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맑스주의의 증언자?
    [비판과 비평] 진보좌파의 재건이 시급한 이유
        2014년 07월 28일 09: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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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권, 사라진 통치성

    박근혜 정권이 들어 선 이후, 이 정권을 수사학적으로 비판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유신으로의 회귀’를 들먹거렸다. 박정희 정권의 부활이니 공작정치의 부활이니 심지어 파시즘의 등장이니 하는 것들 말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역사의 ‘비가역성’을 전혀 사고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했다.

    사실 박근혜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박정희 향수’가 보여주듯, 더 많은 성장과 풍요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이 그것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대중들의 의식 속에 없다. 그들은 현재의 고통을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와 대비시키며, ‘더 좋은 삶’을 기대했기 때문에 박근혜를 지지한 것이었다. 그것도 젊은 세대보다는 60대 이상의 인구층에서 나타난 압도적 지지에 불과했다. 박근혜 정권의 실세 중 일부가 ‘유신의 향수’가 있다는 것과 이 정권이 ‘유신 정권’인 것과는 별개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박근혜 정부는 대중이 기대하는 경제적 부흥을 만들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황이서 고속 성장의 조건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적 국가장치를 통한 일자리 제공, 복지 증진, 가계소득 성장과 같은 정책을 펼 수가 없다.

    오늘날은 경제를 통한 헤게모니 전략 자체가 불가능한 시대인 것이다. 이것은 비단 박근혜 정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현재의 조건에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구조적 제약’에 발목 잡힌 한국 경제를 정상의 궤도로 올려놓을 수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진보정권이나 다 마찬가지다.

    박근혜 정권이 통치의 정당성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억압적 국가장치를 동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출발부터 문제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이 정권의 발목을 잡았다. 국정원은 취약해진 자기 정당성을 만회하기 위해 통진당 사태처럼 있지도 않은 ‘내란 음모’를 터트리고, 종북주의 논쟁을 조장했다.

    더군다나 국정원은 ‘간첩’을 만들기 위해 증거조작이라는 초유의 상황을 만들었고 검찰은 그 조작된 증거로 피고인을 기소했다. 간첩 증거가 조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검찰은 다시 ‘이상한 증거’를 가져와 상처 난 자존심을 만회하려 발짝하고 있다. 이 사태로 국정원, 검찰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세월호 사태 이후 보여준 해경의 모습과 행정부의 사후 대책은 이 정권의 무능함의 끝을 보여주었다. 초동 대응에서부터 구제활동에 이르기까지 해경은 존재이유가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도록 만들었다. 해경은 세월호와 함께 까라 앉는 아이들, 시민들을 그저 방치했을 뿐이며, 침수 후 구조는 사유화된 기업에게 맡겨버렸다.

    행정부의 위기관리 체계도 해경의 그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컨트롤 타워도 없었고, 책임지는 이도 없었다. 심지어 유족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대응에 있어서도 이 정권은 철저한 무능으로 일관했다. 이 정권은 정서적으로 ‘대중의 고통’을 치유하기보다 더 심화시키는 존재가 되었다..

    ‘민중의 지팡이’들은 여전히 공무를 집행하고 있겠지만, 미디어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시민을 보호하는 자들이 아니라 시민을 가로막는 자들이다. 대한민국의 경찰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가로 막고, 시찰하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그들은 삶터를 지키는 할머니들의 천막을 부수고, 할머니들을 끌어내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정권에 들어서 보여준 경찰의 모습은 ‘벌거벗은 할머니들을 유린’하는 집단으로 표상된다는 점이다.

    인사 참사는 이 정권의 ‘무뇌아적 속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문창극이라는 인물을 총리 후보로 지명한 것도 정권에게는 참극이었겠지만, 여론이 문창극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미 폐기 처분한 총리는 다시 새운 것은 희극 중에서도 희극이었다. 박근혜 정권은 대중들에게 ‘너희들이 내가 지명한 후보를 반대했지! 좋아 그렇다면 나도 물러서지 않겠어. 맛 좀 봐, 이 녀석들!’ 하는 것이었다. 이 정권은 통치를 시민들을 향한 ‘감정 싸움’으로 타락시켰고, 인사 청문회 제도를 스스로 희화화 시켜 버렸다. 반동적인 보수언론들 조차 말문을 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다.

    박근혜 정권은 종북주의 말고는 더 이상의 통치 담론을 생산할 능력도, 생산할 의지도 없는 정권이다. 이 정권의 실세는 오로지 국가장치를 통한 조작만으로 권력의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낡은 환상에 빠져 있다. 대통령은 그저 이 실세의 논리만을 앵무세처럼 반복하는 집행위원일 뿐이다. 그들의 감성은 박정희 시절 중앙정보부식 사고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들은 그런 퇴행적인 통치에 속아 넘어가는 존재도 아닐뿐더러 박근혜 정권 스스로 이런 대중들을 집단적으로 억압할 힘도 없다. 박근혜 정권은 유신독재, 파시즘이기는커녕 ‘자기 스스로 두발로 설 능력도 안 되는 유아적 존재’인 것이다.

