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용서’의 폭력을 넘어 ②
하필이면 왜 ‘일본’인가. 그 배경과 맥락에 대해
    2014년 07월 04일 09:5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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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인의 계보, 수입상과 고물상 링크

전 주의 포스트에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기술해봤는데, 여기에서 한 가지 발생되어지는 문제는, 왜 하필이면 신자유주의 시기의 “수입상과 고물상의 대결”에 “일본”이라는 주제가 이렇게까지 중요하게 부상되는가 라는 것입니다.

실은 한국 “지식인” 사회는 – 거칠게 이야기하면 – 대미 종속은 80~90%며 나머지는 대유럽 및 대일 종속일 것입니다. 물론 “고물상”들의 윗세대 같으면 그 당시 “내지”의 제국대학이나 경성제대 출신들이고, 또 그들이 만들어놓은 한국형 민족주의 담론은 일본식 민족주의 구조와 대단히 흡사하다는 거야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근세 사회”(전통시대 말기의 사회를 근대지상주의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보다 근대적으로 보이게끔 하기 위해 가져다 붙인 명칭, 일본에서는 1900년대 이후 사용되며 한국”학계”에서도 물론 통용됩니다), “단일민족” 등등 많은 개념어들이 동일하고, 예컨대 한국에서의 향가 정전화 작업은 일본에서의 <만엽집> 정전화 작업의 영향을 다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조적 흡사성이 있다 하더라도 반세기 이상의 시간이 지나 한국 “국학”은 이미 일본과 굳이 그렇게까지 유관하지도 않는 하나의 국산 산업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 “국”자 학과 교수의 절대 다수는 국내 학위 소지자며 도일 유학 유경험자는 이제는 극히 소수입니다.

“수입상” 쪽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예컨대 서울대 전임교수 중에서는 미국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약 50%이며, 그 반면에 일본 박사학위 소지자들은 약 2,5%에 불과합니다. 차라리 – 영어가 더 잘 된다고 생각되는 – 영국, 독일 박사학위 소지자들이 더 많다는 거죠. 그러니까 대미종속이 거의 절대적이다 싶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이라는 사회 전체로 봐서는 “일본”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변수인가요? 대일무역이나 일본발 투자, 기술협력, 그리고 과거 일본이나 만주국의 경제모델 벤치마킹이 중요했던 박정희 시절만 해도 그랬지만, 지금 같으면 관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오늘날 한국 수출 통계 (관련 링크)를 보면 대일 수출은 중국/홍콩을 합한 대중국 수출의 5분의 1일에 불과합니다.

물론 일본산 부품이나 정밀기계 등의 수입에 아직 상당히 의존하지만, 종합적으로 무역/투자/기술협력 차원에서는 일본은 거의 미국, 중국, 유럽 다음으로 밀린 셈입니다.

일본식 경제모델? 지금 일본도 한국도 국가 주도 신자유주의형으로 변모한 거고, 이 길에는 차라리 많은 방면으로 노동자에 대한 보다 야수적 착취가 가능한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게 앞장서가고 있습니다.

군사안보? 금년 7월1일 “헌법 해석 변경”, 즉 “집단자위권 허용”으로 일본의 “전후”는 사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일본은 대외 침략이 가능한 “보통” 亞제국주의 국가로 재생된 것입니다.

이 전쟁의 무대가 아마도 한반도가 된다는 차원에서는 우리로서도 우려스럽고, 일본의 시민사회와 함께 손잡아 적극 반대할 일입니다만…과연 일본이 독자적으로 중국/북조선에 대한 전쟁 수행이 가능할까요?

지금 같으면 종합 국력으로는 중국이 일본을 능가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니까 “전쟁”이라 해도, 결국 – 이번 해석 개헌을 적극 환영한 – 미국의 앞잡이로서 할 전쟁이겠죠. 아마도 다시 한 번 미국의 총알받이가 돼 수십만 단위로 죽임을 당해야 할 한국군과 함께 할 셈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을 – 한국과 마찬가지로 – 어떤 독립변수로 보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둘 다 미국의 군사보호령에 불과하며 주권의 상당한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본”보다는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화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의 핵심국가며 한-일 양국을 사실상 군사적으로 콘트롤하고 있는 “미국”이 돼야 할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고물상”과 “수입상”의 주된 격전은 일본 문제/과거 식민지 문제 등을 둘러싼 분야에서 벌여졌는가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어떤 식민지에서도 식민모국을 자유로이 논할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미 종속(사실상 미국에 의한 準식민화) 문제를 선도적으로 논파하신 강정구 선생님이 어떻게 되셨는지 기억하시죠?

