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이 ‘조선답다’는 정체성
    [조선생의 역사이야기]'조선'과 '동국' 차이, 자신의 정체성
        2012년 06월 27일 12: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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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사 교과서는 조선 건국 이후, 조선 건국의 의의와 태조의 정책에 이어, 조선의 중앙행정, 지방행정, 교육과 과거제도, 국방제도, 조세제도, 통신제도 등을 다루고, 이어서 세종을 전후한 시기의 문화발달을 다룬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바로 여기다. 한글창제와 역사서, 지리서, 과학기술의 발달, 한문학의 발달 등이다. 두 시간에 진도를 나가게 되는데, 죽 이어서 서술한다.(조선생)

    자, 여기는 밑줄치고 외워야 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온갖 책이름과 내용과 특징을 알아두고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하지요.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길래, 이토록 외워대야 할가요? 살살 진도를 나가봅시다.

    온갖 책들과 과학기구들

    조선 전기의 대표작인 역사서로는 조선왕조실록,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은 참, 대단한 책입니다. 왕조가 몰락한 뒤에 똑똑한 역사가가 쓴, 이를테면 사마천이 쓴 [사기]처럼, 나중에 여러 책을 참고하고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쓴 게 아닙니다.

    한 왕의 재임기간에 있었던 일을 매일 기록하고, 그걸 다 모아두었다가 그 왕이 죽고나면, 역사가들이(이들의 직책이 춘추관의 ‘사관’입니다.) 모여서 지나간 왕 시대에 있었던 일을 정리합니다. 그것도 그 왕이 했던 일만이 아니라, 그 왕의 재임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총 정리합니다.

    여러분이 입에 달고 다니는 독도는 우리땅 노래에 나오는 “세종실록 지리지 오십페이지 셋째줄”이라는 가사대로, 세종시대의 지리 파트는 지리지로 따로 기록했다는 말입니다. 이러니 그 객관적 정확성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것도 한 두 해나 일이십년이 아니라 5백년동안 이러한 역사기록이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그래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동국통감]은 또 뭘까요? 동국통감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와 고려 때까지의 역사서인데, 그 중 왕들이 참고할만한 사실들을 모아둔 책입니다. 원래 중국 송나라에 사마광이란 사람이 쓴 [자치통감]이란 역사책이 있습니다. 자치통감은 중국 역대 황제들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잘한 것과 못한 것들을 모아 둔 책입니다. 용도는 황태자 교육용입니다. 동국통감은 조선판 자치통감인 셈입니다.

    동국통감

    [고려사]는 조선이 건국된 뒤, 고려의 역사를 죽 정리한 책이고, [고려사절요]는 고려사의 요약판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조선 전기의 지리책으로는 팔도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이 있습니다. [팔도지리지]는 우리나라 지리를 최초로 정리한 책이고, [동국여지승람]은 각 마을의 특산물 뿐만이 아니라 충신, 효녀, 열녀 등의 기록을 남겨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각 마을 기행책인데, 관점이 여행이나 맛집 기행이 아니라 유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점을 정리한 책입니다.

    국가행정과 예법에 관한 책으로는 경국대전과 국조오례의와 삼강행실도 등이 있습니다. [경국대전]은 조선의 기본 법전입니다. 경국대전도 참, 대단한 책입니다. 아니 이건 책이라고 말하기에는 쫌 뭐한… 음… 나폴레옹 법전과 비교해도 더 낫거나 최소한 뒤지지 않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대학교 때, 경국대전의 일부를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조(吏曹)의 규정이 얼마나 자세하고 구체적인지 놀랐습니다. 각각의 관리들이 해야 할 일들이 정말 꼼꼼이 정해져 있습니다. 호조(戶曹)는 지금으로 말하면 세금제도와 상법에 해당될 터이고, 예조(禮曹)는 교육제도와 외교제도를 다루고 있고, 병조(兵曹)는 국방과 군역제도를 다루고 있고, 형조(刑曹)는 재판과 감옥제도를 다루고 있고, 공조(工曹)는 도로, 건축, 도량형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법전을 백성들이 직접 만들거나 국민들이 뽑은 국회의원이 만들지 않았고, 국민들의 적극적인 권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지만, 최소한 조선이 법치국가란 점은 분명합니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입헌군주제에 해당한다는 말이지요.