    박근혜는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인가?

    오히려 박근혜 정권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역설적으로 말해, 억압적 국가장치의 내파였다. 국정원, 검찰, 경찰과 같은 억압적 국가장치는 부르주아 권력을 ‘최종 심급에서 보장하는 수단’이다. 이 억압기제들은 되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일 때 부르주아 통치는 잘 돌아가는 것이다. 주먹보다는 말이, 말보다는 돈이 더 좋은 통치 수단이다. 박근혜 정권은 돈을 만들어 줄 능력도 없고, 말로서 대중을 감화시킬 능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먹조차 제대로 놀릴 줄도 모르는 정권인 것이다.

    박근혜 맑스

    이것은 부르주아권력의 입장에서도 매우 애석한 일이다. 현대의 부르주아 정권은 미디어를 독점하고 있고, 학계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으며, 시민사회 내의 주요한 네트워크를 지배한다. 현대의 통치란 이런 네트워크, 언론, 지식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은 이런 현대적인 통치수단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부르주아 지식인들은 박근혜 정권의 통치에 대해 혀를 차고 있는 상황이고, 반동적인 조중동조차 ‘이것은 아니다’라고 연일 칼럼을 쓰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최종심급에서의 억압’ 수단을 너무나 일상적인 정치 과정에 동원함으로써 그 존재 이유를 스스로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은 이제 국정원이 무엇을 발표해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되었으며, 검찰이 누구를 기소해도 냉소를 보낼 뿐이다. 더불어 경찰이 어떤 증거를 내세워도 각종 음모론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박근혜 정권은 대중들로 하여금 국정원, 검찰, 경찰에 대한 신뢰도를 지속적으로 낮춤으로써 그 존재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도록 만들고 있는 셈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국가를 ‘부르주아 집행위원회’라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표현은 많은 철없는 마르크스주의자들로 하여금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단순하게 사고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마르크스의 사상 중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 국가론이고, [공산당 선언]의 저 표현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취약함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결코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라고 단순화 할 수 없다. 경찰이 단지 억압수단이라고만 할 수 없듯이.

    그런데 어떤 점에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가장 잘 증언하고 있는 것이 박근혜 정권이라 할 수도 있다. 박근혜 정권을 보면 언론은 이데올로기 조작의 수단이고, 억압적 국가장치들(국정원, 검찰, 경찰)은 권력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봉사하며, 이 정권의 경제 장치들은 ‘줄푸세’에서 보듯, 공급측(기업들)의 이익만 대변하고 있다. 이 정권은 부르주아계급, 그것도 매우 협소하게 정의된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하는 정권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권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불어 억압적 국가장치를 파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혁명주의자들은 어쩌면 박근혜 정권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른다. 박근혜 정권은 스스로 억압적 국가장치들이 인민들의 이익에 전혀 봉사하지 않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장치들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박근혜에게 감사해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희극의 세계라 할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스스로 구원자가 될 수 없는 존재.

    김한길-안철수 체제의 성립이후 새정연은 여당의 친위부대 역할을 충실히 해 왔다. 김한길 안철수 체제는 당내 권력은 김한길, 대권은 안철수라는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체제임이 분명하다. 당내 권력 장악에만 혈안이 된 민주당 지도부는 사실상 새누리당의 정책과 뚜렷한 차이점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새정연은 대안적인 통치 어젠다에 있어서도, 정치적 동원에 있어서도 무능함으로 일관한 것이다.

    박근혜 정권의 반공주의 공세에 새정연은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종북주의 논란을 확산시키는데 음으로 양으로 부응했다. 더불어 국정원 간첩사건, 선거 조작에 대해서도 효과적인 대정부 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새정연은 행여 종북으로 매도당할까 쩔쩔매는 형국이었다. 그러면서 청와대와 정부의 통진당 해산 추진이라는 초유의 권력 남용 사태에 침묵했다. 국정원 대선개입은 정보기구가 내정에 간섭함으로써 ‘상징적 중립성’을 해친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새정연은 여당과의 대결은 ‘소모적인 것’이라는 논리 속에 침묵하고 말았다..

    이 점에서 안철수의 기여는 대단했다. 안철수는 ‘반정치주의자이자 포퓰리스트’답게 여야의 정치적 대결과 정쟁을 구분조차 하지 못했다. 대중들의 통념 속에 자리 잡은 ‘정쟁’은, 사기꾼 비슷한 정치인들이 자기 이권을 위해 그저 ‘충돌하는 것’ 을 의미한다.

