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의 시작과 끝, 7사단
    [산하의 가전사] '비목'과 칠성부대 7사단의 어느 장병
        2014년 07월 22일 05:2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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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때 한국군은 열심히 싸웠지만 형편없이 진 적도 많아. 질서 있는 퇴각도 하지 못하는 붕괴 끝에 부대 전체가 해체됐다가 다시 조직된 적도 여러 번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 사단 가운데에는 사단기를 빼앗겼다는 부대가 많다. 가장 유명한 건 27사단인데 사단기를 탈취 당했기에 다른 멋있는 마크같은 것도 없이 빨간 바탕에 ‘이기자’라고 적힌 촌스런 마크를 달았다는 그럴 듯한 전설이 있지. 그런데 사실이 아니야. 27사단은 전쟁 뒤에 창설된 부대거든. 무장공비가 내려와서 사단기를 훔쳐가지 않은 한 탈취 당할 일이 없겠지.

    내가 알기로 사단기를 빼앗긴 건 7사단이야. (수도사단 깃발도 중국 박물관에 전시 중이라는데 글쎄 이쪽에선 부인한다고 하네) 북두칠성 그려진 원래 깃발을 빼앗기고 좀 이상한 모양의 칠성을 부대 마크로 삼고 있지. 칠성부대가 부대명이고 그래서 사이다 부대라고도 불리는데 그래도 7사단 나왔다면 어지간히 빡센 데 나왔다고 인정해 준다. 다들 자기 부대가 제일 힘들다고 주장하지만 일단 7사단이 맡은 지역이 험준하기로는 휴전선 155마일 가운데 첫째 아니면 둘째를 다투는 지역이라.

    이 7사단은 다른 사단과 마찬가지로 6.25때 참 파란만장한 이력을 만들게 된다. 우선 저 비극의 날 6월 25일에 처음으로 육군본부에 전면전의 개막을 알린, 즉 대구경 포탄이 마구 떨어진다는 보고를 한 게 7사단의 정보장교였어. “떨어집니다. 막 떨어집니다.” 원래 7사단은 후방에서 빨치산 토벌을 하다가 동두천 등 전방으로 배치됐는데 그게 전쟁 나기 보름쯤 전이었고 그나마 한 연대는 올라오지도 못한 상황에서 전쟁을 맞게 돼. 포천 동두천 의정부로 이어지는 길은 북한 인민군의 서울 직공 루트였고 7사단은 인민군 최강의 부대를 맞아 싸워야 했지. 이때 7사단은 거의 붕괴되었다가 재조직되게 돼.

    영천 전투에서 공을 세워 패배의 기억에서 벗어났고 평양의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되던 김일성대학 옥상에 최초로 태극기를 휘날린 부대로 이름을 날리지만 우리 국군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라 할 현리 전투에서 또 한 번 창피할 수준의 패배를 당한다. 휴전협정은 시작됐지만 “비기기 위해 하는 싸움” 즉 고지 하나를 놓고 서로 빼앗았다 빼앗겼다 하는 전투는 서중동부전선 모두에서 반복됐지. 영화 <고지전>에서처럼 말이야. 영화 <고지전> 보면 휴전협정 조인 후 실제로 발효되던 시간 이전까지도 피 튀기는 고지전이 전개되는데 그와 가장 비슷한 전투가 동부전선에서 벌어져.

    휴전을 앞두고 가장 초미의 관심이 된 건 화천의 수력발전소였어. 당시 남한 전기의 30퍼센트를 공급하던 이 요긴한 발전소를 남이든 북이든 놓치지 않을 리가 없었지. 또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으로 공산권에 한 방을 먹인 셈이 되자 중국군은 이에 대한 군사적 응징으로 6.25 마지막 전투를 준비한다. 이걸 막아야 했던 게 7사단이었지. 화천 지역의 험악한 산자락에서도 격전이 벌어졌어 7월 13일에는 금성지구 전투가 시작됐고 19일부터는 425고지라는 야트막한 동산 (주위 지형을 고려하면)에서 격돌이 벌어졌지.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곳을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곳에 중공군은 대대 병력을 동원하여 공격해 와.