    [국조오례의]는 국가의 중요한 다섯가지 예식에 대한 절차를 담은 책입니다. 개인으로 말하면 관, 혼, 상, 제 이 네가지가 가장 중요한 예식인데, 국가에서는 왕실의 혼인과 초상, 제사 이외에 사신접대, 군례 다섯가지를 중요한 의식으로 여겨 정리한 것입니다. [삼강행실도]는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를 한자로 기록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넣어 둔 것입니다. 중국과 조선의 충신, 효자, 열녀 35명씩을 기록한 책입니다. 효녀 심청 이야기의 전거가 된다는 효녀 지은 이야기도 삼국사기, 삼국유사 말고 여기 또 실려 있습니다.

    다음으로 [농사직설]을 살펴봅시다. 간단히 말하면 농사직설은 최초의 우리나라 농사짓는 방법에 대한 책입니다. 농사직설 서문을 보면 “옛 농사짓는 법과 관련한 책들이 실제와 다르고, 지역마다 농사짓는 법이 다 달라서, 지역관들을 시켜 그 지역의 농사짓는 법을 연구 조사케 하여, 백성도 쉽게 알수 있게 책을 지었으니, 백성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거 왠지 훈민정음 서문과 비슷하지 않나요?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 한자와 달라서 불편한 점이 많아 새로 한글 28자를 맹가노니, 백성들이 쉽게 쓰게 하라”는 것 말입니다.

    농사직설

    측우기는 농사직설을 한 번 짓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철마다 강수량을 재서 그 기록을 남겨 통계적으로 기후를 측정 기록하려고 한 것이니, 조선 지도층이 꽤나 과학적이고 실사구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국(東國)과 조선

    각각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사실 지루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제 이제까지 이야기들을 근거로 다른 이야기 해 봅시다. 우선, [동국통감]이나 [동국여지승람]이나 [동문선]의 동국(東國)은 어느 나라일까요? ① 중국 ② 우리나라 ③ 일본… 예, 우리나라입니다. 중국은 자기들이 세상의 중심인 나라라고 해서 중국(中國)입니다. 일본은 우리날 삼국시대 이후부터 독자노선을 걸으면서 해뜨는 근본이라고 일본(日本)이라고 스스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 스스로를 조선이라고 부리지 않고 동국이라고 했을까요? 동쪽 나라라면 도대체 누구의 동쪽이란 말인가요? 맞습니다. 중국의 동쪽 나라란 말이지요.

    조남규와 조남강 동생

    저는 3남 2녀 중의 막내입니다. 막내여서 심부름 도맡아 하면서 컸고, 어머님께서 형과 누나들 신경쓰느라 저에게는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좀 서운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어머님 관심을 덜 받아서 좀 제 멋대로인 점도 있고, 형보다 더 자유롭게 살아온 듯하여 지금은 별로 불만이 없습니다.

    제 형은 오려서부터 모범생이었고, 공부도 잘 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들어가니 3년 위인 형을 선생님들이 다 알고 있었지요. 한번은 처음 보는 어느 선생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조남규?”, “예”, “니가 조남강 동생이냐?”, “예”, “근데 왜 너는 그 모양이냐?” 헐… 내가 뭘 잘못했길래… 참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말이지만 그땐 부끄럽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자존심이 뭔지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 이제 저도 커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추석이랑 설이 되면 처랑 아이들 데리고 고향에 갑니다. 아버님의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군 덕과면에 가면 온통 조씨 집안 뿐입니다. 설에는 집집마다 돌면서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조남규입니다.”
    “어, 누군가?”
    “아, 서울 영림중학교에서 국사 가르치는 조남규입니다.”
    “아, 글쎄 누구여?”
    “신림동에 살고 있는 조남규입니다. 여기는 제 처이고, 여기는 제 아들, 딸이예요.”
    “도대체 누구냐니깐?”
    “아, 조남강 동생이요.”
    “응, 남강이 동생! 진작 말하지…”