    안철수의 의식은 이와 같은 대중의 통념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는 야당지도자이면서도 일체의 정쟁을 회피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한길-안철수 체제에서는 여당이 하는 일을 야당이 지원하는 게 야당의 역할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새정연은 일종의 친여 야당인 것이다.

    원래 야당이란 정부 여당과 다른 대안적인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통해 여당과 쟁점을 형성하며, 대중들을 설득하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 이는 의회 내 논쟁이 될 수도 있고 원외의 투쟁이 될 수도 있다. 김한길-안철수 체제는 국정원 대선개입, 세월호 사태 등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실책에 대한 효과적인 반대, 비판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그들은 독자적인 의제를 설정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권이 펼쳐 놓은 장에서도 아무런 효과적인 대응을 못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필요 없는 정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정당화 했다.

    세월호 사태 이후 ‘위험에 대한 체계적 인식의 필요성’을 의제화 시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세월호 유가족 자신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월호 사태가 원인을 규명하고,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해 끈기 있게 싸워왔으며, 대안적인 제도를 법제화시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는 존재가 되었다. 치유되어야 할 분들이 새로운 의제를 만드는 주체가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새정연이 세월호 특별법 투쟁에 결합하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들은 역할은 의제를 선도하기보다 대중의 투쟁으로 만들어진 의제를 추종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새정치연합의 구원자, 박근혜 정권과 진보좌파

    새정연을 정치적으로 구원한 것은 박근혜 정권과 진보진영이다. 앞 절에서 보았듯이 박근혜 정권의 연이은 실수와 퇴행적인 통치는 대중들이 이 정권에 가졌던 약간의 기대마저 완전히 날려버렸다. 박근혜는 행정의 최고책임자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유체이탈 화법’을 통해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해서는 남의일 다루듯 했고, 세월호 사태에 대해서는 자신이 징벌의 주체인 양 행동했다.

    박근혜씨는 조잡한 연극으로써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련의 사태와 자신은 무관한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지켜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이는 박근혜를 지지한 대중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독특한 입장이었다.

    세월호 참사는 6.4 지방선거 전에 발발했고, 문창극 사태는 7.30 보궐 선거전에 나타남으로써 ‘존재하지 않던 야당을 존재할 것 같은 야당’으로 만들었다. 김한길-안철수의 새정연은 잘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대중들로부터 다시 주목받았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로 인해 한국 야당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상대의 자살골만으로 이길 수 있는 축구는 얼마나 편한 게임인가?

    진보진영도 새정연의 구원하는 존재가 되었다. 새정연은 박근혜 정권에 대해서 야당으로서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무능보다 더 초라해진 것은 진보진영이었다.

    2010년 통진당 경선부정 사건과 당 해체, 2012년 이석기 그룹 사태를 경과하며 진보진영은 네 갈래로 갈라졌고 어느 하나 대안적인 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중들은 박근혜 정권이 문제가 있다고 보았지만 그 대안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세력은 새정연 밖에 없었다. 새정연이 잘 한 것은 없었지만 그보다 괜찮은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새정연을 다시 지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보좌파 입장에서 무엇보다 아픈 현실은 이른바 ‘진보적 시민사회’나 ‘진보언론’들조차 이제 진보진영을 유령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세력들은 노동자운동의 독자적인 의제 설정 능력을 전혀 믿지 않으며, 노동자 운동을 기득권 옹호 운동으로 보는 듯하다.

    통진당은 종북주의로 경멸의 대상이 되었고, 노동당과 같은 좌파들은 현실 정치세력으로 아예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진보적 시민사회’는 정의당에게는 독자적인 정당으로 남기보다 새정연으로 들어가 진보 블럭을 만들라고 요구한다. 진보진영의 독자정치 세력화는 끝났으니 개혁을 위해 새정연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진보적 시민사회나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것에는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이데올로기적 편향이 동시에 작용한다. 이들 시민단체들은 지방정부든 중앙정부이든 야당이 권력을 잡아야만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새정연 외의 정당에 대해서는 아예 유령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들은 자유주의 개혁진영으로서 어떤 급진성도 지니지 못한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적 질서 속에서 이미 적응한 개혁세력이기 때문이다.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같은 진보 언론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국면에서 개혁적 시민사회에게 아무리 무능해도 박근혜 정권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새정연인 것이다. 새정연은 제대로 된 야당정치를 함으로써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지지를 받는 이유가 되는 매우 독특한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새정연은, 그들이 무엇을 하더라도 시민사회와 진보언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안정된 지반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 사회가 심각하게 오른쪽으로 편향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진보좌파의 몰락이 초래한 참담한 현실이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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