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시사회의 위험,
    그 저항이 쉽지 않은 이유들
    [책소개] 『감시사회로의 유혹』(데이비드 라이언/ 후마니타스)
        2014년 07월 26일 04:5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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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비드 라이언은 우리의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감시를 다룬다. 즉 고속도로를 달릴 때, 길을 걸을 때, 카드 결제를 할 때,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이메일을 할 때, 인터넷 쇼핑을 할 때 CCTV나 네트워크 등을 통해 우리의 움직임과 거래 내역이 감시 시스템에 저장된다.

    그의 말마따나 도시에서 시민들은 새벽부터 황혼까지는 물론 황혼부터 새벽까지, 다양한 수단들을 통해 끊임없이 조명 받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이 때 감시는 오웰이 말하는 전체주의 사회나, 빅브라더 혹은 일부 자본가들의 음모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동성과 속도, 안전과 소비자의 자유를 선호하는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조율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가 평소에 누리는 거래와 소통의 효율성과 편리함은 오늘날 삶의 핵심적인 특징이며 감시는 바로 이런 효율성과 편리함에 동반된다. 감시는 단순히 억압과 통제의 문제가 아니며, 단순히 판옵티콘의 외양을 띠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권력으로 보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안전과 안정, 사회질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긍정적인 성과로 생각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감시의 과정에서 감시 대상인 개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진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거래 내역은 감시 시스템에 저장되고, 그 결과 감시 시스템이 사람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일에 스스로 협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감시의 힘은 팽팽하고 강압적인 통제에서부터 느슨하고 부드러운 유혹까지, 그리고 의무로부터 영향력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과 두 얼굴을 갖는다.

    왜 감시 ‘사회’인가

    감시‘사회’라는 개념은 감시 활동이 정부 관료 기구의 틀을 넘어 모든 사회적 회로로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한 분야에서 벌어진 일이 다른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오늘날 감시와 정보의 흐름은 서로 다른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한 분야에서 벌어진 일이 다른 분야에도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예컨대, 교통법규를 위반한 운전자가 교차 확인 시스템을 통해 불법 체류자임이 밝혀질 수 있으며, (가상의 경우이지만) 집세를 내지 않은 학생이 졸업 허가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작업장에서의 감시도 중요하다. 감시 카메라, 이메일과 인터넷을 통해 작업과 이동에 대한 감시가 일터에서 실제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콜센터 직원들처럼 자판 횟수나 통화 길이를 일상적으로 점검하는 감시 기술이 업무를 평가하거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다.

    시장의 흐름이 일대일 관계 마케팅과 개인 맞춤형 마케팅 기술이 강화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회원제 고객 관리, 신용카드 제휴, 한정된 고객을 대상으로 한 표적 광고 등이 이루어지는데, 감시 기술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감시사회 유혹

    탈규제와 감시사회

    개인 정보가 민간 부문과 공공 부문을 넘나들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1980년대부터 일고 있는 경제의 포괄적인 탈규제 흐름이 중요하다. 이 같은 탈규제 움직임은, 한때 정부가 담당했던 일을 민간 기업에 넘기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 경찰이 담당했던 업무 가운데 일부가 보안 회사 같은 상업적 기업으로 넘어간 것이 좋은 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경제 부문은 해체되고, (국가가 운영하는) 공적 조직과 (상업적 동기에 기초한) 사적 조직 간의 구분도 무너지고 있다.

    비용을 절감하고 적자를 감축하려는 정부의 노력은 공적인 데이터베이스 관리 기능을 민간 분야로 넘기기도 하는데, 의료 정보 네트워크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로는 공기업이 민영화되면서 정부 기관이 수집했던 개인 정보가 민간 기업의 수중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 둘 중 어떤 경우든 개인 정보는 더 자유롭게 이동하게 되고 쉽게 유출될 수 있다.

    치안 서비스와 같은 정부의 몇몇 기능들은 민간 기업의 요구에 따라 데이터를 처리할 수도 있다. 가장 단적인 예로는, 보험회사들의 규칙이 점차 민간 경비 업무는 물론 공적인 치안 업무의 방식과 형식까지도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재산과 공공질서에 대한 위험이 인지되면 치안 업무를 통해 수집된 정보들의 소통이 강화되지만, 이때 위험의 범주를 제시하는 것은 보험회사들이다.

    감시는 정의의 문제를 배제한다

    예를 들어 경찰은 법률적 필요 때문에 정보를 수집하지만, 이 자료는 보험이나 고용과 연관될 수도 있다. 실제로 금융기관과 마찬가지로 보건· 복지 서비스 기관과 자동차 등록국, 보험회사 등은 경찰 업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기관들이다. 이는 경찰의 치안 업무가 위험관리의 일부가 되어 왔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감시 지식이 필요하다.