    참 내, 아무리 제가 누구이고 뭐하는지 설명해도 소용없어요. 그저 남관이 동생 해야 알아들어요. 더 기가 막히는 건 바로 그 다음입니다.

    “그려, 형님은 잘 계시고?”

    헐…

    “예 잘 계십니다.”

    저에 대해서는 물어보지도 않아요. 이렇게 몇 집 돌다보면, 이제 저 스스로 이렇게 인사해요.

    “안녕하세요? 조남강 동생 조남규입니다.”

    아예 나중에는 제 이름도 필요없어지지요.

    “안녕하세요? 조남강 동생입니다. 형님은 잘 계십니다.”

    인사 끝… 여러분! 여기 있는 내가 누구라구요? 예, 조남강 동생이예요.

    어렸을 때, 친구둘과 싸우게 되면 처음에는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 따지다가, 이게 안통하면 옆 친구들에게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물어보고, 그래도 안되면 결국 “우리 삼촌이 경찰”이고 “우리 작은 아빠는 군인”이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게 통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만 생기면 구체적인 잘잘못은 어디로 없어지고 처음부터 “우리 삼촌이 경찰”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동국통감이나 동국여지승람은 제 식으로 말하면 우리 집 문패를 조남규라고 안하고 조남강동생집이라고 써 붙인 거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어디가서 나중에 외국 친구들과 얘기할 때 동국(東國) 자 붙은 우리 책 너무 자랑하지는 마세요.

    조선이 조선다워진 것

    그런데 이렇게 별로 자랑스럽지도 않은 책들을 왜 중요하다고 밑줄치고 있는 걸까요? 제목은 좀 부끄러운 면이 있지만, 알맹이는 그래도 자랑할만 합니다. 책 제목에 동국이란 말이 붙었건 안붙었건, 이 시대 문화의 중요한 공통점은 바로 “우리, 나 자신, 조선”이라는 것입니다.

    한글은 남의 나라 중국 글자가 우리 말과 안맞아 우리 글자를 발명한 것입니다. 역사책도 다 우리나라 역사책입니다. 법전도 우리나라 법전입니다. 조선시대 우리 법전이 있었어도, 사실은 양반들은 무슨 일 생기면 꺼떡하면 “대명률(大明律)에 의하면—”이라고 말을 시작하긴 했지만요. 우리나라 지리책, 충신과 효자와 열녀도 중국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 충신과 효자와 열녀 이야기입니다.(사실은 삼강행실도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충신, 효자, 열녀를 섞어 놓은 것입니다.) 천문관측도 한양을 기준으로 우리 스스로 한다는 말이고요, 농사짓는 법도 우리나라에 적합한 방식을 정리한 것입니다. 동문선도 우리나라 선조들의 훌륭한 시와 문장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음, 아까 친구랑 싸운 이야기 식으로 하면, 비록 서로의 호칭은 “삼촌이 경찰”과 “작은 아빠가 군인”이지만, 경찰과 군인 중 누가 쎈지 따지지 않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서로 따진다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시 저희 집 이야기로 하면, 우리 집 문패가 조남강 동생집이라고 되어있는데다가, 아들은 엄마한테 “큰 집은 핸드폰 사주는데, 왜 우리 집은 안사주냐”고 따지고, 엄마는 “큰 집 아들은 1등 하는데, 너는 왜 중간밖에 못하냐?”고 따지는 수준에서 벗어난 겁니다. 문패는 비록 ‘조남강 동생’집이지만, 우리 집은 우리 방식으로 살아가는 거지요. 큰 집이 소고기를 먹건 1등을 하건 외국으로 연수를 보내건 간에 우리 집은 우리 집대로 용돈주는 규칙이 정해지고, 놀이하는 방식이 정해지고, 공부하는 시간과 컴터 하는 시간이 우리 집 실정에 맞게 정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분의 각종 책들과 물건들이 중요하다고 밑줄치는 겁니다. 이 시대에 비로소 조선이 조선다워졌다는 거지요. 비록 문패는 “동국”이었지만, 속 알맹이는 “조선”다와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밤에 텔레비전 볼 때, 채널 이리저리 돌리다가 이 프로그램 나오면 잠시도 멈추지 않고 바로 돌려버리는 프로가 있습니다. 백분토론이지요. 절대 재미 없는거… 여러분, 오늘 제 이야기 듣고 나중에 이런 토론 프로그램 나오면 정말 한 5분만 지켜봐보세요. 제가 장담합니다. 이 백분토론 종류의 주제는 다양합니다. 원자력발전소 짓자 말자, 무슨 정치제도, 교육제도 바꾸자 말자로 논쟁을 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게 말입니다.

