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적 사회민주주의를 위하여
[기고] 박노자의 반(反)사회민주주의 칼럼에 답한다.
    2014년 07월 25일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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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민저널에 실린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의 글을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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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비그포르스와 올르프 팔메, 독일의 빌리 브란트와 오스카 라퐁텐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슈뢰더-블레어-올랑드의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 즉 진보적 자유주의의 아류로서의 사회민주주의와는 달리 신자유주의에 단호하게 맞서는 전투적 사회민주주의이며 또한 동시에 긍정적인 대안적 미래비전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능력을 가진 유능한 사회민주주의이다.

박노자는 왜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닌가?

우리나라 노동당의 당원이며 노르웨이 대학 교수인 박노자가 지난 7월8일자 한겨레신문에 <나는 왜 사민주의자가 아닌가>라는 칼럼을 썼다. 그 내용이 흥미롭다. 그 칼럼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사회민주주의로는 그것에 제대로 맞설 수 없다’는 것이다.(관련 글 링크)

그 칼럼의 그려 넣은 삽화가 시사적이다. 시꺼멓고 커다란 몸집의 괴물의 품 안에 사회민주주의가 안겨 포획되어 있다. 그 괴물의 정체는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사회민주주의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그것에 포획되어 있다는 박노자의 비판은 상당 부분 인정될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래 영국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 독일의 슈뢰더 사회민주당, 프랑스의 죠스팽 사회당 등이 ‘제3의 길’을 천명한 이래 많은 사회민주당들이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뿌리를 스스로 잘라 버림으로써 사실상 자유주의(진보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으로 변신하였다.

그 결과 유럽의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미국의 민주당(진보적 자유주의)와 별 다른 모습을 찾기 힘들게 변신하였다. 영국의 경우 토니 블레어가 이끈 제3의 길 노동당은,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과 야합한 미국의 클린턴 민주당 정권(진보적 자유주의)과 마찬가지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낳은 직간접적 책임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리스와 스페인의 경우 집권 사회민주당들은 2008년 이후의 대공황적 금융위기의 한복판에서 복지 축소와 노동권 축소, 재정 긴축을 요구하는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노선을 스스로 지지함으로써 사실상 자유주의 정당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리하여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는 – 미국의 진보적 자유주의와 함께 – 세계적으로 회의와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로는 신자유주의에 전투적으로 맞설 수 없으며 따라서 박노자의 말 그대로, ‘신자유주의 시대의 진보로서 사회민주주의에 미련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만약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일의 빌리 브란트와 오스카 라퐁텐, 스웨덴의 비그포르스와 올로프 팔메의 정신을 계승하는 정통 사회민주주의라면, 즉 신자유주의와 수미일관되게 맞서 대결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경제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는 전투적 사회민주주의라면 어떨까? 박노자는 그것마저도 거부하겠다는 건가?

비그포르스725

스웨덴 사민주의의 실질적 기초를 만든 비그포르스

사회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벌어진 범죄 행위를 비판해야

하지만 전투적 사회민주주의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가 그간 국내외에서 어떻게 오용되어 왔는지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

브라질에는 사회민주당과 노동당이 있다. 이 두 정당 중 어느 것이 진짜 정통 사회민주주의의 정신과 노선에 가까울까? 답은 노동자당이다. 2003년 룰라 대통령 정부를 탄생시킨 이래 그 후계자인 호세프 대통령을 통해 지금도 브라질을 통치하는 노동자당이 바로 정통적 의미의 사회민주주의의 정신과 노선에 훨씬 근접한 당이다. 비록 사회민주당이라는 당명과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에 반해 브라질의 사회민주당은 1990년대에 브라질을 신자유주의로 변형시킨 정당이다. 사회민주당 소속의 대통령 카르도주는 본래 1960-70년대에 좌파적 ‘종속이론’을 전파한 경제학자로 유명한데 그 후 완전히 반대로 전향하였다. 마치 한국의 NL 주사파의 일부가 안병직과 이영훈 같은 뉴라이트 신자유주의자로 완전히 전향한 것과 비슷하다.

카르도주 정부는 석유와 전기, 통신 등 기간산업의 광범한 사영화를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기간산업을 미국 등 다국적 기업에 팔아버렸다. 긴축재정과 고금리, 변동환율제를 요구하는 IMF 및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주문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며, 자국의 금융시장과 외환시장을 대대적으로 개방하여 미국 등 국제금융자본의 활동무대로 만들었다.