    감시 지식은 더 이상 범죄나 규칙 위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누가 또는 무엇이 위험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지식이다. 즉 교통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을 평가하듯이 범죄가 발생할 가능성을 위험 계산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험 통계의 정당성이다. 사람들은 누가 어디에서 범죄를 저지를지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며, 필요하다면 경찰력을 적절하게 배치한다.

    이처럼 불확실성을 줄이고 결과를 통제하려는 위험관리식 접근법은 공리주의적인 도덕관에 기초해 있다. 이 공리주의적인 도덕관은 관용과 죄책감, 공정함 같은 다른 도덕적 기준을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다시 말해 감시는 정의의 문제를 배제하는 경향이 있다.

    특정한 사람들에게 보험의 기회를 박탈하거나, 도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높은 보험료를 매기는 등의 사례는 이 같은 문제를 잘 보여 준다. 그 결과 한 개인에게 부여되는 삶의 기회는 (사회경제적 계층 내부의 소비 성향이나 규칙, 그리고 법률을 위반하지 않을 가능성 같은) 개연성에 의해 좌우된다.

    위험관리는 규칙들을 바꾼다. 그것은 정의를 보험 통계적으로 왜곡하고 도덕성을 확률로 교묘하게 치환한다. 위험관리는 특정 집단들을 분류하고 견제하려는 새로운 노력과도 연관이 있다.

    위험 사회가 위험을 잉태한다.

    문제는 우리가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힘들게 발전시킨 바로 그 시스템들이 더 심각한 위험을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위험 사회가 위험을 잉태하는 셈이다. 위험 평가라는 목표를 최대한 정확하게 수행하기 위해 감시는 자의식을 지닌 ‘살아 있는 구체적 개인’의 복잡한 행동을, 기본적인 행동 요소들로 해체한다. 윤리를 초월한 접근이, 미덕이나 가치에 대한 과거의 관념들을 대체하는 것이다.

    위험과 관련된 지식이 필요로 하는 것은, 확률에 기초한 공리주의적 계산법과 예상 가능한 행동을 기초로 한 감시 분류뿐이다. 이처럼 운명과 신의 섭리가 하찮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보험회사들이 가장 눈부신 발전을 거뒀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인류가 자신의 미래를 통제하고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곧 진지한 도덕적 비판의 쇠퇴를 의미한다.

    불평등의 자동화: 감시를 통한 범주화와 차별

    급속도로 발전된 감시 능력은 주민들을 분류· 선별하고 그들을 범주화· 차별화하는 데 사용됐다. 추상적인 집합· 개별 데이터에 기초한 사회적 분류 과정은 모든 사회경제적 계층을 통틀어 감시가 자동적으로 이뤄지도록 한다. 판옵티콘이 감옥에서 사라졌다 해도 이는 판옵티콘적인 측면이다.

    그 결과 일부는 기회가 확대됐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기회가 줄었다. 뉴욕의 도시계획 위원이었던 로버트 모제스가 고안한, 낮은 다리와 통로는 좋은 비유가 된다. 모제스는 흑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태운 버스가 도시의 특정 지역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높이 제한을 만들었다. 새로운 기술에 기초한 감시 시스템은 오늘날 이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의 감시 시스템은 범주화와 위험관리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게 삶의 기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감시사회의 등장은 육체의 소멸과 깊은 관계가 있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대면 접촉의 성격을 띠었다. 물론 현대에도 대면 접촉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대부분의 관계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매개된다. 이메일, 인터넷, 스마트폰, SNS 등이 단적인 사례다. 인간들 사이의 접촉에 회로가 개입하고 육체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하거나 몸짓을 할 때 신뢰를 전달할 수 있는 육체가 사라짐에 따라 신뢰의 징표가 필요해졌다. 따라서 일상 활동이 실제 자신의 것임을 승인· 검증하기 위해 감시가 이뤄진다. 감시는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고, 포함과 배제의 기준에 따라 우리를 분류한다.

    육체의 소멸이라는 명제는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유목화된 세계 속 이방인들의 사회는 프라이버시를 추구하고, 프라이버시는 감시를 불러들인다. 개인의 자격과 평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신분 증명 번호와 바코드가 기입된 카드 등 신뢰의 징표가 필요해졌다.

    근대사회는 정보사회

    서구의 근대성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아래서 ‘독립적 개인’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었다. 개인은 가족과 집단, 도시로부터 자유로웠고 서로 구별되었으므로 새로운 민주적 질서에 자유롭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개인’이라는 담론은 이렇게 출현했다.

