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
논쟁과 소송에 대하여
법이 들어설 자리와 빠질 자리를 생각하다
By 서윤
    2014년 06월 26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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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구를 비판할 때는 그 타당성과 정당성을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타당성이 연구결과가 내부적으로 지닌 논조의 일관성이라면, 정당성은 해당 연구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시의성과 도덕성, 수용가능성 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맞아떨어질 수 있어도 몽상에 불과한 것이 있고, 현실적으로는 수용가능하고 도덕적이긴 하더라도 내적 모순을 품은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근간 논란의 가운데에 있는 박유하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후자-내적 논리의 모순-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지금으로선 가장 많은 이들이 분개하는 것으로 보이는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욕하는 표현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아직 읽지 않거나 읽을 생각이 없는 독자들을 위해 간단하게 그 사항을 정리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박유하 교수가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절차 속에서입니다.

(1) ‘위안부’는 일본의 오래된 공창제가 제국주의 통치술로 변형된 제도이다.

(2) 그러므로 일본의 ‘위안부’ 운영은 전쟁수행을 위한 국가의 조직적 성 수탈이다.

(3) 이런 견지에서 ‘위안부’와 ‘일본군’은 전쟁수행에 동원된 집단으로서의 기능적 동질성을 지닌다.

이런 논리적 전제를 놓고 이야기는 다음처럼 진행됩니다.

(1) 그러나 기능적으로 동일하면서도 군인과 위안부 사이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구도가 존재하며, 이것은 여성에 대한 성 수탈로써 제도 자체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2) 조선인 여성을 위안부에 끌어들인 것은 위안부 제도에 적극적으로 응하기 위한 포주들이며, 그들은 강제로 연행하거나 혹은 조선인 여성의 가난을 이용하여 사기행각을 벌였다.

(3) 당시 법적으로 강제연행 및 사기행위 등에 대한 처벌이나 방지가 없었으므로, (2)에서의 폭력은 결국 위안부 제도가 방기하고 조장한 것과 다름없다.

(4) 제도라는 거대한 틀에 가려 불법을 자행한 포주들의 범죄를 간과해선 안 된다.

(5) 그러나 여전히 궁극적이고 가장 큰 책임은 그런 환경을 만든 일본에 있다.

더불어 저자는 위안부 내에서도 존재했던 민족간 차별도 지적하며, 일본은 ‘같은 황국신민’이라는 명목을 놓고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는 자기모순을 저질렀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일본의 당시 식민통치가 왜 비판 받아야 하는지를 드러내는 지점이라고도 합니다.

지금 상당한 공분을 사고 있는 부분, 다시 말해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다거나 일본군과 교분을 나누었다는 등의 서술을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1) 피폐했던 삶 속에서 그들은 ‘일본인’으로서, ‘위안부’로서의 사명감을 지니거나, 성 수탈을 당하는 고통 속에서도 작은 낭만이나마 찾고자 애썼던 모습을 볼 수 있다.

(2) 이것은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 살아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볼 수 있다.

(3) 그러나 조선인 위안부들의 이 같은 모습은 제국주의 국가체계를 내면화한 것에 불과하며 체제에 의해 이식된 생각일 뿐이다.

(4) 우리는 식민통치 하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지독한 모순을 대면할 필요가 있다.

(5) 그럼으로써 위안부 제도를 만들어 개개인의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일본의 책임을 세밀하고 철저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은 누차에 걸쳐 책에 서술되는 부분입니다. 저의 해석은 일절 없음을 분명하게 말씀 드립니다.

제국의 그늘-위안부

어떤 분들은,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와 같은 논조가 책의 3부로 이어지며 일본의 법적 책임을 희석시키는 데 사용되기에 문제가 되고 있다고도 지적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그러한 지적이 비판적 책읽기의 부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동지적 관계’라는 표현을 통해 드러내려 했던 식민지 시절의 구조적 모순에 동의하면 할수록 일본의 법적 책임은 더욱 강화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저자는 스스로 ‘일본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정밀한 논조’를 계발하고도 현재의 상황 비판에 와서는 그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저자의 논조대로라면, ‘동지적 관계’를 만든 일본의 법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므로 그 책임 또한 법적으로 져야만 함이 옳습니다. 관련 법안을 발의하고 시행하여 일본이 다시는 이전과 같은 폭력적 제도를 운영할 수 없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또한 법제에 의해 모순적인 삶을 감내해야 했던 모든 피해자들에게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대협을 비롯하여 일본 내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가들의 모든 활동은 정치적으로 흘러야 합니다. 시민운동만으로는 법과 제도가 마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까지의 일련의 활동들이 정치적으로 흘렀기에 위안부 문제가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함으로써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정대협의 주도 하에 이어져온 위안부 문제에 대한 논의들에서, ‘우리는 완벽한 피해자’라는 인식이 간과해 온 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간과된 것들이 ‘동지적 관계’라는 논리적 장치를 통하여 낱낱이 드러낼 수 있는 제도 내 온갖 모순들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저는 완전하게 동의합니다.

그러나 반복하건대, 여기에 완전하게 동의하기 때문에 오히려 현재의 대한 저자의 비판에 저는 동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저자의 현상 진단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악용된 포스트주의 담론과 완전히 결이 같으며, 일본의 우익을 대변한다고 강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그런 비판도 저자는 감수해야 한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작으나마 한 챕터를 할애하여 일본이 국가적으로 사죄를 표명해야 할 필요성과 의의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더불어 4부에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의 오랜 식민통치 역사에서 있어 온, 그리고 현재에도 이어지는 여성에 대한 성 수탈의 악랄한 인습을 아울러 반성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러한 점들을 놓고 보면 저자가 어떤 지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가 명료하게 정리됩니다.

