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2014년 06월 27일 09: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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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에 부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는 한상원씨가 <@시대와 철학>에 쓴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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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가 베를린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나는 이미 2011년 5월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움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강연만 마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이어진 다른 강연을 거의 대부분 참석해 청중석에서 모든 연사들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던 진지한 노학자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베를린 일정 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6월 13일 열린, 그와 그의 오랜 지적 동료이며 베를린 자유대학교(FU Berlin) 철학과 명예교수인 (그리고 나의 부지도교수이기도 한) 프리더 오토 볼프(Frieder Otto Wolf) 사이의 대담이었다.

    두 노(老) 거장들의 우정 어린 대화 속에 진행된 이번 행사는 발리바르가 1993년 집필한 책 <맑스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rx)>이 오토 볼프의 변역으로 최근 독일에서 새로 출판된 것을 기념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지역에 위치한 인문학 서점 b_books에서 열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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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발리바르에 대해서야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프리더 오토 볼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독일에 얼마 되지 않는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으로 1970년대 이래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으며, 최근에는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는다(Lire le Capital>를 최초로 독어로 완역했다.

    기존의 번역은 영어판, 한국어판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을 번역했을 뿐 랑시에르, 마슈레 등 다른 저자들의 글은 번역되지 않았으며 숱한 오역으로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 그뿐 아니라, 알튀세르 전집을 편집, 발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실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89년까지, 그리고 1994년부터 99년까지 두 차례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으며, 현재 독일 휴머니즘 연합(Humanistischer Verband Deutschlands)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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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발리바르는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조류의 맑스주의 정치철학들(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날 이 철학자들의 부흥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맑스의 철학>을 집필한 1993년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 ‘맑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지적, 실천적 영역에 확산되고 그 자리에 푸코,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등 새로운 이론 조류들이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에 맑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저작 의도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시에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공식적 맑스주의 조류들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 맑스주의 철학 조류의 결정적 문제는 맑스의 ‘철학’을 다른 저작들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경제학 비판’의 경우 물신주의를 비롯한 일부만이 논의 주제로 부각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이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찰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맑스주의의 극단적으로 위험한 사고는 특히나 구 소련을 중심으로 맑스주의를 ‘체계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발리바르 자신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반체계적 서술’에 몰두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식 맑스주의의 체계화 경향이 그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맑스주의라는 유기적인 이념과 담론이 당 형태의 운동으로 고착화되는 데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반체계적 서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맑스의 철학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으로 정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맑스의 사상이 하나의 동일한 체계로 고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맑스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는 것이 워낙 일상적 언어용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편집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현재와 같은 단수 표현으로 제목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라는 굳어진 사상체계도, 또 맑스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시도도 모두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맑스 이론의 대안은 오히려 맑스의 사상 자체를 ‘변형’하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미셸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근대)철학적인 역사 개념이자 19세기적인 진화론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며 비판한 이래로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한 뒤,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자본주의 비판으로서 맑스의 사상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맑스가 말한 것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맑스가 제공한 도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작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맑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관념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발리바르에게 있어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은 ‘다원적 맑시즘’의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진 대담에서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단수로서의 철학’이라는 관념에 종말을 고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특성 상황에 대한 반성적인 이해로서 다수여야 하며, 이는 정치적 행동과 관련을 맺으며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은 마지막 단어를, 궁극적인 답을 갖지 않는다. 언제나 철학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 것, 담론화 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반성활동을 통해 이를 도그마로 만들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또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의해 196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자본을 읽자’ 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적 운동은 맑스 이론을 단지 재발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맑스 사상의 재구성에 기여했고 이는 특히 (헤겔을 차용한) 기존 맑스주의의 논리적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상이한 사회에 대한 상이한 지배분석의 필요성’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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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청중토론 시간에 나는 지젝, 바디우, 네그리, 아감벤 등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맑스주의 내지 비판적 철학이론들에 대한 바디우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발리바르의 제자이기도 한) 진태원 선생이 한국에서 이 철학 이론들을 “좌파 메시아주의”라고 비판한 뒤 촉발된 논쟁을 발리바르에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말했다. 발리바르는 나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며 친절하게도 무려 20분가량을 할애해 아주 상세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새로운 조류의 비판적 이론들을, ‘맑스주의의 죽음’이 선언된 상황에서 철학적 담론의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시도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저자들 중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거부해야 할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라는 게다.

    발리바르는 이 저자들이 모두 훌륭하고 발리바르 자신보다 뛰어나다며 (매우 겸손하게) 그들의 이론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이 훌륭한 이론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사상 전체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에 있어서 그 사상적 자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됐다. 이는 맑스만이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는 그의 모두발언의 결론과 연결되는 주장이다.

