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디라 간디,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다
    [인도 수구보수파들의 생얼] 민주주의를 훼손한 그녀
        2014년 07월 28일 04: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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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 회의 글 ‘바즈랑 달의 반기독교 운동, 기독교의 공격적 선교활동’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인도 초대 수상 네루가 집권 17년 만에 돌연 병사했다. 죽기 전 많은 사람들이 네루 다음에는 누구일까 궁금해 했다. 네루 스스로는 자신의 딸 인디라가 대권을 잡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라고 일축했지만 오해를 살만한 일은 몇 가지 있긴 했다.

    인디라는 독립 이전에 일찍이 죽은 자기 어머니를 대신해 오랫동안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해온 데다가, 네루가 죽기 몇 달 전 인디라는 네루의 후광을 적극 활용해 집권당인 인도국민회의의 당대표로 선출되었는데, 네루는 이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네루 사후 치러진 선거에서 인도국민회의는 다시 여당이 되고, 수상직은 샤스뜨리(Lal Bahadur Shastri)라는 원로 정치인에게 돌아갔으나 그 또한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병으로 죽는다.

    또 다시 비게 된 수상직을 잡기 위해 많은 집권 여당 정치인들이 심한 경쟁을 하였으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미봉적으로 만만한 애송이라 여겨진 인디라를 수상으로 앉힐 것을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인디라가 자기 아버지의 후광을 적극 활용한 바는 있었으나 네루가 인디라를 일찍이 후계자로 지명하거나 그에 관한 교시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볼 때 소위 말하는 네루 왕조라고 하는 것은 피상적인 해석이다.

    비록 네루부터 시작해 인디라 간디 그리고 인디라 간디의 아들인 라지브 간디, 그리고 다시 그의 아들인 라훌 간디가 차기 수상직 1순위에 오른 권력 세습의 현상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달지 않지만, 엄밀하게는 네루 왕조가 아니고, 인디라 간디 왕조라 해야 옳을 것이다. 굳이 충실한 민주주의자 네루의 이름을 끄집어들여 그를 더럽힐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디라 간디는 수상이 되고 나서 아버지 네루가 세운 국가 건설의 몇 가지 원칙 특히 의회 민주주의와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회라고 하는 국가자본주의 그리고 세속주의의 가치를 국가의 기본 이념을 확고하게 지켜나갔다.

    그런데 그 가운데 국가자본주의에 토대를 둔 경제 상황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식량 위기가 만연하고 외환위기까지 겹친 데다 그것을 해결하려다가 발생한 물가 급등까지 겹쳐 인디라 간디와 집권 여당인 인도국민회의는 매우 심각한 위기에 봉착한다.

    1967년이 되면서 서벵갈의 낙살바리에서 마오주의자 농민 반군이 엄청난 기세로 유혈 봉기를 하였고, 서벵갈과 께랄라에서는 공산당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는다.

    인디라 간디 정부는 우선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녹색혁명을 시작하여 상당한 진전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가 고스란히 지주에게만 돌아가면서 농민 불만이 갈수록 고조된다. 여기에 네루가 시행했던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계승하여 은행, 보험, 석탄 산업의 국유화와 외환규제법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결과로는 만연한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실패를 맛보게 되고, 권력까지 내줄 상황까지 되었다.

    인디라 간디가 반민주 독재 보수 정치를 시작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였다 그 시작은 1971년 총선부터 시작되었다. 인디라는 ‘빈곤 추방’을 선거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렇지만 빈곤의 대상이 되는 지주제 철폐나 부패 척결, 부자 탈세 방지와 같은 빈곤한 농민과 도시 빈민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마련하지 않았다.

    오로지 구호만 앞세워 못 배우고 간한 인민들에게 지지를 확보하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가동하여 승리를 거두고, 1971년 12월에는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1974년에는 암호명 ‘미소 짓는 붓다’ 아래 핵실험을 성공을 거두었다.

    긴박한 경제난은 놔두고 전쟁과 핵무기 개발을 통해 강한 국가를 천명하고 파키스탄에 대한 적대적 구조를 세우면서 민심의 물꼬를 다른 데로 돌리는 전형적인 보수 세력의 전략을 구사하여 지지 기반을 확고히 다듬었다. 경제는 더욱 어려워짐에도 농촌과 도시의 빈민층은 국가주의와 반무슬림 전략에 파묻혀 그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었다.

