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큰빗이끼벌레의 창궐,
    잘못과 죄는 인간에게 있다
    [반박기고] “큰빗이끼벌레 논란, 진보매체의 외모지상주의인가?"에 대한 반론
        2014년 07월 16일 11: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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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언론 <참세상>에 게재된 “큰빗이끼벌레 논란, 진보매체의 외모지상주의인가? -[기고] 4대강 공포마케팅의 희생양 큰빗이끼벌레(이하 ‘외모지상주의’ 글 링크)”라는 글을 보면서,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면서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언론의 보도행태에 대한 지적에 공감하는 바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가운 마음보다 더 컸던 답답함은, 세상을 바라보는 스케일과 관점의 측면에서 생물학 분야의 양 극단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생태학과 분자생물학 전공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답답함과 비슷한 감정이었을 것 같다.

    큰빗이끼벌레는 4대강 논란의 핵심인 물흐름의 지표

    큰빗이끼벌레의 외형에 초점을 맞춰 일어난 소동이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외모 지상주의의 폐해와 ‘일면’ 닮은 면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언론이 이를 부각시켜 보도한 ‘선정성’은 언론의 부정적인 속성 중의 하나이고, 필자의 말처럼 진보언론이라면 기본적으로 지양해야 할 자세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큰빗이끼벌레에 대한 논란이 단순히 4대강 사업과 관련해서 외형에 초점을 맞춘 공포마케팅이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사람들이 큰빗이끼벌레를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고, 익숙치 않다는 것은 이전에는 이만큼 흔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4대강 생태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낯설고 거대한 생물을 보면서 갖는 혐오감은 논리와는 상관이 없을지라도, 직관적으로 그 예감이 들어맞는 경우도 많다.

    열대의 동식물은 기후적 차이로 온대에 비해 보다 높은 생산성을 갖게 되고, 이로 인해 스케일이 다른 종이나 아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황소개구리의 크기를 보고 혐오감과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가 아는 개구리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식의 흐름의 밑바닥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의한 경험이 밑바닥에 깔려있다. 이러한 감정이 현실적으로 힘 있고 덩치 큰 생물들이 우리 자생종의 생존을 위협하고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현상과 무관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1).

    큰빗이끼벌레는 외모만 흉측한 것이 아니라 4대강 사업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점 -흐름이 있는 유수(流水) 생태계(lotic habitat)였던 4대강이, 흐름이 거의 없는 정수(停水) 생태계(lenthic ecosystem)로 전환되고 있다는 증거를 잘 드러내 주는 지표로 볼 수 있다.

    이는 이 생물이 수질의 직접적인 지표종이냐 아니냐, 독성이 있느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4대강 사업의 논란의 핵심은 생명의 ‘강’이 죽음의 ‘호수’로 바뀐다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강이 썩는다는 게 은유라고?

    ‘외모지상주의’ 글의 필자는 “생물학적으로 미생물이 대사를 하면서 산물을 내는 과정을 가리키는 단어가 두 개”라고 하며, ‘부패’와 ‘발효’를 들고 있는데, 이는 과학적으로 틀린 분류이다. 왜냐하면 보다 큰 분류중의 하나인 호기성 분해(산소를 이용한 분해)를 ‘부패’와 ‘발효’의 범주에 온전히 포함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분류를 굳이 꺼내드는 이유는 이 부분이 4대강 사업 이후, 정수생태계로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강의 자정작용은 기본적으로 이 호기성 분해를 바탕으로 한다. 사업 전에 흐름이 상대적으로 크고 수심이 얕은 상태에서 하천 바닥까지 산소 공급이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하천 바닥도 모래, 자갈 등 알갱이가 굵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을 때에는, 알갱이 사이사이의 공극으로 산소를 품고 있는 물의 소통이 원활했다. 그런 상태에서는 물이 맑았을 뿐만 아니라 그 알갱이들 사이에 어류가 산란을 하는 등 하천생태계의 다양한 생명활동들이 가능했다.

    본 글의 필자가 수질을 이해할 때 부패냐 아니냐로 이야기하지 않고 지표로 이야기한다며 제시한 BOD(생물화학적 산소요구량(2))를 수질의 지표로 쓰는 배경에는 이러한 전제가 기본으로 깔려있다.

    하천의 자정작용은 물속에서 살고 있는 생물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미생물들과 여타의 생물들의 생명 작용은 물 안에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호기성 분해 작용의 연속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 호기성 분해에는 말 자체에 포함된 것처럼 산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산소요구량을 지표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흐름이 적어지면 미세한 입자들이 바닥에 쌓이면서 바닥이 무산소나 혐기성 상태가 된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은 이전의 호기성 분해 과정과는 완전히 다르며, 이러한 조건의 차이가 강과 호수 생태계의 차이를 야기하게 된다.

    또한, 바닥에 쌓인 침전물들은 가만히 쌓여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교란으로 인해서 물속의 산소를 한꺼번에 소모(3)해 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강이 썩어간다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어나던 호기성 분해 과정이 혐기성 부패 과정으로 바뀌어 가는 시스템의 변화를 나타내는 실질적인 표현이다.

    본 글의 필자는 물이 썩는다는 표현의 엄밀성을 요구하며, ‘물은 미생물이 아니므로 부패할 수 없다’며 얘기한다. 그런데, 그 ‘물’ 혹은 ‘강’이 일반적으로 강물 안에 포함되어있는 미생물, 유기물을 배제하고 순수한 H2O만을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넌센스가 아닐까? 또한, 수질의 지표로 왜 BOD, COD(화학적 산소요구량) 등의 ‘산소’ 요구량이 사용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뱉을 수 있었던 말이 아닐까?