    즉,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은 푸코, 한나 아렌트, 들뢰즈 등 다양한 형태의 담론들로부터 얼마든지 비판적인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단순화된 기존 1세대 맑스주의의 변형과 재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날 맑스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달리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을 사고해야 한다. 이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우리가 맑스 자신으로부터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이라는 주장이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 발리바르는 맑스 자신의 사상에도 ‘메시아적인 것’의 요소, 즉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 것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운, 다른 형태의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종말론적 열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정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고 현재의 상황을 보상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 자신은 매우 비판적이라고 고백했다.

    이어 내 질문에 대해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소개하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조류들은 실천적으로 반드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철학 이론가들의 사상은 각자가 가진 장점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각 이론가들의 장점들을 중첩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맑스 이론의 현재화와 재구성은 무엇보다도 도그마적 체계화에 대한 거부와 다원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본주의 비판의 사상적 원천을 넓게 개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발리바르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스주의의 다원성’에 대한 강조는 맑스의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고정시키고자 했던 20세기의 공식적 맑스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다만 나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을 덧붙이고 싶다. 맑스주의와 메시아적 사상의 결합은 맑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려고 했던 블로흐뿐 아니라 벤야민과 아도르노 같은 유대인 지식인들에 의해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이념을 변혁적 정치와 결합하려는 시도들에 의해서도 이미 선취된 것이었다.

    벤야민은 그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결합을 새로운 역사 인식의 필수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직된 사회와 이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들 그리고 이 투쟁들로 구성되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현존의 ‘초월’이라는 신학적인 이념과 결합되지 않으면 손쉽게 현재 상황에 대한 타협과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교조화와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체계화)으로부터 비롯한 성찰이다.

    아도르노 역시 유물론과 신학은 그 목적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의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강조되는 ‘우상숭배 금지 원칙(Bilderverbot)’과 결합시켜서 현실의 모순적인 논리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비판이론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한다.

    즉 비판이론은 긍정적인 규범적 당위(예컨대 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들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실현이 사회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즉 내재적 비판으로써만 진정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내재적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나 현존하는 사회의 변화, 즉 ‘초월’에 있는 것이다.

    나는 유물론적 이론이 이렇게 초월에 대한 이념을 수용함으로써만 일관된 비판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물리쳐선 안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나는 정치를 메시아주의로 환원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메시아주의적 요소와 유물론적 정치 이론이 결합되는 것(이는 다른 말로 “‘구원’과 ‘해방’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을 그 자체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청중의 질문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더 소개해보자.

    발리바르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을 비판하며 ‘최종심급’에 대한 사유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청중은 “최종심급에 대한 관념 없이 어떻게 비판과 정치가 가능한가?” 하고 물었는데, 발리바르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관념이 그 당시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포기할 수 없는 유물론의 시금석이었으며, 이를 폐기할 경우 마치 관념론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맑스주의 내에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연하게도 맑스주의자들이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계급투쟁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으로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유물론의 시금석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그람시가 도달한 문제의식(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의 거부)보다도 훨씬 후퇴한 영역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엥겔스에게서 차용한) 수려한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이 관념의 문제를 상쇄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최종심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봉착한 이 두 문제를 모두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이 상반된 정식화는 계급투쟁과 그 중요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결정심급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그러나 ‘최종’ 심급이라는 표현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그 표현이 마치 하나의 사회가 수직적인 축과 결정구조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이 표현을 포기해야 하며, 지배구조의 다원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 영역이 동일하게 결정력을 갖는다’는 식의 다원주의적인 표상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중층결정 과정에서 각 사회적 영역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가는 지배적 구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 그리고 청중들이 함께 대화와 토론으로 만들어간 이 대담회는 오늘날 급진 정치철학의 재구성에 대해 고민하는 신구세대의 의견 교환의 장이었다.

    젊은 세대는 ‘오늘날 과연 당이 필요한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는 어떻게 긴장 없이 공존 가능한가?’ 같은 새로운 질문과 의견들을 전달했고, 두 노학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몇몇 과도한 편향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비판적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철학의 거장들과 젊은 세대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격식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이 ‘키치’적인 철학 행사는 그 자체로 나에게 몹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아가 두 노학자들이 자신들의 변함없는 오랜 우정을 과시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습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철학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것은 동시에 존경과 경탄의 감성이 드는 광경이기도 했다. 베를린의 어느 여름날에 펼쳐진, 인문학적이며 또한 급진적인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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