브라질 사회민주당이 사회민주주의의 이름에 어울리는 정책을 유일하게 펼친 것은 빈민들을 위한 사회복지를 일부 늘렸다는 것 하나 뿐인데, 이 역시 신자유주의의 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복지 즉 선별적 복지에 불과했다. 본래 IMF와 세계은행도 신자유주의 경제 노선이 불가피하게 초래하는 빈곤층 증가에 대한 처방으로 극빈층만을 선별하는 잔여주의 복지를 인정한다.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 즉 미국의 부시 공화당 정권이 남미와 제3세계 정부들과 워싱턴에서 합의한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지구화 노선을 공공연하게 옹호한 것이 브라질의 사회민주당이었다. 이렇듯 브라질의 노동운동과 민중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사회민주주의라는 명칭은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양(진보)의 탈을 쓴 늑대(시장만능주의) 짓을 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희화화 – 민주노총 국민파의 ‘사회적 합의주의’와 노사정

브라질에서 벌어진 일은 유별난 예외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신자유주의의 관철을 도와준 인물들이 있댜.

김영삼 정부 시절 (1993-97) 이른바 ‘노사정 모델’이 처음 제시되었다. 김영삼 정부를 사상적으로 이끌던 박세일-박형준-박재완 등 뉴라이트 지식인들은 최초의 문민정부인 김영삼 정부가 박정희·군부독재의 ’개발 독재‘를 타파하고 시장 개방과 시장 자율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세계화를 추진했다.

즉 박세일 사단은 대외적으로는 세계화를 추진하여 1994년 WTO 가입, 1996년 OECD 가입을 이룩해냈고, 대내적으로는 시장 자율화를 추진하여 대대적인 규제완화/탈규제와 함께 경제사회 생활의 전면적인 ’자유 시장화‘를 추진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불가피한 저소득층과 노동자들의 피해와 그로 인한 그들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한 장치로 ‘노사정’이라는 ‘사회적 합의주의’ 모델을 그럴 듯하게 들고 나왔다.

큰 기조와 궁극적 목적에서 보면 분명 신자유주의의 관철과 대외개방 모델이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 또는 ‘절차’로서 노사정 협조 모델을 제시한 것이다. ‘사회적 합의’ 절차를 통해 관철되는 내용과 목적은 (사회민주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신자유주의 정신이었다.

1997년 말에 외환금융위기가 발생하고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자 1995년 설립된 민주노총 안에서 노사정 모델과 사회적 합의주의를 적극 수용하자는 흐름이 출현했다. 이른바 ‘국민파’라 불린 민주노총 정파이다. 그런데 이들은 은연중에 자신의 노선을 ‘사회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구체적으로는 스웨덴-네덜란드(사회민주주의 나라)의 사회적 합의주의 모델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당시 민주노총 내의 국민파는 정치사상적으로 대체로 NL 성향을 보이는데 이들은 김대중 정부의 노사정에 적극 참여하자고 하였으며(참여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더구나 김대중 정부가 원하던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 즉 대기업과 은행, 공기업에서의 대규모 구조조정(대량 해고를 포함한)과 노동시장 유연화(근로자 파견 및 정리해고 합법화)에 분명하게 저항하지 않고 타협하는 모양새를 만들어주었다.

국민파는 말하기를, 전국민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던 ‘시장 개혁’(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병행 발전!)은 한국경제의 미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하고 정당한 것이므로 김대중 정부의 ‘시장개혁’에 호응하여야 한다고 했다. 진보적 시민단체와 진보언론 모두가 국민파와 함께 하면서 시장개혁을 그 큰 프레임에서 지지했다. 그야말로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었다.

하지만 ‘그 국민’이 과연 누구였는가? 김대중 정부가 IMF 및 세계은행의 도움을 얻어 그 프레임을 만들어낸 이른바 ‘시장 개혁’의 내용은 그 어느 것 하나 ‘워싱턴 컨센서스’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한국판 워싱턴 켄센서스’가 바로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4대 개혁 즉 노동개혁과 공공 개혁, 금융 개혁, 재벌개혁 (재벌개혁도 포함!!)이었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국민파와 그 인근의 진보적 학자·연구자들, 그리고 진보적 시민단체들은 (진보 언론과 더불어) 대거 ‘시장 개혁은 좋은 것’이라는 이유로 그것에 찬성하고 나섰다. 하물며 1998년 가을에 민주노총은 IMF 실사단의 한국 방문에 맞추어 환영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IMF가 요구하는 각종 개혁은 한국 경제와 한국 사회의 새로운 질적 도약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바이다’는 내용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사회민주주의를 ‘진보적 자유주의의 아류’로 전락시킨 인사들

민주노총 국민파와 그 인근의 학자·연구자들, 특히 비NL 국민파 인사들과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이런 노선,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을 큰 틀에서 수용하되 단지 작은 사안들에서는 노동자의 입장에 서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노선을 ‘스웨덴 또는 네덜란드식’의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이름으로 – 그리하여 은연중에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 정당화하고자 했다.

