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꼴페미'에 의존하는 사회
    [안녕? 페미니즘!] 남성 여성의 적대 아닌 상호의존적 공존
        2012년 06월 28일 11:49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꼴페미’와 여성 혐오

    한국사회는 ‘꼴페미’와 전쟁 중이다. 접두어 ‘꼴’은 ‘말이 안 통하는 꼴통’이라는 뜻으로 페미니스트가 남성을 적대시하고 남성의 권리를 약탈하려는 소통불가능한 집단이라는 의미를 갖게 한다. ‘꼴’의 쓰임이 마치 ‘특정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에 한정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꼴페미’와 전쟁을 벌이는 남성들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요 모양 요 꼴이 된 건’, 다 ‘꼴페미’때문인데, 다시 이들에 의하면, ‘꼴페미’가 너무나 많다. 여성가족부, 이대생, 숙대생, 빠순이, 된장녀, 개똥녀, 스타벅스 죽순이까지 ‘꼴페미’의 외연은 끊임없이 확장된다.

    얼마 전 여가부가 셧다운제를 공시했을 때, ‘꼴페미’로 ‘찍힌’ 한 페미니스트가 여가부 ‘대표’, 누구누구로 공격 대상이 되어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순위에 오른 적이 있었다.

    여가부와 전혀 관련이 없는 이 페미니스트에게는 공습경보도 없는 급습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곳곳에서 아직도 여가부는 장관이 아니라 이 분을 ‘대표’로 두고 있다. 이는 정보 수집 능력의 한계라기보다는 장관이든 대표든, ‘그 꼴페미’든 ‘이 꼴페미’든, 정보의 정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한마디로 이들에게 ‘꼴페미’는 그냥 다 ‘보슬녀(=보슬아치, 보지 가진 것이 벼슬인 줄 아는 여자들)’, 즉 여자다.

    인터넷에서 논쟁 좀 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공감하겠지만, 누구 말마따나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 ‘남자한테는 몽정휴가 안 주면서 여자한테는 왜 생리휴가 주냐’, ‘남자는 국가가 원할 때 군대 가는데, 여자는 왜 국가가 원할 때 애를 안 낳냐’는 식의 부박한 질문에 어디 전투의지가 생기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친절하고 감동적인 답변이라도 이들에게 설득력을 주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여성이 갖는 모든 차이를 타자화하여 혐오하는 것 자체가 이들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적절한 답변일수록 이를 ‘꼴페미’ 담론으로 다시 가공, 증식시켜 여성 혐오를 열광적으로 자기 정당화하는데 사용할 뿐이다.

    최근에 번역된『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나일등 역, 은행나무)에서 우에노 치즈코가 친절하고 감동적으로 설명해주었듯이, 여성 혐오는 여자를 싫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호색한도 여성을 혐오할 수 있다. 여기서 ‘여성’의 정확한 의미는 ‘여성성’이라는 성적 차이의 기호이기 때문이다. 성별이원제 젠더 질서 사회에서 여성 혐오는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핵이다.

    신자유주의적 여성 혐오

    ‘꼴페미’와 전쟁을 벌이는 이 여성 혐오자들을 마초라 부를 수 있을까? 마초의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능력을 갖춘 가부장적 권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여성에 대한 보호권의 행사다.

    여성과 남성의 경제활동 참가율 곡선(경기도 사례)

    그런데 이들은 젠더관계의 변화를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부당해진 처우가 남성이라는 지위에서 비롯됐다고 믿고 싶어 한다. 더 이상 마초처럼 살지도 못하고, 그외의 다른 형태의 삶도 상상할 수 없는 불안이야말로 이들의 실존적 상황인 것이다.

    노동 유연화가 성별분업의 해체를 가져올 것이라 기대한 만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획기적으로 상승하고 있지는 않다. 게다가 여성노동력은 2차 노동시장에 집중되어 있다. 여성의 시장 진입이 곧장 성별분업의 변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맞벌이 부부의 가사노동 투여 시간이 불균형하다는 통계 지수만 봐도 알 수 있다. 1차 생계부양자로서의 남성의 (이데올로기적) 지위는 여전하다는 얘기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성별분업에 대한 보상체계를 해체하는 데에는 훨씬 적극적이고 속도감도 빠르다. 남성은 더 열심히 일해도 권위를 세울 만큼의 벌이를 할 수가 없고, 전업맘은 사교육의 달인까지 되지 않는 한, 취업맘과의 상대적 경쟁력을 증명해낼 수가 없다.

    얼마 전 방영된 종편 드라마 <아내의 자격>은 사교육 1번지 대치동의 생태계를 충실하게 그려내면서, 이 쇼비니즘 시대에 아내의 자격이 까다로워진 만큼, 그 지위 역시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보여주었다. 윤서래(김희애 분)는 전형적인 현모양처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지만, 가족 산업의 부가가치 창출(아들의 학업 성취)에 노련하지 않자, 가차 없이 용도폐기의 대상이 된다. 그 자리는 ‘튜터맘’(학업 스케줄을 관리해주는 사람)이 대신하면 그 뿐인 것이다.

