하고 그 어휘가 가진 사전적 뜻에만 집중하여 개별 인간의 이러한 속성을 관조할 수 있다면, 다음에 오는 문제의식은 이러한 것일 것입니다 : 개별적 삶의 윤리와 공동체 윤리, 그리고 보편 윤리 사이의 균열과 반목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이것은 철학의 영역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철학이든 윤리학이든 심리철학이든 뭐든 간에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를 넘어선 보편사회를 넘나드는 내밀한 철학적 탐구과제가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철학적 연구라 해서 이것이 현실을 간과한 사변적 논의로 흘러갈 것이라는 편견을 갖고 계신다면 당장 폐기하길 권장합니다. 단언컨대 철학은 현실을 가장 치열하게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그러한 연구의 결과가 다시 정치적 의미에서의 진보적 과제나 가치를 실현하는 데로 나아가기 위한 연결점을 마련하는 고민도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연구가 우리사회에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 이런 철학적 토양의 허약함을 나는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김우창 선생께서 얼마 전 <깊은 마음의 생태학>이란 책을 내면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보편사회를 오가는 사유의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점입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자연과학 분야까지 아우르는 선생의 지적 편력이 고스란히 담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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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자율적 개인의 이성에 담긴 깊은 묘리와 본질적으로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공동체 윤리 사이의 간극을 지적하며, 현대의 문명과 사회, 그것을 운영하는 정치체계가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힙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움 속에서도 드는 아쉬움은, 첫째로 김우창 선생의 이 저작은 명저의 반열에 들어도 부족함 없을 놀라운 사유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잡함과 난해함으로 인해 독해가 쉽지 않다는 점에 있습니다. 두번째 아쉬움은 이러한 연구가 정치적 과제나 가치 실현을 향한 차원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러한 아쉬움이 김우창 선생에 대한 평가로 이어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께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 나머지는 다른 연구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우창 선생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같은 차원에서 자신만의 논지를 전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연구가 현실정치의 차원과 이어지지 않은 채 만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특정 계층만을 위한 지적 성취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귀결은 그런 저작을 낸 저자의 잘못이 아니라, 그것을 현실정치의 차원과 연결시켜야 할 연구자들의 게으름에 혐의를 둘 일입니다.

    하여튼 이 글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은 철학이 필요할 때’라는 것입니다. 언뜻 이 이야기는 한편 고리타분하고 ‘그래서 어느 세월에 이 아귀지옥 같은 시대를 바꾸겠는가’하는 핀잔 내지는 비난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진보적 가치를 옹호하고 현 시대에서 뭔가를 개선하려 하는 모든 움직임은 ‘사람이 더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 ‘사람이 더 대접받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음에 분명합니다. 인간의 행동과 마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그 모순되고 불가피하게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성찰 없이 그러한 사회를 만들 의제를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깊이 있는 많은 이론들이 나와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참조하는 많은 지적 성과물들은 대부분 해외의 것들입니다. 그러한 성과물이 나온 덴 그만한 역사적 흐름이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역사는 그들의 역사와 다릅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지적 성과물을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어떤 현재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지를 다층적으로, 최대한 다양한 입장에 서서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80년대 말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진보정치의 역사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현대사의 질곡과 그러한 질곡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수세기에 걸친 역사적 맥락을 살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민족적 스테레오타입과 개인은 어떤 식으로 사회와 관계를 맺어 왔는지가 밝혀져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너무나 큰 대상은 제대로 보이질 않습니다. 쾰른 대성당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너무나 커진 지금의 국가체제는 그 규모의 광대함이나 구조의 복잡성이 한마디로 정의될 만큼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정의될 수 없다고까지 말하고 싶진 않으나, 그렇게 하기 위해선 충분히 복잡한 논의가 이루어진 뒤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 커다란 국가체제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 것 자체만으로도 폭력일지 모릅니다. 그것을 낱낱이 드러내기 위한 탐구생활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미지가 넘쳐나는 오늘날 할 일은 다만 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는 것이라는 지젝의 단언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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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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