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사에서 배제된
    또 하나의 '시민혁명'
    [책소개] 『아이티혁명사』(로런트 듀보이스/ 삼천리)
        2014년 07월 06일 11:0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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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민주주의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당 부분 생도맹그 노예들의 투쟁 덕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아이티혁명의 후예들이고, 또한 우리는 이 조상들에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 나는 자유를 위한 그들의 드라마 같은 투쟁사를 써 내려가고자 한다.”(프롤로그에서)

    듀크대학 교수 로런트 듀보이스는 아이티혁명의 현재적 의미를 짚어 내며, 자신을 포함한 오늘날의 인류가 ‘아이티혁명의 후예’라고 표현했다. 그러고는 다양 문헌 사료와 편지, 일기, 구술 자료, 역사 그림 등을 바탕으로 치밀한 분석과 고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21세기 들어 노예무역, 이주, 인종, 탈식민주의 문제는 세계 역사학계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이 책은 아이티혁명 200주년에 맞춰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되어 언론과 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아이티혁명사》는 C. L. R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이 나온 뒤 오랜만에 나온 아이티혁명사 개설서이다. 큰 틀에서 제임스의 견해를 따르고 있지만, 혁명가 투생 루베르튀르의 전기 형식으로 서술된 《블랙 자코뱅》의 한계를 넘어 아이티 사회와 카리브 해 노예들의 삶을 복원했다는 평가이다. 독자들은 당시 카리브 해의 플랜테이션과 노예제에 바탕을 둔 대서양 무역의 생생한 모습을 세계사의 맥락에서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레미제라블’과 프랑스혁명의 이면

    “인간은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났다.” 낡은 질서를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프랑스혁명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1789년)을 내놓았다.

    수많은 희생과 피의 대가였지만 ‘인권선언’이 실제로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계몽주의와 사회계약, 진보에 대한 신념의 실상은 그랬다. “여성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남성과 평등하게 태어나 그렇게 살아간다.”(1791년) 2년 뒤 프랑스의 여성운동가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선언〉을 선포했다.

    “이 영토에는 노예들이 존재할 수 없으며, 예속은 영원히 폐지된다. …… 우리의 관습, 우리의 전통, 우리의 풍토, 우리의 산업에 알맞은 법을 제정함으로써 식민지의 번영을 위한 초석을 놓을 때가 왔다.”(1801년)

    이번에는 유럽이 아니라 ‘신세계’의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에서 헌법이 공포되었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와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주인들에게 굽신거리던 노예들이 자기 땅 생도맹그의 주인이 된 것이다.

    아이티

    아이티혁명은 식민지 해방과 시민혁명으로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의 모양새를 만들어 낸 저항의 역사를 열었다.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한 아이티혁명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범아프리카주의와 네그리튀드, 탈식민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아이티보다 일찍 독립혁명에 성공한 미국에서는 20세기 들어서까지 노예제가 존재했고, 인종분리 철폐와 흑인 공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다.

    세계사에서 ‘배제된’ 또 하나의 시민혁명

    영국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역사 교과서나 세계사 개설서는 ‘3대 시민혁명’을 근대를 이루어 낸 역사적인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경영한’ 식민지는 20세기까지 착취와 억압을 이어 갔고, 그곳 사람들은 온갖 인간의 권리를 빼앗긴 채 힘겨운 삶을 이어 가야 했다.

    이런 식민주의의 매듭을 처음 푼 기념비적 사건이었음에도, 역사는 아이티혁명과 지도자 투생 루베르튀르를 비롯한 장자크 데살린, 앙드레 리고, 앙리 크리스토프 같은 인물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다. 서구의 지성과 역사학이 오랫동안 ‘아이티혁명’을 애써 무시한 결과이다.

    C. L. R 제임스, 에메 세제르, 프란츠 파농 같은 지성들 모두 카리브 해의 유럽 식민지에서 태어나 평생을 서구 제국주의와 인종주의에 맞섰다. 피델 카스트로는 아이티를 ‘식민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생산물이라고 정의하고 카리브 해의 찬란한 ‘변혁의 역사’를 자랑한 바 있다.

    실제로 아이티혁명은 노예제에 맞서 싸운 아메리카 민중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아이티공화국은 시몬 볼리바르를 비롯한 혁명가들과 라틴아메리카 해방운동을 지원했다.

    근대 유럽의 엔진, 노예와 플랜테이션의 실상

    1789년에 프랑스 식민지 생도맹그는 프랑스 해외무역에서 3분의 2를 차지하고 유럽 노예무역의 최대 시장이었다. 사탕수수, 커피, 담배, 인디고를 비롯한 글로벌 상품은 대서양 무역을 통해 유럽에 커다란 부를 안겨 주었다. 이렇게 세계사의 중심으로 발돋움하던 근대 유럽의 배후에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노동과 ‘신세계’의 플랜테이션이 있었다.

    이 책은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 카리브 해 사탕수수 농장의 전형적인 경관과 노예, 노예주, 관리인, 십장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생활을 오롯이 묘사하고 있다. 유럽에서 출발하여 생도맹그 항구에 들어오는 배와 상인, 노예, 온갖 진귀한 물건을 사고파는 도시의 가로와 상점, 백인 클럽과 공동묘지 등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몸에 낙인이 찍히고, 짐승처럼 ‘한 마리 두 마리’로 셈하고, 출산을 억제당하고, 남자 주인에게 온갖 성적 착취를 당하는 여자 노예, 백인의 아이를 임신하는 미혼모, 백인 마님에게 굽신거리는 남자 노예에 이르기까지…….

    노예 반란으로 이룬 최초의 흑인 공화국

    노예로 길들여져 조금만 반항하면 린치와 화형, 효수까지 당하던 그들이 어느새 권리를 주장하고, 모이고 조직하고, 총칼을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당했던 폭행과 모멸 이상으로 되갚아 주는 “신세계의 복수”(이 책 원서의 제목이 Avengers of the New World이다)는 섬 전체를 불태우며 광풍을 몰아쳤다.

    오랜 세월 아이티 사회를 억압하며 노예들을 벌벌 떨게 했던 농장주와 식민 관료들, 이제 그들이 공포를 느끼고 혼비백산했다. ‘검은 스파르타쿠스’ 투생 루베르튀르는 그들에게 두려움 그 자체였다.

    노예와 자유유색인은 스스로 조직하고 전략을 수립하여 크레올(백인)과 프랑스군, 에스파냐 침략군, 영국 원정대를 차례로 무찌르고 1803년에는 나폴레옹이 보낸 원정대를 영원히 물리쳤다. 마침내 헌법을 공포하여 모든 사람이 시민의 지위를 갖추게 되었다.

    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이 처음으로 승리하는 순간이자, 아프리카 대륙 바깥에 첫 번째 흑인 공화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혁명으로 대서양 지역 경제 질서를 떠받히고 있던 인종적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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