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범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지옥
    [책소개] 『짐승의 시간』(박건웅/ 보리)
        2014년 07월 06일 10:47 오전

    Print Friendly

    김근태는 1985년 9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10차례에 걸쳐 고문을 당했다. 고문으로 조작된 자백을 근거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유죄가 되었고 징역 5년형을 받았다. 그리고 28년 뒤, 김근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반이 지난 2014년이 되어서야 김근태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고문으로 허위 진술을 강요하고, 이렇게 얻어 낸 진술은 유죄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정의가 이제서야 인정을 받은 셈이다. ‘고문 빼고 다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는 지금,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 애써 온 김근태의 시간을 만화로 돌아본다. 뚝심 있는 작가 박건웅이 550쪽이 넘는 만화로 생생하게 담아 냈다.

    김근태, 남영동에서 견뎌 낸 ‘짐승 같은 시간’을 기록했다

    ‘남영동에 끌려 간다’는 말은 남영동에 가서 고문을 당한다는 뜻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고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힘쓰고 있던 김근태는 1985년 9월 4일 남영동에 끌려 갔다.

    22일이 지나 남영동에서 빠져나올 때까지, 김근태는 남영동 건물 5층 맨 끝 방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문을 10차례 당했다. 물고문부터 시작해서 전기 고문, 전기봉 고문 들을 견디고 고문자들이 가하는 심리적 고문까지도 당하며 짐승 같은 시간을 보냈다.

    김근태는 굴복을 바라는 고문자들의 요구에 당장은 저항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에 마지막 자존심의 불씨는 지키며 이 끔찍한 시간을 이겨 냈다. 1985년 12월 19일, 법원에서 김근태는 고문자들이 몸과 머리에 각인 시켜 놓은 고문 트라우마를 벗어던지고, 남영동에서 있었던 고문의 실상을 모두에게 고발했다.

    《짐승의 시간》은 김근태가 남영동에서 강요받았던 ‘짐승 같은 시간’을 만화로 기록한 책이다.

    짐승의 시간

    평범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지옥을 재현했다

    끔찍한 고문을 가하는 이들은 길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자식의 대학 입시나 취업을 걱정하는 사람들, 그이들은 누군가에는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라디오를 듣고 잡지를 읽으며 돌아오는 기념일에 식구들에게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는 이들은,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에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끔찍한 고문을 가했다.

    1호선 남영역에서 고개만 들면 볼 수 있는 회백색의 건물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고문을 자행했다. 그들은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떠한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끔찍한 고문이 시작된다.

    《짐승의 시간》은 평범한 사람들이 제도나 틀 안에 갇혀 행동할 때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작가 박건웅은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직업’으로 고문을 행하는 자들의 폭력적인 몸과, 고문을 가하며 때로는 희열을 느끼는 얼굴 표정까지 놓치지 않고 표현해 냈다.

    바로 지금, 김근태 정신을 기억하고 지켜 나가야 할 때

    “거대 국가 폭력 앞에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지는 거다. (……) 부조리한 사회에 눈 감고 애써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 _김근태, 2009년, 전남대학교 시국강연 내용 가운데

    김근태는 정부 기관이 가하는 고문, 즉 국가 폭력을 겪었고 이 문제를 세상에 알려 다시는 그러한 국가 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초석을 마련했다.

    만화에서 다루고 있는 1980년대에서 30년이 지난 지금, 민간인 사찰과 간첩 조작 사건이 벌어지는 가운데 ‘고문’이 되살아나지 않은 것은 김근태 덕이다. 그러나 이를 지켜내기 위해 김근태가 짊어진 몫은 너무나 크다.

    고문 후유증으로 해마다 9월이면 몸살을 앓았다. 치아 치료를 받으러 치과에 갔다가 고문 당시 기억이 떠올라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올 정도로 고문 트라우마도 김근태를 괴롭혔다. 생을 마감하기 전 진단받은 파킨슨병도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고 한다.

    ‘로버트케네디 인권상’을 받고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된 김근태는 우리 나라의 민주주의를 한 단계 발전시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오롯이 바친 셈이다. 한마디로 김근태는 우리나라 인권 운동의 상징이자 민주주의 실천자이다.

    우리가 이렇게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어쩌면 김근태와 같은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그때 그 시간을 이겨 내서가 아닐까. 바로 지금이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우리의 무관심과 싸워야 한다’는 김근태의 말을 기억하고 지켜나가야 할 때이다.

    유럽에서 주목한 만화가 박건웅의 장편 그래픽 노블

    《짐승의 시간》은 2013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기획한 해외 진출 기획원고 개발지원 사업에 선정되어 유럽 출판시장에 이미 선을 보였다. 그 결과 부아뜨 아 뷜, 데 홍 덩 로, 아그륌, 캄부라키, 엉 쁠루아이에 뒤 무아, 드로조필, 라쿠풀라 등 모두 7군데나 되는 유럽 출판사에서 박건웅의 만화 《짐승의 시간》에 관심을 보였다.

    해외 진출 기획원고 개발지원 사업에 선정된 여러 원고 가운데 해외 출판사의 러브콜을 가장 뜨겁게 받은 책이다. 작품을 살펴 본 유럽 출판사들은 박건웅 작가가 만화로 표현해 낸 그림과 연출이 매우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와 정치인을 다루고 있지만, ‘고문’은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문제다. 보편적인 주제와 박건웅 작가의 작품성이 유럽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노근리 학살, 제주 4·3 항쟁, 비전향 장기수 등, 주제마다 그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기법을 고민하고 작품으로 표현해내는 작가 박건웅. 이제는 ‘고문’이라는 인간 존엄의 문제까지 장편 그래픽 노블로 그려 냈다.

    돼지가 어떻게 죽는지 직접 본 이들은 고기를 먹지 못한다. 그러나 이를 보지 못한 이들은 맛있게 고기를 먹을 수 있다. 작가 박건웅은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짐승 같은 시간을 보낸 김근태의 삶을 날것으로 우리 앞에 들이민다. 이 만화를 본 당신은 우리가 공기처럼 느끼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 것인가? 이것이 작가 박건웅이 이 만화를 볼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