(1) 문제를 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정밀한 논점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현상에 대한 진단이 그에 어긋나는 내적 논리의 균열을 일으킨다.

(2) 세계 식민통치 역사 및 군의 운용에서 지금까지도 산재하는 여성 억압의 문제를 아울러 반성해야 함은 마땅하나, 그 전에 여성 억압에 대한 개별적 사례연구의 필요성은 간과하고 있다.

저는 (2)에서 제기한 개별적 사례연구 즉, 일본의 위안부 운용이 지니는 여성 억압이 다른 경우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에 대한 연구에서 박유하 교수의 저서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악용된 포스트주의 담론과 결이 같다는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저자가 일본의 입장을 설명하는 이유가 일본의 국가적 사죄를 요구하지 말아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일본의 입장을 정확하게 앎으로 해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을 계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앞서 “한편 생각해보면 그런 비판도 저자는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는, 저자가 일본을 설득하고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법적 책임’의 문제를 흐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관계로만 따져봐도 일본의 위안부 운용은 불법에 해당하며, 설령 일본이 직접 폭력의 주체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범죄를 조장하고 방기한 시스템을 만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태도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서의 진실은, 지젝의 말마따나, 그 내부(마음)가 아닌 외부(행동)에 있는 까닭입니다. 박노자 교수가 박유하 교수에 대해 쓴 논박은 바로 이러한 점을 파고들어 정확하게 비판한다고 생각합니다. (박노자 레디앙 글 링크)

박유하 교수가 이점을 놓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 추측은 가능하나 그것은 직접 확인하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박유하 교수 역시 국가적 차원에서 일본이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으며, 그것을 철저하게 따지기 위한 논리를 계발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난 논리적 균열-타당성의 부족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사안이라는 것도 확실합니다.

의구심이 드는 것은, 이 비판과 보완이라는 것이 소송이란 과정을 통해서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법적 판결은 학자들의 비판이나 대중의 비난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만일 원고측 승소로 판결이 나게 된다면 박유하 교수의 연구가 지닌 장단점 같은 것은 논외로 밀려난 채 연구 자체가 틀렸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이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기존의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를 해체하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견고하고 정밀하게 구축하는 학문적 시도가 왜 공식적으로 부정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적으로 부족한 부분은 비판하고 토의하여 서로 보완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그 정당성이 부정당한 연구에서 그 장점을 취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공식 선언된 부당성은 연구에 대한 어떤 형태의 비난과 비판도 정당한 것으로 옹호하는 근거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단언컨대 이것 또한 법이 조장하는 폭력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 폭력은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원고측 패소로 끝난다면 박유하 교수의 연구는 정상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고측 패소는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왜냐하면 ‘친일/제국주의 찬양’이란 (부당한) 평가로 그러잖아도 마녀 사냥을 당하고 있는 박유하 교수에 대한 비난 여론은 판결에 대한 부당함을 토로하는 목소리와 합쳐져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추측은 묵과해버린다고 물러서더라도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원고측 패소 판결이 이뤄질 경우 위안부 할머니들이 다시 한 번 받을 상처는 누가 보상해줄 수 있겠습니까?

소송을 맡은 박선아 교수는 소송을 건 경위에 대해 설명하며(관련링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과연 이것이 어떠한 목적에서 쓰여져 있는 건지. 지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전세계적으로, 전시 성폭력문제, 성노예 문제라는 것이 여러 가지 보고서에 의해서 확인이 되고 국제사회의 연대를 얻어놓은 입장인데 과연 그 부분에 있어서 그 중에서 굉장히 지금 일본이 강제성을 부인하는 논거로 사용되는 부분을 전체적인 것 인양 하고 이 책을 작성한 것이 과연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것인지, 어떠한 의도인지 심히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부분들은 사실은 학문적 영역에서 비판이 가능한 것이지, 고소를 할 때는 개별적인 기술의 부분이 허위사실이 입증이 되어야 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희는 거기까지는 발전하진 않고 개별적인 부분을 하였는데요. 맥락과 의도에 대한 부분들은 오히려 저희는 더 진지하게, 맥락과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 소송을 제기하였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더욱 진지하고 진심으로 저자와 출판사에게 묻고 싶습니다.

할머니들 앞에서 맥락과 의도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해당되는 기술들은 이러한 내용이라는 것은 다시 한 번 얘기해줄 수 있었으면 오히려 일이 잘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지막 말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어째서 소송을 걸기 이전에 저자에게 따로 연락을 취해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박유하 교수 본인으로부터 확인해본 결과 그러한 일은 없었습니다. “개별적인 부분을 하였다”는 설명은, 다시 말하면 이런 말이 되는 건 아닙니까? : 우리는 법적으로 말꼬투리를 잡겠다.

그러나 법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도 법이 사회에 미치는 효용은 어째서 간과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책에 있는 논리적 장치 하나를 개별적으로 떼어 법정으로 가져간다면, 이미 그 논리적 장치를 포함한 논지 전체가 공적 심판대에 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법은 개별적 사례를 다루더라도 그를 통해 보편적 판단의 경향을 이끌어내는 상징적 권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기왕 소송으로 번진 일이니 이제 와서 이런 비판은 소용이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법정으로 가져가기 전에 단 한 걸음만 멈추고 상대에게 대화를 요구하는 태도는 많은 것을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에 다소 길게 지면을 할애해보았습니다.

바라건대, 이 소송이 중재위원회와 같은 방법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경청하고 오해가 풀리는 쪽으로 매듭지어졌으면 합니다. 소송이 걸린 자체로 이미 양측 모두 상처를 입은 상황이지만, 그나마 그것이 서로에게 상흔을 덜 남기는 최선의 방안이 될 것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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