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찍는다,
노동의 소외 없는 세상을 위해
[서평] 『최후의 언어-나는 왜 찍는가』(이상엽/ 북멘토)
    2014년 07월 19일 08: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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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한 수단으로서였다. 그 자체가 어떤 본질로서가 아닌 무엇인가를 위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카메라라는 기계는 곧 과학으로 인식되었고, 그러면서 사진은 이데올로기 만들기에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바로 사진과 정치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은 것이다.

식민주의자들은 식민지의 낙후성과 식민지인의 야만을 드러내는 데 사진을 적극 활용하였다. 그러는 과정에서 카메라는 총으로 비유되었다.

영국의 사진가 사무엘 본이 카메라를 총으로 비유한 것은 꼭 그 둘이 외형적으로 비슷하게 생겨서만은 아니다. 식민화를 시키는 차원에서 카메라가 총과 동일하게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제국이 만든 도시의 세련되고 멋진 모습을 신세계로 묘사한 반면 식민지는 가난하고 더럽고 야만스럽게 묘사하였다. 대자연을 정복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당당하게 그린 반면 식민지인은 짐승을 분류하듯 찍어 자료로 채집하였다.

그들은 어느덧 야만을 문화로 바꾸어야 하는 짐을 진 백인이 되었다. 그 안에서 그들이 찍은 풍경은 권력이 되었고, 카메라는 그 권력을 창출해내는 매우 효율적인 도구가 되었으니 총보다 더 나은 총이 되었다.

풍경이란 그것이 도시든 농촌이든 인공적인 것이든 자연스러운 것이든 간에 그 안에서 우리 스스로를 찾거나 잃게 되는 어떤 공간이다. 그냥 단순히 어떤 존재하는 것이 보이는 대상이거나 읽혀지는 텍스트가 아니다. 문화적 실천으로서 행위하는 하나의 매체이다. 뭔가를 단순히 의미하거나 어떤 관계를 상징하는 것을 넘어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문화 권력의 한 수단인 것이다.

따라서 풍경 사진은 엄연한 역사적 구조물이다. 누가 찍었는지, 왜 찍었는지, 어떤 맥락에서 소비되어왔는지 사회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중요한 대상이다. 사진이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 것은 그 풍경이 하나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사진가 누군가가 어떤 사건을 객관적으로, 목격의 증거로서 찍은 자료의 성격을 갖고 있다지만 그것이 갖는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다. 그것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것이 집합 기억의 표상으로서 구성된 여러 종류의 기념물이나 전시물 등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보편성을 획득한 이미지의 상징은 근대에 들어오면서 주로 국가/민족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것은 역사를 보여주는 것보다는 집합 기억으로 만들어진 상상체가 되었다. 신화를 떠받드는 하나의 지지대가 되는 것이다.

소련의 사진가들이 추구했던 공산주의에 대한 아우라 만들기 작업이든 대공황기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시도했던 휴머니즘 역사 기록이든 히틀러나 박정희와 같은 자들이 즐겨 사용한 권력 프로파간다 차원이든 할 것 없이 사진은 실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어떤 추구하는 바를 만들어가는 수단일 뿐이다.

그들이 상징적으로 삼는 사진은 폭력, 희생, 비극, 영웅, 승리와 같은 주로 자극적인 것일 뿐인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들은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미시사에 관심을 갖지 아니 하였다. 그것은 권력의 기제로 작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진은 사건에 대한 진술이 아닌 사건의 신화화이다.

박정희를 소탈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가 어느 시골에서 어느 촌로와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사진 한 장의 위력으로부터 나온다. 그 안에는 그가 얼마나 호색한인지,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얼마나 닫힌 마음의 소유자인지가 전혀 담겨져 있지 않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고, 80년 5.18도 마찬가지다.

모두 특정한 상황에서 찍힌 특정 장면이 그 사건 안에 담긴 모든 관계를 말살해버리고 역사를 단순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큐멘트/다큐멘터리 사진은 역사의 기록이라지만 역사를 담지 못한다. 역사는 사진과 달리 단순화할 수 없는 복합계이기 때문이다.

최후의 언어

사진가 이상엽의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는 사진이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담론서다.

‘한 장의 사진은 과거의 기억일 뿐만 아니라 기억의 보고(寶庫)이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과거를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되살릴 수 있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책 첫 페이지에 박아놓은 의미는 사진이 얼마나 정치적인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은 이질적이고, 그 기억은 조작하기 쉬우며, 그 기억을 통제하는 것은 곧 권력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진술은 기억과 그 작동 방식이 유사하면서 동시에 기억의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사진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대한 가장 확실한 지표이고 지나간 순간이 존속하는 자국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과거의 순간으로부터 사진술은 실제 현상의 흔적을 보고나하는 것이며 현재는 근접과 접촉을 통해 그 실제와 관련을 맺는다.

이상엽이 카메라가 무생물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 카메라가 담는 역사의 의미가 달리진다는 언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맥락에서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라는 하나의 기기에 대한 이야기를 고주알미주알 하는 것이다. 마치 쓰던 바늘이 부러져 그 죽음을 슬퍼하는 조선의 어느 부인의 심정을 보는 듯하다.

조침문을 통해 우리가 어느 부인의 인간애를 읽을 수 있듯, 황해 바다, 강정, 철탑, 만주, 실크로드를 지나 진도 앞바다에 이르기까지 항상 변경을 찾아 헤매는 이상엽의 카메라 ‘사용설명서’를 통해 노동 해방과 사회주의 세상의 꿈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제주가 동북아 분쟁의 전초기지가 될지 평화의 섬으로 남을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라며 환경 생태에 대한 인간의 무례와 오만을 비판한다. 기업화된 국가나 파편화 된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닌 개인들 사이의 어떤 관계와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윤리에 기반 한 삶을 만들어보고자 카메라를 든다.

문화비평가 홀(Stuart Hall)이 우리가 영화나 10대 문화에 대해 논의하는 목적은 우리가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바로 그곳에서 그 10대들을 만나고, 사회주의 운동으로 하여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대한 직접적 감각을 갖도록 만들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 바 있다.

사진가 이상엽은 이 책의 부제로 삼은 ‘나는 왜 찍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사진을 도구로 삼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자 찍는다. 사건에 대한 기록이자 기억을 통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보하는 역사라는 소신 위에 선 분명한 사명감과 계몽의 차원이다.

그의 투박하지만 끈끈한 그 소망이 사진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마지막 한 롤의 필름이 남아 있다면 소외당하는 이웃, 그 변경의 땅에 사는 사람의 삶을 찍으려는 그 뜨거운 심장은 그가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박동질을 해댈 것임을 확신한다.

사진가 이상엽은 이 시대 몇 남지 않은 좌파 휴머니스트다. <최후의 언어. 나는 왜 찍는가>는 그런 그가 남긴 연서(戀書)다. 진보하는 역사,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에 대한 연서 말이다.

필자소개
이광수
역사학자. 사진비평가. 부산외국어대학교 인도학부 교수. 저서로는'사진인문학', '붓다와 카메라', '제국을 사진 찍다' (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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