    이거 꼭 찬성 두세명, 반대 두세명이 나오는데요, 찬성하는 사람이 찬성하는 근거가요, 바로 미국입니다. “제가 미국에 유학갔을 때—”라고 시작하지요. 그럼 반대하는 사람은 무슨 소련이나 영국, 프랑스를 근거로 드는지 아세요? 아닙니다. 반대하는 사람도 근거가 미국입니다. “그쪽이 유학간 건 20년 전 이야기이고, 내가 교환교수로 미국갔을 때는 미국도 달라졌어요.” 그럼 또 찬성하는 측에서 “그건 미국 5년 전 이야기이고, 작년에 국제 머시기학회에서 발표된건…” 이러면, 또 반대쪽에서 “내가 어제 인터넷 찾아봤는데, 미국에서 최근에—” 이런 식입니다.

    우리나라의 구체적인 실정을 조사하고, 그동안의 진행과정을 꼼꼼히 검토하고,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여 합의에 이르는 경우는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적어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웃기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이 조선만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5-6년마다 바뀌는 교육제도 들여올 때마다 미국에서 10년, 20년 전에 유행했던 제도를 그 때 유학갔던 교수들이 좀 높은 자리 차지하면 도입해서 3-4년 해보고 실패하면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원래 미국에서 그 제도는 좋은 것이었는데, 우리나라 학부모들의 수준이 떨어져서 실패했다”라고 합니다. 이게 우리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 남들만 탓할 게 아닙니다. 여러분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옆에 짝꿍이 “이거 답이 왜 3번이야?” 그러면 보통 대답이 뭐라고 나옵니까? “야, 그거 선생님이 얼마나 강조한 건데, 선생님이 3번이랬어”라거나, “아, 그거 교과서에 나와” 그럼 끝입니다. 제가 다시 물어볼께요. 왜 답이 3번이지요? 선생님이나 교과서에 있기 때문인가요? 정말 그렇다면, 그건 조남강 동생이고, 삼촌이 경찰인 거고, 작은 아빠가 군인인거고, 미국에 유학간 겁니다. 여러분! 드물지만, 여러분이 직접 설명을 해 본 적 있지요? 설명하다 보면 좀 스스로 생각해도 미심쩍은 부분도 있고, 그래서 혼자 다시 찾아보기도 하고, 심지어 좀 이상하지만, 스스로 설명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지요? 그게 바로 농사직설이고 한글이고 경국대전이고 동국통감인 겁니다.

    외운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익힌 공부

    제가 중3 때 일겁니다. 여러분 수학 시간에 근의 공식 배웠나요?