    1973년에는 델리를 비롯한 북부 인도 전역에서 가중된 경제난과 부패의 심화 등에 대해 시민 저항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5년 6월 자신의 지역구에서 저지른 부정 선거에 대해 알라하바드(Allahabad) 고등법원에서 의원직 박탈 (즉 수상직 하야) 및 향후 6년 간 피선거권 박탈을 판결하자, 인도 헌정 사상 처음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켜버렸다.

    인디라 간디

    연설하는 인디라 간디

    그 후 인디라 간디는 야당 정치인을 구속하고, 언론을 탄압하는 등 독재 정치로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차남인 산자이 간디(Sanjay Gandhi)가 제2인자의 위치에서 권력을 남용해 민주주의의 구조가 크게 침탈당했다. 산자이는 도시 슬럼을 강압적으로 소개시켜버리고, 산아제한을 한다는 명분으로 빈민 남성을 강제로 잡아들여 불임 수술을 해버렸다.

    그 뒤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1977년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 이 선거에서 야당 세력은 민주주의 회복을 기치로 내걸고 반(反)인디라 간디 연합을 이루어 이념을 떠나 제1야당인 국민당(Janata Party)으로 모였고 그 결과 야당은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해 일약 집권 여당의 위치에 올랐다. 더불어 인도공산당(M)은 서벵갈에서 처음으로 집권당이 된 공산당 집권 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국민당은 집권을 하긴 했으나 전혀 이질적인 정파들로 연합을 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권력을 다시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에 내주게 된다.

    상대방의 무능 때문에 다시 집권을 하게 된 인디라 간디가 권력 유지를 위해 꺼낸 카드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이 나라를 건설한 네루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면서 애를 쓴 세속주의의 포기였다. 국가자본주의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상황에서 의회 민주주의는 이미 포기했고, 세속주의마저 포기하면서 인디라 간디는 권력의 화신인 보수 정치인으로 변해 있었다.

    인디라 간디의 세속주의 포기는 뻔잡에서부터 시작했다. 뻔잡은 독립과 동시에 분단이 될 때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자리 한 시크교도가 다수를 차지하는 주였다. 따라서 네루 때 각 언어에 따라 주를 지정할 때 뻔잡어와 시크교도의 독립된 주를 만들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네루가 종교를 기반으로 하는 주의 분리를 강하게 반대하다가 그가 죽고 난 뒤 1966년에 하리야나(Haryana) 주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시크교도와 뻔잡어 중심의 뻔잡 주가 남게 되었다.

    뻔잡 주 여당인 국가 분리주의를 주창하는 아깔리 달(Akali Dal)은 원래 종교적 색채가 매우 강한 정당이었으나, 인디라 간디 정권 당시에는 그나마 세속주의에 기운 정파가 주도권을 잡은 상태였다. 온건 지도부에 반대하는 빈드란왈레(Bhindranwale)라는 종교 개혁 지도자가 이끄는 급진파 시크교 근본주의 세력이 내부에서 날로 성장해가는 중이긴 했지만 아직은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인디라 간디는 빈드란왈레가 이끄는 종교 근본주의 세력을 암암리에 지원해 아깔리 달의 분열을 획책했다. 자신의 국정 실패에 대한 비판의 물꼬를 돌리려는 심산이었다. 인도는 이미 종교 때문에 파키스탄과의 분단을 겪었고, 그 과정에서 상상을 초월한 재난을 겪었던 터라 국민 대부분은 또 다시 종교가 다르다고 국가를 분리하자는 움직임에 대해 큰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가를 위기로 몰고 가는 아깔리 달의 급진주의자들에 대해 반대하였고, 그들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고 응징하며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의 국가를 지켜내겠다는 인디라 간디에게 환호하였다. 대성공이었다.