아무것도 아닌 김일성과 관련된 작은 표현이 빌미가 돼 그는 사법기관에 의해서 “지식인/교수 사회”로부터 강제 제명을 당한 셈이었습니다. 어떤 식민지도 민주국가일 리가 없으며,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자기기만을 하느니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둘째 이유는 조금 복잡합니다. 한국 지배층은 매우 심각한 집단적인 인지 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일면으로는, 한국이라는 국가를 만든 “건국 집단”은 애당초에 식민지 관료 및 지식인/부르주아들이며 (김구나 이범석으로 상징되어지는 일부 중국 국민당의 한국인 협력자도 있었지만 이미 이승만 치하에서 거의 몰락했습니다) 한국은 식민지 조선을 그대로 이어간 나라입니다.

이건 예컨대 우리의 법 역사를 보면 아주 명백합니다. 아무리 “대한민국”이 세워진다 해도, 1960년까지 대한민국 법정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민법 (즉, 여러 가지로 개정된 1898년 메이지 민법)은 그대로 이용돼 왔으며, 그 뒤에는 한국 민법은 실행되었지만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일본 민법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 “건국 집단”의 개인적 “친일”의 문제만도 아니고 국가 자체가 식민지국가를 후계했다는 것부터 문제인 셈이죠. 학교 체벌부터 군대 기합까지, 식민지 시대의 가장 악취는 폐습들이 다 그대로 존속된 것도 주지의 사실일 뿐입니다.

박정희-기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특히 과거 만주국을 사실상 국가모델로 삼았던 박정희 시대는 심했는데, 일본/만주모델의 본격적인 수정은 부분적 민주화와 신자유주의화 과정에서, 1980-90년대에 이루어진 셈입니다.

참, 위안부 문제가 90년대 초반 처음 공론화된 것도, 오로지 민주화의 덕입니다. 스스로도 한국 전쟁 시절에 “빨갱이 여성”을 잡아 성노예화하고 위안소를 운영해본 한국 군바리 집단으로서는, 이 문제는 하등의 관심사가 된 적도 없었습니다. 황군의 후예들은 왜 황군의 “관습”을 문제 삼겠습니까?

위의 이야기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아닌 명분의 차원에서는, 특히 민족주의적 명분이 강한 북조선과의 체제경쟁 차원에서는 한국 지배층은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 코스프레(역할극)를 조금 심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야말로 “황군 장교의 모범”에 가까운 박정희, 기시 노부스케 등과 절친하고 술김에 자신을 “메이지 유신 지사”에 빗댄 바로 그 박정희는 국내에서는 “고물상” 농사도 많이 지어야 했고, 또 (대부분이 극빈층이 된) 독립운동가들을 포상하고 지원해줄 보훈처를 세워야 하고 1969년에 남산에서 백범 감구 동상도 세워야 했습니다.

그의 혼네 (속마음)가 어떠하든, 타테마에 (겉모습)를 이런 방식으로 갖추어야 했던 셈이죠. 물론 코스프레하는 데에는 정치인들은 기업인보다 훨 더 고생했습니다. 이병철은 매년 초에 동경행하는 것, “동경 구상”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삼성 안에서는 굳이 민족주의적인 코스프레를 할 필요가 없었던 셈이죠. 그런데 바깥 사회에서는 “명분” 차원에서는 독립기념관 등등 국가 주도 민족주의의 성전들이 필요했던 것이고 “상해임시정부 법통” 등의 수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지 부조화에 시달려온 한국 지배층으로서는, “수입상”이 제공한 포스트/탈민족 담론은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민족”이 해체되어야 할 구시대 산물이고 민족을 포함한 모든 거대서사들이 허구일 뿐이고, 식민지 현실이 아무리 암흑해도 거기에서도 긍정적이다 싶은 “제3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이것은 해방입니다!

그러면, 신자유주의/해외 자본에의 개방 시대 알맞게 민족주의적 코스프레 수준도 과감히 조절하고, 무엇보다 국제자본에 유익한 “개방적 분위기”를 조성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일각의 “수입상”과 신자유주의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던 대한민국의 지배자들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박유하 현상”의 어떤 거시적인 뿌리는 대체로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찾는 게 맞을 듯 합니다 (다음주 계속).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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