물론 이들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고 수미일관되게 사회민주주의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는 용기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노사정과 사회적 합의주의 이외에는 사회민주주의의 철학과 정치경제학, 역사에 대하여 관심도 지식도 없었기 때문이다(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민주노총 국민파의 대다수가 NL의 철학과 세계관으로 교육 받았으니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철학과 세계관에 대해서는 언제나 경멸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의 ‘껍데기’(노사정 합의주의라는 절차 민주주의)만을 취했을 뿐, 사회민주주의의 내용과 가치관 즉 그 영혼과 실체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했다. 그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와 민주당의 영혼이자 실체인 자유주의(개혁적·진보적 자유주의)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철학과 가치관, 정치경제관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를 획득하고자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라는 포장을 썼을 뿐 실제로는 시종일관 진보적 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였다.

박노자의 오류 – 문제는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자유주의

여기서 잠깐, 박노자의 치명적 오류 하나 –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의 품에 꼭 껴안겨 포획되어 있는 것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의 역사 속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이다. 유럽에서는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와 타협하는 사회적 합의(즉 투항)를 주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역할을 수행한 것이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자는 한 줌도 안되는데 비하여 진보적 자유주의자와 그 추종자는 수백 만 명에 이른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진보 학계와 진보 언론, 진보 시민단체에서 압도적인 지위와 숫자를 이루고 있으니, 진보적 자유주의야말로 ‘진보 정치’ 전체를 주도하는 ‘헤게모니 세력’이다.

아무튼, 상당수의 민주노총 국민파 지도자들 그리고 국민파를 도와주는 거의 모든 연구자·학자들이 민주당에 직간접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2012년 선거를 전후해서는 문재인·안철수 캠프에 참여하였으며 지금도 민주당 인사들과 함께 ‘범 진보적 자유주의 블록’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적으로 미래를 도모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독자적인 정치적, 사상적 입지를 획득하고자 한다면 이런 더러운 오명의 역사와 단절하여야 한다. 즉 시장주의(신자유주의)의 관철을 사회민주주의로 포장하게 도와주고, 스웨덴 복지국가의 이름으로 개인의 입신영달을 도모하도록 허용하고, 서민·빈민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개혁·진보 자유주의 정치와 함께 하고자 도모하면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진보적 자유주의의 아류’로 변모시킨 그런 사회민주주의를 우리가 단호하게 비판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즉 악질적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에 전투적으로 맞서는 진짜 사회민주주의의 모습을 우리가 보여주지 않고서는, 이 땅에서 그리고 전세계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수천만, 수억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감동어린 열정과 열광을 만들어낼 수 없다.

빌리 브란트와 오스카 라퐁텐, 비그포르스와 올로프 팔메에서 배우자

박노자의 사회민주주의 비판은 1차원적이다. 그는 마치 사회민주주의에는 제3의 길 노선만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비판한다.

하지만 박노자가 교수로서 생활하고 있는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 노르웨이 자체가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즉 노르웨이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수십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구축해낸 사회민주주의 복지공화국이다. 비록 그것이 천국은 아닐지라도, 대한민국에 비한다면 수십 배는 더 자유롭고 평등하며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세상이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최근 50년간의 역사 속에서 진짜 사회민주주의의 현대적 전통을 만들어낸 비그포르스와 올로프 팔메의 정신이다. 또한 1930년대에 노르웨이·스웨덴에서의 망명 생활과 반나치 레지스탕스 활동 속에서, 그리고 1960~70년대에 독일을 스웨덴에 버금가는 사회민주주의 공화국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던 독일의 빌리 브란트의 사회민주주의 정신, 그리고 그 전통을 잇는 독일의 오스카 라퐁텐의 정신이다.

그리고 비그포르스와 팔메, 브란트와 라퐁텐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회민주주의는, 슈뢰더-블레어-올랑드의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진보적 자유주의의 아류)와는 달리, 신자유주의에 단호하게 맞서는 ‘전투적 사회민주주의’이며, 또한 동시에, 긍정적인 대안적 미래비전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능력을 가진 ‘유능한 사회민주주의’이다.

<사민저널 원 글 링크>

필자소개
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사민저널 편집기획위원장. '쾌도난마' 공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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