    1중대장 김한준 대위도 파란만장한 사람이었지. 전쟁난 지 5일만에 총을 맞고 후송됐다가 다시 복귀한 뒤에는 아까 말한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로가 됐고 끌려가던 중 극적으로 탈출해서 복귀했으니 7사단의 부침을 온몸으로 체현한 사람이랄까. 중공군이 계속 몰려들고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자 그는 “전 중대원 전원이 적전으로 나아가 적군을 격멸하고자 함” 하는 마지막 무전을 치고 전투에 나서 끝내 중공군을 물리치기는 한다. 전투 중에 의식을 잃어 깨어나보니 우리가 이겼더라는.

    전투는 거의 7월 27일 휴전 당일까지 이어졌어. 그때 죽어간 중공군과 한국군들은 죽어가면서 억울해 땅을 쳤을지도 몰라. 몇 시간만 더 살아 있으면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데….. 죽고 죽이면서 그들은 서로에게 외쳤을지도 몰라. “너도 참 재수없는 놈이구나.” 금성지구 전투와 425 고지 전투에서 한국군은 2천명이 넘게 죽었고 중공군은 3만이 넘게 죽었다. 드디어 휴전이 성립됐고 포화는 멎었어. 그때 한국군들은 425 고지에서, 근처 백암산 산자락에서 먼발치로 내려다보이는 중공군을 향해 손을 흔들었을지도 모르지. “잘 가라. 근데 또 보지 말자.” 중공군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을 것이고. 그런데 그들은 뜻밖의 명령을 받는다. “고지에서 내려와라.” 이게 무슨 소리야.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여기서 피를 뿌리고 죽어갔는데! 이유는 간단했어. 425고지가 비무장지대에 들어가게 됐거든.

    425고지

    고지에서 내려오면서 김한준 대위를 비롯한 한국군들은 어떤 심경이었을지 궁금하다. 차지하지도 못할 고지를 내주지 않기 위해 수백 명이 죽어 넘어지는 혈투를 치렀는데 제 발로 걸어 내려와야 하는 상황, 하산길에 널부러진 동료의 시신들과 부서진 철모와 부러진 총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처음에는 싸움의 이유가 명백했지만 나중에는 왜 싸우는지 모르게 됐다는 영화 <고지전>의 인민군 장교 류승룡의 심경을 토로하지는 않았을까. 덕분에 화천발전소는 지켜지고 휴전선은 30킬로미터 북상했다지만.

    425고지 주변에는 그야말로 병풍같은 산들이 펼쳐져 있다. 얘기한 백암산도 그 중의 하나. 전쟁 후 10년이 흘러간 뒤에도 산 곳곳에는 전쟁 때 죽어간 이들의 시신과 유류품이 굴러다니는 일이 흔했어. 그때 장교로 근무하던 한명희라는 사람은 순찰 중 돌무덤 하나를 발견해. 원래 십자가 위에 철모를 걸었던 것 같은데 철모는 이미 땅에 뒹굴고 있었고 십자가 비목은 썩어 쓰러지고 있었지. 장교는 그때의 느낌을 후일 가사로 옮겼고 라디오 PD가 됐을 때 숙직실에서 작곡가 한 명과 쿵짝을 맞춰 노래를 만든다. 그게 우리가 아는 <비목>이지. 아마 그 비목의 주인공도 칠성부대 7사단의 한 장병이었을 거야. 6.25의 처음과 끝을 장식한 부대. 비목 한 번 불러 볼까?

    초연이 쓸고산 깊은 계곡
    깊은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 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어때 좀 달리 느껴지지 않아? 아니면 말고.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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