    성별분업의 보상이 낮아지는 가운데, 전통적인 성역할을 벗어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은 시장에서의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통한 성공으로만 재현되는 사회, 여기에서 신자유주의적 여성 혐오가 만들어진다.

    이은의의『삼성을 살다: 12년 9개월』(2011, 사회평론)은 성추행 사건을 덮으려는 사측, 삼성과의 투쟁 기록을 담고 있다. 성추행 피해를 고지하자마자 저자는 곧바로 왕따가 되었다. 무려 5년간 사내 왕따로 버티며 벌인 법정공방에서 마침내 승리한다.

    이 책에서 또 인상적이었던 것은 생리휴가에 관한 이야기다.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고졸 여사원들은 모두 생리휴가를 사용하는데, 대졸 여성으로서는 저자가 처음으로 생리휴가를 냈단다. ‘네가 왜?’라는 반응이 돌아왔고, 저자는 대졸자도 생리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을 확인해주어야 했다.

    여성들이 시장에서 성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경쟁 질서에 대한 위반이며, 최소한 ‘프로의식’이 결여된 것이거나, 극단적으로는 ‘왕따’를 감수해야 할 사안이 된다. ‘꼴페미’와 전쟁을 선포한 남성들은 이를, 남성들에게는 벗어나라 요구하면서 스스로는 전통적인 성역할에 의존하는 이율배반적 모습으로 간주한다. 시장 질서는 화폐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성적 차이와 그 의미를 수용하지 않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생리휴가에 맞서 몽정휴가를 요구하는 참극은 이렇게 빚어진다.

    “사회란 것은 없다. 개인적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 영국 새처 수상이 1987년 한 여성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다. 사회적 삶의 책임과 위험을 사적 영역으로 이전시켜 남성과 여성의 대립과 갈등으로 비춰지게 할 것이라는 예언적 교리가 아닐 수 없다.

    ‘꼴페미’ 담론은 젠더관계를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인, 혹은 집단 간의 이해관계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사회적 불안이 만들어내는 분노와 욕망의 출구 역할을 하는 신자유주의적 안전망인 셈이다.

    ‘꼴페미’에 대처하는 페미니즘의 자세

    ‘꼴페미’와의 전쟁이 선포된 이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안녕하신가? 군 가산제 문제 이후 급속히 확산된 ‘꼴페미’ 담론 ‘전장’에서 페미니스트와 ‘꼴마초’의 대결은 수없이 펼쳐져 왔다. 사실 ‘꼴페미’ 담론 프레임 안에서 ‘꼴마초’와의 싸움은 애초부터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꼴마초’는 ‘꼴페미’의 대응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에노 치즈코의 통찰을 다시 한 번 빌리자면, 여성 혐오는 남성에게는 ‘여성 멸시’로, 여성에게는 ‘자기 혐오’로 구성된다. 즉, ‘여성 멸시’를 ‘남성 멸시’로 맞설 수 없는 근본적 비대칭성은 이 싸움 자체를 넌센스로 만든다.

    가령 ‘군대도 안 갔다 온 년들’의 정확한 반대급부는 ‘애도 못 낳는 놈들’이 아니라 ‘군대 가서 사람 죽이는 훈련이나 받는 놈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한 인터넷 동영상 수능 강사가 이런 발언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켰던 사례가 있다. ‘여성 멸시’와 달리 ‘남성 멸시’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점, 이것이 ‘꼴페미’ 담론의 구획선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꼴페미’ 담론에서 유통되는 바와 달리, 페미니즘은 남성과 여성의 적대가 아니라 상호의존적 공존의 기획이라는 점이다. 페미니즘에서는 ‘남녀관계’라는 대중적 용어 대신 ‘젠더관계’를 고집하는데,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과 그 관계가 만들어지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권력 메커니즘을 이해하려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여성 혐오의 신자유주의적 판본이 지금 이 시대 젠더관계의 피로감을 어떻게 표현하고, 구성하고 있는 지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페미니즘의 본업이다. ‘꼴페미’ 담론에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폭로하는 것은 이 분석의 정치화 과정과 맞물리는 것이 효과적인데, 마초문화의 성찰과 반성을 촉구하는 계몽적 접근이 일정하게 시효를 다한 탓이다. 비록 도식적 이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필자소개
    필자들은 페미니즘 속 세상, 세상 속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불화를 열광하고, 성찰하는 연구자들이다. 관계와 소통을 본격적으로 통찰하는 매혹적인 학문이자 사상으로서, 농익은 진리 주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설익은 질문에 열려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필자들의 관심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생계부터 정치적 안부까지를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생활공동체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사유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엄혜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원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 윤보라(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이선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이 차례로 글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