    재첩 등

    사진설명 2013년 3월 26일 남한강 저니와 재첩 떼죽음 모습 (강바닥에 쌓인 뻘(좌상), 뻘과 함께 떠지는 재첩 껍데기(우상), 바닥에 드러난 재첩의 모습(하)) 사진제공: 4대강 조사위원회, 4대강범대위, 촬영자: 윤순태 감독

    큰빗이끼벌레는 잘못된 자리잡음의 문제 -강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큰빗이끼벌레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황소개구리’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그 자체가 외래종이라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외래종(exotic species) 문제의 핵심이 ‘잘못된 자리잡음’의 문제라는 면에서 말이다.

    황소개구리도, 뉴트리아도, 붉은귀거북도, 달맞이꽃도 원래 있던 자리에서는 고유종, 자생종이었다. 즉, 그 생물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생물이 자리잡은 맥락(context)이 중요한 것이고, 큰빗이끼벌레의 경우도 그 맥락으로서 강이라는 시스템을 봐야한다.

    큰빗이끼벌레에 대한 과거의 기사들에서도 대부분이 저수지나 정체된 물에서 대량 발생하였다고 보고하고 있으며, 문제의 핵심은 유속의 변화에 있었다. 유속 이외에 큰빗이끼벌레와 수질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다.

    살아있을 때는 종속영양생물로서 유기물을 체내에 축적하지만, 죽고 나면 그 자체가 오염원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이라는 시스템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4대강의 수질 자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하나하나 꼽아온 4대강 사업의 부작용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4대강 전반에 걸쳐 총인 농도는 오히려 낮아졌다. 4대강 공사 준공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질소, 인을 처리할 수 있는 고도처리시설을 가동하여 오염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4대강 사업에 의해 물이 정체되면서 오염물질들이 미세한 입자와 함께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언제든 엄청난 오염원으로 작용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즉 외부의 오염원을 아무리 차단해도, 녹조의 재료가 될 수 있는 물질을 공급받을 수 있는 소스를 자체적으로 보유하게 된 셈이다.

    이는 공상같은 가설이 아니라 실제 인농도가 줄어들었음에도 이례적인 녹조가 창궐했다는 사실이 강력한 논거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기존에 나타나던 물 속의 인농도, 녹조의 간접지표인 클로로필a 등의 수치와 실제 녹조 발생량(조류개체밀도, 특히 독성물질 배출 가능성이 높은 남조류의 밀도)의 상관관계 역시 바뀌고 있다.

    즉,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변화하고 있으며, 변화하는 시스템에 대한 지식의 부재, 불확실성의 급증은 언제든 원수의 안정성(stability)과 먹는물의 안전성(safety)을 동시에 위협할 수 있다.

    죄는 인간에게 물어야

    ‘외모지상주의’ 글의 필자는 나름의 내부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위해 진보매체에 쓴 소리를 한 것 같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환영하며, 공감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진보 언론의 보도행태에 대한 반감으로 본인 역시 하천시스템에 발생한 큰 변화와 그 결과의 인과관계라는 보다 큰 그림을 놓치고 글을 쓴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유하고 싶다.

    또한, 한편으로는 환경문제, 특히 여전히 문제가 남아있으나, 이미 수년 동안 끌어온 문제이기 때문에 쟁점화가 쉽지 않은 4대강 사업 문제와 같은 경우, 그러한 선정성 없이 어떠한 방식으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컴퓨터나 TV앞에 앉아 문제를 접한다. 문제는 책임을 져야 할 많은 사람들 역시 똑같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론에 드러난 문제들은 대부분 4대강 현장을 다니는 민간 활동가들이 먼저 문제를 발견하고, 이슈화해서 정부를 움직이게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그렇게 이끌어 낸 대응마저도 대부분 비논리적이고 책임회피성 발언에 불과했다(4).

    이러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원 글의 필자와 내 생각이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은 수십년 전 단순히 자연의 문제로 인식되던 시기를 지나, 자연과 인간사회의 잘못된 관계와 인간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순들이 환경을 통해 드러나는 문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왔다.

    사실 그 누구도 직접적으로 큰빗이끼벌레를 향해 ‘너 여기 왜 나타났느냐’거나 ‘너의 존재 자체가 죄’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다만 큰이끼벌레라는 텍스트와 4대강이라는 컨텍스트의 잘못된 만남에 대해 원인을 제공한 인간들끼리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른 맥락에서 ‘외모지상주의’ 글의 필자가 인용한 굴드의 명제, “생명체는 그 자체로 죄가 될 수 없다”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잘못은 인간에게 있으므로.

    <추가 설명>

    1) 미학이 애초에 철학으로부터 나왔으며, 고대 철학에서 미추의 기준과 선악의 기준이 동일시되었던 것과도 연결되지 않을까?

    2) ‘생물학적’ 산소요구량이란 표현은 과거에 쓰던 표현으로 엄밀히 따지자면 틀린 표현이다.

    3) 이러한 침전물의 산소요구량을 SOD(침전물 산소 요구량: Sediment Oxygen Demand)이라고 하며, 호수에서 사용하는 오염 지표중 하나이다.

    4) 이를테면, 2012년 가을, 금강에서 사상 초유의 규모의 물고기 집단폐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환경부의 주요 기관 중 하나인 국립환경과학원장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 “미스테리다. 원인을 알 수 없다. 그러나, 4대강 사업과는 무관하다.”

    필자소개
    ㈜국토환경연구소 연구원, 대한하천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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