    그러나 근본주의 세력은 시크들의 국가인 칼리스탄(Khalistan)을 분리 독립하자는 주장을 더욱 거세게 밀어붙이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들의 반정부 투쟁은 갈수록 심해졌다. 급기야는 1982년 즈음부터는 인디라 간디 정부의 요인을 암살하는 등 테러를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사태는 인디라 간디가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걷잡을 수 없이 과격하게 진전되었다. 결국 1984년 6월 3일부터 8일까지 탱크 등 중화기로 무장한 군대를 그들의 은신처인 시크교 성지인 아므리뜨사르의 황금사원에 투입해 그들을 무력으로 진입하면서 약 300명의 무장 반군을 소탕하고 성지를 피바다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4개 월 뒤인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는 자신의 관저를 지키던 초병인 시크교도 두 사람이 난사한 연발총에 의해 암살당한다.

    인디라 간디는 아버지 네루가 세워 놓은 국가 건설의 근간을 모조리 무너뜨린 정치인이었다. 우선 그는 권력 쟁취를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를 위배하는 그 어떤 짓도 서슴지 않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당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자신과 반대편에 선 의원과 당원들을 몰아내 분당을 했다. 다음으로 그는 가난한 농민들의 생존 투쟁을 외면하고 그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물꼬를 돌리는데 집착하였다. 민생은 외면하고 오로지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서 파키스탄에 대해 승리를 거둔 사실만 대대적으로 알렸다.

    그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잘못은 뻔잡의 아깔리 달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소수파를 지원해 분열을 획책했는데, 하필 국가 건설의 가장 큰 근간인 종교 근본주의를 무덤에서 회생시켰다는 사실이다. 정치란 더러운 것이고, 지극히 현실적인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방편도 용납될 것이다.

    다만 그 하는 행태 가운데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이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진보 진영은 ‘내 어찌 차마…’일 것이고, 보수 진영은 ‘무슨 짓인들 못해’일 것이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의 그 권력욕 때문에 종교 공동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났고, 그 때문에 온 나라가 학살과 테러의 반복으로 피바다가 되고 있다. 보수 진영의 금도 없는 정치, 바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진다. 진보 진영은 진보 진영에 어울리는 방편을 택해 정치를 하는 것이고, 보수 진영은 보수 진영에 어울리는 방편을 택해 정치를 하면 된다. 그러나 그 어떤 정치를 하더라도, 금도는 있어야 한다. 바로 전쟁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트라우마는 뭐니 뭐니 해도 한국전쟁과 그 전후 시기에 발생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동족상쟁의 비극이다. 그러다보니 부정선거와 국정 실패 때문에 발생한 정권의 위기를 북한과 연계시키는 북한 프레임 즉 전쟁 위기가 매우 유효하게 먹힌다. 그래서 수구 세력은 그 ‘전쟁 위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자 하는 유혹에 잘 빠진다.

    인도가 파키스탄과의 분단에서 겪은 엄청난 동족상잔의 비극 때문에 국민들이 국가주의 프레임에 쉬 빠져들듯이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박근혜씨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자신의 부정선거 문제를 희석시키고자 다른 데로 물꼬를 돌릴 수는 있다. 그것은 정치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런 비열한 행위를 허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국 정치의 판도라의 상자인 남북문제를 훼손시키는 차원으로 가서는 안 된다. 할 게 있고 해서는 안 될 게 있다. 남북문제를 훼손하는 것은 또 다른 전쟁을 치르는 것일 수도 있다.

    인디라 간디는 그나마 아버지 네루를 따라 민족운동도 하고 사회주의에 대한 학습도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기로 결심하기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박근혜씨는 다르다. 진보라는 것은 차치하고 민주주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 그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은 오로지 하나, ‘짐이 곧 국가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궁지에 몰리면 남북문제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일 곧 전쟁 – 설령 전면전은 아니리지라도 – 카드를 꺼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인디라 간디나 박근혜씨나 모두 어머니가 안 계신 상태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 정치를 위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하거나 잘 파악하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두 사람 다 인민의 목소리로부터 유리되어 있는 절대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인디라 간디는 권력을 잡기 위해서라면 국가가 무너지든 자신의 아버지의 유훈이든 개의치 않았다. 그는 권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네루가 세운 국가 기틀 중에 가장 중요한 세속주의를 짓밟고, 종교 공동체 간의 갈등을 사주하고 부추겼다. 그러다 결국, 자신이 무덤에서 꺼낸 그 카드 때문에 총 맞아 죽었다. 한국 땅에서 제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건전한 보수 우익이 없는, 수구 꼴통밖에 없는 한국의 정치판이 너무나 불안해서 드리는 말씀이다.

    필자소개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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