    다른 한편, 역설적이게도 이런 변화는 개인 정보의 수집으로 이어졌다. 각자의 정체성이 확립됨에 따라 개인들 간의 구별은 분명해졌지만, 그만큼 그들을 통제하기가 쉬워진 것이다.

    다시 말해 감시 능력의 확장은 근대성의 한 측면이다. 이는 우리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배열을 조직과 통제라는 합리적 체제로 바꾸려는 시도에서 만들어 낸 세계의 한 부분이다. 이런 체제들은 육체의 소멸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감시가 원래 반사회적이고 억압적인 과정은 아니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근대성의 특징인 개인 생활에 대한 관심은 투표권이나 국가의 지원을 받을 권리와 같은 시민권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정당하게 보수를 받거나 적절한 시기에 승진 혹은 은퇴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관련 정보가 축적되고 이를 통해 개인의 신원을 확인하고 그의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감시가 근대성의 말기에 변모하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특정한 환경에서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해서, 감시가 근대화된 사회생활의 한 단면이라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다.

    감시에 대한 저항이 쉽지 않은 이유

    저항의 길목에 가로놓인 가장 큰 장애물은, 감시의 혜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라는 것과, 그것이 잘 홍보되고 있다는 다소 평범한 사실이다.

    감시는 언제나 두 얼굴을 하고 있는데, 감시의 부정적이고 반사회적인 측면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힘든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은 이런 측면을 단순히 감시의 또 다른 ‘얼굴’, 다시 말해 속도· 안전· 보안을 누리는 대신에 치러야 할 대가쯤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당연히 감시로 혜택을 입는 정부 기관이나 기업은 자신들의 주장을 펴기 좋은 위치에 있다.

    이런 거대 조직들이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물론 그 하나는 순전히 이 조직들의 조직적· 기술적 힘 덕분이다. 이들은 프라이버시 보호법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서조차, 부정적인 측면이 잠재돼 있는 데이터 수집과 처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강력한 위상을 확보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기술적으로 발전된 대다수 현대사회를 뒤덮고 있는 헤게모니의 힘이다. 이것은 지배 집단이 제시하는 사회적 삶의 일반적 방향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내는 동의를 말한다. 이런 동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삶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의 감시는 필요하다는 것에 대한 동의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요할 경우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가, 감시를 문제 삼기에 적합한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는 보편적 가정이다.

    프라이버시는 적절한 기준도 저항의 방법도 될 수 없다

    프라이버시에 바탕한 접근은 감시를 사회적 문제로 또는 권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지 않으며, 개인의 문제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거대 정부와 기업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개인 정보를 추출· 처리· 교환하고 거래하기까지 할 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프라이버시에 대한 주장을 환영한다.

    하지만 프라이버시에 대한 요구가 개인적인 문제의식에 그쳐서는 안 된다. 프라이버시 문제는 강력한 사회 세력들과 연관된 공적 이슈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개인의 기록은 그 사람의 과거와 지금 형성 중인 사회관계의 네트워크를 묶어 내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감시는 단순히 사적 공간을 침범하거나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들을 분류하고 등급을 나누는 하나의 수단이다. 다시 말해 탈근대성이라는 환경 속에서 감시는 사회적 분할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그 힘이 점점 더 강력해지고 있다. 슈퍼 판옵티콘에 의한 분류가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할지, 그 자격과 접근권을 결정하기 위해 사람들을 거침없이 선별· 감시· 서열화하기 때문이다.

    근대성에 내재한 사회적 균열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좀 더 부드러워져서 유동적이고 유연해진 것이다. 감시는 삶의 기회와 사회적 운명에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 되어 왔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프라이버시 정책이 존재할 때조차 감시는 부당하고 반사회적인 특징들을 드러낼 수 있다.

    새로운 정의와 윤리의 필요

    이제 감시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사회정의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잠재적 위협과 현재 이뤄지고 있는 감시에 대한 원칙 있는 자각을 요구한다. 감시라는 함정을 통과해 이론과 정치 모두를 안내하는 윤리는 다시금 ‘살아 있는 구체적 개인’을 바탕으로 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며,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의가 있다. 하나는, 소통 윤리에서 대면 접촉이라는 개념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타자the Other에 대한 관심은 [인간을 다른 생물과 구별하는] 인간다움의 원초적인 요구라는 것이다.

    전자적으로 확장된 이방인들의 사회가 기존의 고전적인 인종적 혹은 계급적 정형화에 더해 ‘낯섦’strangeness이라는 범주를 창출할 때, 타자에 대한 관심이라는 요구는 내버릴 것이 아니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런 특성은 또한 개인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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