    의 문제를 풀면 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참 요술방망이 같은 겁니다. 여러분은 안그런가요? 저는 아무리 봐도 신기했어요. 이 근의 공식을 배우기 전에는 완전제곱식으로 만들어 풀었지요. 예를 들면 를 풀면 근의 공식을 배우기 전에는 이렇게 풀었습니다. 그런데 근의 공식을 대입하면 한번에 답이 나옵니다. 저는 이 근의 공식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수학선생님이 문제를 내면 얼른 근의 공식을 대입해서 풀어놓고는 혼자 완전제곱식으로 다시 풀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선생님이 지나가다 보셨지요. “야, 조남규, 너 왜 근의 공식으로 안푸냐?” “예, 그게 좀 믿기지가 않아서요…” “뭐야? 이놈이 내가 가르친 게 안믿어진단 말이야?” 라고 꿀밤 한 대 먹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아마 한 두달동안을 혼자 그렇게 완전제곱식으로 풀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저는 정말 깨달았어요.

    의 3이 a이고, 2가 b이고, -5가 c란 걸 말입니다. 저는 정말 뛸듯이 기뻤어요. 자랑할려고 선생님한테 찾아갔습니다. “아, 선생님, 여기 이 3이 a이고, 2가 b이고, -5가 c구만요, 이걸 진작 가르쳐주셨어야죠, 저는 이제야 알았어요.” 그랬더니 “아, 이놈이 여기 교과서에 안보이냐? 그거 근의 공식 처음 시작할 때 설명했잖아?” 하시며 꿀밤 한 대 더 먹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꿀밤 한 대 더 맞았어도 좋았답니다. 왜냐하면 내가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후로는 친구가 이거 물어봐도 아주 당당히 천천히 차근차근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랬다고 우기거나 교과서에 나온다고 넘어가지 않고 찬찬히 설명해 주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이 공식을 기억한답니다. 외워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몸으로 익힌 거예요. 이 공식은요…

    여러분!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공부의 내용을 잘 보세요. 이런 식입니다. “시청옆에는 뭐가 있지? 도청이요, 도청옆에는 뭐가 있지? 시청이요. 자 이제 시청과 도청에 대해 다 알았죠?” 이게 끝입니다. 그런데 이 시청과 도청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할까요? 시청 옆에 도청이 있고, 당연히 도청 옆에 시청이 있지만, 여기에 가려면 어째야 할까요? 시청을 가려면 시청 말고,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있는 여기서부터 시청가지 가는 길을 익혀야 합니다. 도청이 시청 옆에 있다는 것은 그 다음에 알아도 됩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시청과 도청을 외워대고 있는 것이 우리 공부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농사직설 서문이나 훈민정음 서문처럼, 여러분도 뭐 하나 지어보세요. “우리학교 교칙이 우리 현실과 달라서 우리가 직접 조사하고 연구하고 의견을 묻고 통계를 내어 토론과 합의를 거쳐 새로 맹가노니, 이제 우리 학교생활이 더욱 편하고 서로 존중하며 피해를 끼치지 않게 되길 바라노라”고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세종대왕을 전후한 조선 전기에 비록 우리나라는 문패를 조남강동생집이라고 달긴 했지만, 우리 식으로 세금 걷고, 우리 식으로 예절을 지키고, 우리 식으로 농사짓고, 우리 식으로 달력을 만들고, 중국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정리하고, 당시 살고 있는 현실도 꾸준히 기록해나갔습니다.

    비록 문패가 좀 아쉽기는 하지만, 저는 감히 조선이 조선다와진 것은 바로 이 시절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시절의 나에 대한 자각, 우리 식에 대한 자존심은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앞에 앉아 있는 학생! 자네는 누군가?”

    필자소개
    한때 전교조 중앙에서 교선실장을 했었고 또 오랫동안 전교조 서울남부지회 지회장을 맡았다. 지긍은 영림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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